[2021 부산국제영화제]
BIFF #5호 [프리뷰] 레오스 카락스 감독, '아네트'
2021-10-10
글 : 송경원

<아네트> Annette

레오스 카락스/프랑스/2021년/140분/갈라 프레젠테이션

“신사 숙녀 여러분, 이제부터 침묵해 주십시오. 숨 쉬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을 겁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막이 오르고 노래가 흐르면 예언 같았던 내레이션은 금세 현실이 된다. 레오 카락스의 신작 <아네트>는 음악과 침묵, 희극과 비극, 충동과 욕망이 뒤섞여 경계를 가로지르고, 마침내 익숙한 것들을 해체하는 환상적인 뮤지컬이다. <소년, 소녀를 만나다>(1984), <나쁜 피>(1986)의 도발적인 상상력은 물론 최근 <홀리 모터스>(2012)에서도 자기 파괴적인 형식미를 펼쳐냈던 레오스 카락스가 이번엔 오랫동안 꿈꿔왔던 뮤지컬에 도전한다. <홀리 모터스>가 기계장치로서 영화 매체에 대한 창의적인 탐구였다면 <아네트>는 뮤지컬, 그리고 음악과 극에 대한 탐미적인 탐색이다.

오페라 가수 안(마리옹 꼬띠아르)와 스탠드업 코미디언 헨리(아담 드라이버)는 운명 같은 사랑에 빠진다. 둘은 같으면서도 다르다. 아니 다르면서도 같다. 헨리가 ‘죽여주는’ 무대를 하고 왔다고 자랑할 때 안은 무대에서 사람들을 ‘구원했다’ 말한다. 사과를 먹는 오페라 배우와 바나나를 먹는 코미디언은 스타로서 둘 다 정점에 섰을 때 만나 불꽃같은 사랑을 나누고 둘 사이 딸 아네트가 태어난다. 꿈처럼 행복했던 시간도 잠시, 승승장구하는 안과 달리 헨리의 인기가 식어가자 불안한 기운이 감돈다. 헨리가 자기비하의 그늘 아래 점차 폭력적인 충동에 잠식되자 안은 관계 회복을 위한 크루즈 여행을 함께 떠나기로 한다. 하지만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거대한 폭풍우처럼 잔혹한 운명이다.

어쩌면 영화와 가장 닮은 예술 장르는 사진이 아니라 음악일지도 모르겠다. <아네트>는 운명과 비극의 선율 아래 음악을 ‘눈으로 보는’ 영화다. 레오스 카락스는 때론 무대를 하나의 덩어리처럼 롱테이크로 담아내고 때론 비현실적인 장치들을 사용, 익숙한 영화언어를 적극적으로 해체해 가지고 논다. 가령 딸 아네트가 내내 인형의 모습을 등장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뮤지컬 양식과 퍼펫 애니메이션의 신선한 조합, 자기 파괴적인 운명과 비극의 서사, 현란한 색채와 감각적인 무대까지 재료 자체는 그다지 새로울 것 없다. 한데 익숙한 요소들이 레오스 카락스의 손을 거쳤을 때 종전에 접하지 못했던 파괴적 에너지가 발생한다. 헨리는 여러모로 레오스 카락스의 그림자가 반영된 초상처럼 보이는데, 파멸적인 충동에 시달리는 그의 모습은 예술에 대한 상징으로 읽을 수도 있다. 이 모든 유희의 중심에는 미국 록 밴드 스파크스에서 불꽃을 일으킨 음악이 있다. 고전적이고 신화적인 희비극을 형식의 경계를 가로질러 담아낸, 문자 그대로 숨 막힐 듯 아름다운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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