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만 하는 팔자인가, 아니면 특유의 마당발 기질 때문에 그를 찾는 곳이 많아서일까. 독립예술영화전용관 아트나인, 수입배급사 엣나인필름 대표, DMZ국제다큐멘터리(이하 DMZ영화제) 집행위원장, 영화수입배급사협회 회장 등 정상진 DMZ영화제 집행위원장은 몸은 하난데 직책은 여러 개다. 지난 9월 DMZ영화제가 무사히 막을 내렸지만 그는 여전히 할 일이 태산이다. DMZ영화제가 10월 1일 론칭한 OTT 플랫폼 ‘보다’(Voda, Vision of Documentary Archive)도 그중 하나다. 보다는 영화제 기간 동안 온라인 상영을 하고, 영화제가 끝난 뒤에도 양질의 다큐멘터리를 감상할 수 있는 DMZ의 자체 OTT 플랫폼이다. 웨이브나 왓챠 같은 기존의 OTT를 통해 온라인 상영을 진행한 영화제는 많지만, 영화제가 자체 OTT를 만들어 운영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수입과 배급, 극장업을 두루 겸하고 있는 정상진 위원장이 생각하는 밑그림을 좀더 자세히 들어보았다.
-영화제가 끝났는데도 많이 바쁜가보다.
=영화제를 준비하는 동안 다큐멘터리 감독들이 요구한 것 중 하나가 영화를 만드는 건 잘하겠는데 유통에 자신이 없으니 영화제가 많이 도와달라는 거였다. 극장과 수입배급사를 동시에 운영하는 사람으로서 영화제 상영작을 전부 책임질 수 없고, 그런 이유 때문에 지지난해 집행위원장 제안을 거절했지만, DMZ영화제를 만드는 데 보탬이 된 사람 중 한명으로서 책임감을 느끼고 맡게 된 거다. 2년째 일하고 있지만 정체성에 대해 여전히 혼란을 느끼고 있다. 그럼에도 영화제가 끝난 뒤 경기도와 여러 업무들을 함께 논의하고 진행하고 있다.
-지난 10월1일 론칭한 ‘보다’도 그 업무 중 하나일 것 같다. 웨이브나 왓챠 같은 OTT에서 온라인 상영을 했던 다른 영화제와 달리 DMZ영화제는 자체 플랫폼을 구축했다.
=조직위원장이기도 한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영화제 상영작이 좋아서 주변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데 어디서 볼 수 있냐’고 물어서 기존 IPTV와 OTT 플랫폼을 얘기했다. 조직위원장이 ‘창작자에게 도움이 될 만한 OTT 플랫폼을 직접 만들면 되지 않나’라는 아이디어를 과감하게 내주신 덕분에 우리도 시작할 수 있었다. 올해 예산 1억원으로 기존의 플랫폼과 유사하게 만드는 것으로 발을 뗐다.
-보통 창작자가 수익의 절반을 챙기기도 힘든 다른 OTT와 달리 보다는 창작자에게 무려 수익의 80%를 지급한다고 들었다. ‘8(창작자) 대 2(보다)’라는 수익 배분율은 영화제가 돈을 벌기 힘든 배분 구조가 아닌가.
=경기도의 지원을 받아 공적 자금으로 운영하는 플랫폼인데 왜 돈을 벌어야 하나. 창작자에게 80%를 지급하고 남은 20%는 카드 수수료, 서버 운영비 등 운영비로 충당할 계획이다. 당장은 예산이 빠듯하고 서버 용량이 한계가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창작자에게 더 많은 몫을 지급하려 한다. 그렇게 출발한 보다가 올해 영화제에서 반응이 좋았다. 보다에 접속해 상영작을 관람한 관객수가 1500여명이다.
-파격적인 수익 배분을 앞세운 구조라면 창작자가 작품을 DMZ영화제에서 먼저 선보이고 싶어 할 것 같다.
=보다는 플랫폼보다 창작자의 이익을 지향하는 OTT가 되는 게 목표다. 창작자, 수입사 등 콘텐츠 제공자가 의견을 내면 적극 반영할 것이다. 콘텐츠 구매 가격도 그들이 정한다.
-월 구독료를 결제하는 보통의 OTT와 달리 창작자가 정한 가격으로, 작품별로 구매하게 하는 방식은 창작자에게 보다 투명하게 수익을 정산하기 위한 목적인가.
=그렇다. 좋은 다큐멘터리를 많이 확보해서 라인업 숫자가 늘어나면 월 정액제를 실행할 생각이다. 다만 다큐멘터리 관객층을 더 넓히고, 교육이라는 공적 영역에 한해서 학교에서 단체로 관람하는 무료 수업에는 이용료를 부과하지 않을 생각이다. DMZ영화제에서 교육 프로그램인 ‘독 스쿨’(Doc School) 섹션을 신설한 것도 다큐멘터리를 통한 학생들의 교육을 장려하기 위한 배경에서고, 그것은 이재명 도지사의 공약이기도 하다.
