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일상적인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우리가 과거를 돌아볼 때 마음속에 벌어지는 많은 생각들을 담아내고 싶었다.” <소피의 세계>는 외국인 친구 소피가 친구들의 집에 묵었던 나흘간의 시간을, 한참이 지난 뒤 다시금 되돌아보는 이야기다. 되돌아본다는 것은 영화의 본질이기도 하다. 모든 영화는 결국 재현이고, 카메라는 지나간 시간을 현재로 복원시킨다. 다시 볼 때, 찬찬히 생각할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우리가 반복되는 일상이란 핑계로 놓치고 지나가버렸을지도 모를 보석 같은 순간들. <소피의 세계>는 그 소중한 감정들을 정성스럽게 주워 모아 관객 앞에 선물한다. 이제한 감독은 오랫동안 다닌 회사를 퇴사하고 처음으로 연출한 장편영화에서 자신이 어떤 종류의 연출자인지 선명하게 색을 드러냈다. 확신컨대 언젠가 만들어질 이제한 감독의 차기작들은 앞으로 여러 영화제들을 통해 관객들과 꾸준히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른 뒤 그의 첫 발자국인 <소피의 세계>가 어떤 식으로 기억되고 회자될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부산에서 관객들에게 영화를 선보이는 소감이 어떤지.
=부산영화제에 초청을 받은 게 응원이 된다. 이게 정말 한 편의 영화로 말이 되는지 걱정이 많았는데 초청 받았을 때 지난 1년 동안 투자했던 시간에 대해 인정을 받는 기분이었다. 영화를 찍는 과정에서 배운 것들이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는 생각도 들고. 특히 함께 해준 스태프들에게 의미 있는 결과를 남길 수 있어 감사하다.
-오랫동안 다녔던 영화제작사를 나와 첫 장편영화에 도전했다.
=회사를 훨씬 오래 다닐 줄 알았다. 어느 날부터 내 영화에 대한 열망이 커졌고, 지금 연출을 해보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에 8년 동안 다녔던 영화 제작사를 나왔다. 2020년 2월에 퇴사를 하고 처음엔 장편을 쓴다는 게 엄두가 안 나서 단편을 먼저 찍었다. <서울의 꿈>(2020)이란 영화인데 50분 가량 된다. 그걸 찍으면서 장편에 필요한 형태들을 배울 수 있었다. 시간을 버티는 힘이랄까. 4월말부터 시나리오를 한 달 반 정도 썼다. 처음이라 그런지 막히는 부분 없이 빠르게 나왔다. 마침 영화의 배경이 대부분 서울이라 제작비 조달을 위해 서울영상위원회에 서울배경독립영화제작지원 사업에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7월부터 캐스팅과 프리 프로덕션을 들어가 2020년 10월 23일에 크랭크인 했다.
-제작과정을 들어보면 큰 문제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첫 촬영 후 딱 1년 정도 지났다. 신기하게 고비마다 운이 따라줬다. 어딘가에서 한번 멈추면 무한정 길어지기도 하는데 필요할 때 필요한 것들이 찾아와줘서 짧은 시간 안에 완성할 수 있었다. 운명 같은 걸 믿진 않지만 재미있는 일도 있었다. 마지막 촬영을 2021년 1월 11일에 찍었는데 그 장면이 시나리오의 첫 번째 씬이었다. 문득 슬레이트를 보니 2021년 1월 11일 1씬 1테이크 라고 적혀 있는 거다. 신기했다. 스태프들이 의도적인 거 아니냐고 놀리기도 했다. 아마도 내 마음이 그 순간을 특별하게 바라보고 싶었던 것 같다.
-만들어진 과정조차 영화를 매우 닮았다. <소피의 세계>는 특별한 사건을 따라간다기보다는 뒤돌아봤을 때 새삼 특별해지는 순간들을 모아나가는 영화다.
=되돌아본다는 게 참 신기한 거 같다. 찍을 때도 늘 고마웠지만 다시 생각해봐도 함께 해준 스태프들이 진심을 다해줬구나 싶어서 마음이 따뜻해진다. 뭐라도 보답해주고 싶고. 부산영화제에서 상영하는 게 그 첫 걸음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야기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문득 뇌를 스쳤다. 지금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과거에 일어난 일을 되돌아보는 걸 해보고 싶었다. 실제 내가 사는 집이 영화 속에 나오는 경복궁 근처의 그 집이다. 아직도 거기 세 들어 살고 있다. 외국인 관광객들을 보며 여행자가 한국을 떠난 뒤 시작되는 이야기를 그려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행자들이 경복궁 근처를 탐방하는 루트를 따라 자연스럽게 에피소드가 메워졌다.
-제목은 <소피의 세계>지만 소피(아나 루지에로)는 최소한의 뼈대, 안내자, 관찰자이고 영화 속에 여러 인물들이 각자의 작은 세계들을 보여준다. 사실 상 여러 명의 화자가 등장하는 영화다.
=구심점이 되는 경험이 있다. 어느 날 집의 창가에 앉아 멀리 인왕산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이상한, 문득 슬픈 기분이 들었다. 저 산은 되게 오랫동안 저 자리에서 사람들을 보고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 지금 나처럼 저 산을 봐왔던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 뭘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저 산과 나는 다른 시간 축을 살고 있구나 싶은 기분. 문득 산에 올라가봐야 할 것 같아서 인왕산을 직접 올라가 산 쪽에서 우리 집을 바라봤다. 나중에 집으로 돌아와 가만히 생각해보니 집에서 산을 봤던 기억, 산에서 집을 봤던 기억들이 겹쳐지기 시작했다. 서로 다른 시간대에서 서로가 서로의 풍경이 되는 것. 그게 이 영화의 씨앗이었다. 나중에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보니 하나의 세계에 여러 개의 출구가 뚫려 있는 기분이었다. 제목을 붙일 때 불현 듯 어렸을 때 유행했던 <소피의 세계>라는 철학책이 떠올랐다. 거창한 느낌도 없고, 귀엽기도 하고.(웃음)
-수영(김새벽)과 종구(곽민규)의 다툼이 전반부의 중요한 사건이다.
=‘소피라는 외국인이 집에 며칠 묵는다’는 설정이 잡힌 뒤 이제 그 집에 누가 사는지, 어떤 상황인지를 채워야 했다. 자연스럽게 부부가 떠올랐고 모종의 이유로 집을 떠나야 하는 사람들로 설정하고 싶었다. 현재에서 과거를 바라본다는 시점이 더해지면서 질문이 하나 생겼다. 이 부부는 분명 집을 떠난다고 했는데, 2년 후에도 거기에 있다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집과 두 사람의 강한 관계가 필요했고 그런 식으로 장면들에 살이 더해졌다.
-초반 수영과 종규의 다툼을 롱테이크로 찍어 그 순간을 다 지켜보게 만든다. 숨 막히는 침묵까지 담아낸 호흡이 강한 집중력을 발휘한다.
=원래는 짧게, 적어도 한 씬에 네 다섯 컷 정도는 쪼개서 갈려고 콘티도 다 그렸다. 그런데 첫 회 차 촬영 때 쇼트를 쪼개야 한다는 이유 때문에 카메라에 담을 수 있는 밀도나 가능성을 다 버리게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회 차 편집을 하고 나서 이렇게 찍으면 안 되겠다는 판단이 들어서 2회차 부터는 노선을 바꿨다. 최소한의 쇼트를 찍고, 대신 그 안에 최대한의 밀도를 담아내야겠다고. 싸우는 장면은 내가 따로 코멘트도, 리허설도, 디렉팅도 하지 않았다. 대사량이 A4 용지 7장 정도 굉장히 많았다. 배우에게 오롯이 맡겨야겠다는 생각에 서로 상의할 수 있도록 잠시 시간을 준 뒤 찍었는데 첫 테이크에 오케이가 났다.
-현장에서 장면의 뉘앙스를 어떻게 담아내는지에 따라 감독의 성향이 크게 갈린다.
=사실 뒤에도 욕심이 나서 한 번 더 찍긴 했는데 끝까지 찍을 필요가 없었다. 그 장면을 찍으면서 깨달았다. 아, 생각보다 연출이 하는 게 별로 없구나.(웃음) 시나리오를 쓸 때 내 머릿속에서의 대사들은 좀 더 답답한 톤이었는데 배우들이 와서 자기 식으로 해석할 때 내 상상보다 훨씬 좋은 것들이 많다. 그런 장면을 만들어주는 배우들이 고마울 따름이다. 배우들이 가진 해석력을 믿는 게 내 몫이 아닌가 싶다. 정해진 틀 속에 억지로 맞추는 거 보다는 현장에서 창조되는 미묘한 호흡들을 담아나가는 게 즐겁다.
-김새벽, 곽민규, 김우겸, 서영화, 박란, 신석호, 김우겸, 이주연 배우까지 캐스팅이 절반이다.
=배우들은 물론이고 스태프들까지 이 분들과 함께 작업할 수 있었던 모든 순간에 감사한다. 이전의 인연으로 연락드린 분도 있고 처음으로 만난 분들도 있다. 김새벽, 곽민규 배우는 시나리오 쓸 때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다. 다들 바쁘신 분들인데 다행히 절묘하게 일정이 맞아서 순조롭게 캐스팅됐다. 최소한의 인원과 장비로 꾸린 프로덕션이었기 때문에 무엇을 고르고 덜어낼 건지 고민이 많았다. 나를 포함해 9명의 스태프를 결정했고 카메라 렌즈도 32mm 단렌즈로 찍었다. 촬영 시간을 줄이기 위한 것도 있지만 우리 영화에는 담백한 접근이 훨씬 어울린다고 판단했다. 10회 차를 2주 안에 압축해서 찍고 1회 차만 나중에 찍었다. 모두 베테랑들이라 가능한 작업이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
=현장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착한 현장?(웃음) 나를 포함해 다들 조용하고 내성적인 사람들이라 차분한 가운데 친밀한 분위기였다. 영화는 함께 만들어간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던 시간이다. 지금도 기억나는 순간이 있다. 소피의 꿈을 재현하는 장면이 있는데 거기서 모든 등장인물들이 인왕산에 함께 올라 사진을 찍는다. 그런데 그걸 다 보여주는 게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배우들이 그 날 스케줄을 다 맞춰서 모였지만 결국 찍지 않고 소피의 표정만 보여주는 걸로 마무리 지었다. 그런데 솔직히 이게 맞는지 불안하지 않나. 안 쓰더라도 찍어놨어야 했나 싶기도 하고. 나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다. 스스로에 대한 확신도 아직 없다. 그 때 소피의 표정을 잡는 촬영 퍼스트 스태프가 이게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데 너무 안심이 되었다. 허락 받는 느낌? 원래 우리 스태프들이 원체 조용하고 리액션이 없어서.(웃음) 함께 하는 동료들이 내게 확신을 줄 때 한 발 더 나갈 수 있는 것 같다. 영화 속 소피가 그랬듯, 지금도 영화를 찍었던 순간들을 되돌아보면 그저 감사하고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