-아직은 상영작이 많지 않다. 프로그램을 확보하는 일이 관건일 것 같다.
=150여편 정도 올라가 있다. 아직은 서버 비용이 넉넉지 않아 많은 작품을 한꺼번에 올리기가 어려웠는데 오늘 회의에서 이 문제를 해결했다. 보다가 업계에 좀 알려졌는지 보다에서 틀겠다는 제안이 여기저기서 들어오고 있다. 창작자가 자신의 영화에 대한 권리를 제대로 가지려면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처럼 매일 실시간으로 몇명의 관객이 감상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데이터를 바탕으로 비즈니스 미팅까지 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려고 한다. DMZ영화제 상영작의 60, 70%가 극장 개봉을 하지 못한다는 현실을 감안해서 작품을 플랫폼에 단순히 올려놓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주 단위로 큐레이팅을 해서 이용자에게 다양한 경험을 선사하는 게 보다의 장기적인 목표이자 과제다.
-지난 9월에 폐막한 DMZ영화제는 수도권 거리두기 4단계 상황에서 열려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코로나19를 처음 맞닥뜨렸던 지난해는 우왕좌왕했었다. 거리두기가 4단계인데도 백화점도 식당도 사람들이 많은 반면 극장만 사람들이 찾지 않는 풍경을 지켜보면서 올해는 영화제 스스로 위축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확진자가 극장을 다녀가도 내가 책임진다는 마음가짐으로 주어진 환경에서 최대한 안전하게 운영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했다. 영화제가 열리기 일주일 전, 모더레이터 없이 감독 혼자서 무대에 서서 20분 정도 영화 얘기를 하는 식으로 진행하겠다고 감독들에게 전달한 것도 그런 고민에서 나온 결정이었다. 지난 2년 동안 시민들의 방역 의식이 높아졌기 때문에 이제는 영화제도 어떻게 하면 코로나19 상황에서 안전하게, 잘 운영할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 할 때인 것 같다.
-아쉬운 점은 없나.
=관객이 중심인 영화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고양 시민들로부터 얘기를 들어보니 영화제에 대해 의외로 잘 모르더라. 고양시와 파주시를 포함해 보다 많은 경기 도민들에게 영화제를 알리고, 시민들이 친근하게 다가올 수 있는 행사를 마련하고자 한다. 상영작 중에서 작품을 엄선해 고양시와 파주시뿐만 아니라 경기도의 10여개 도시에서 순회 상영하는 기획전도 진행하려고 한다. 많은 마케팅 비용을 들여서 한편을 극장 개봉하는 것보다 좋은 다큐멘터리를 묶어서 경기도의 여러 도시를 돌면서 기획전을 여는 편이 입소문을 더 낼 수 있고, 시민들에게도 좋은 다큐멘터리를 소개할 수 있다고 본다.
-독립예술영화전용관 아트나인과 배급사 엣나인필름도 쉽지 않은 상황일 것 같다. 이승준 감독의 신작 <그림자꽃>이 10월27일 극장 개봉한다.
=코로나19 이전에는 멀티플렉스가 스크린 독과점에 대해 예민하게 인지하고 있었다면 극장 산업이 위축된 지금은 멀티플렉스의 생존이 우선이다보니 작은 영화에 대해 관심이 거의 없다. 올해 상반기까지만 해도 멀티플렉스가 한국 다큐멘터리나 작은 영화에 문을 열어주었던 반면, 한국 상업영화나 외화 블록버스터들이 줄줄이 나오는 여름 시장 전후로 작은 영화가 상영관을 잡을 수 있는 가능성이 더 줄어들었다. 물론 극장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극장을 우선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는 동의하지만 말이다. 우리로서 다행인 것은 아트나인이라는 극장을 운영하는 까닭에 기댈 수 있는 상영관이 있다는 사실이다.
-아트나인이 엣나인필름 라인업의 배급 전략 기지인 셈이다.
=그것 말고는 마땅한 수가 없으니까. <그림자꽃>은 이승준 감독의 웰메이드 다큐멘터리지만 마케팅하기가 쉽지 않은 작품이다.
-그런데 왜 배급하기로 했나.
=영화 속 주인공인 김련희씨는 북한 사람인데 어째서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을까. 그는 탈북하지도 않았는데 그를 탈북자로 만든 건 무엇 때문일까. 영화를 보면 답을 내리기 쉽지 않은 질문을 통해 현재 대한민국의 면면을 보여준다. 그런 질문을 관객과 함께 나누고, 함께 생각하고 싶어서다.
-아트나인은 사정이 어떤가.
=지난해보다는 조금 나아진 것 같고, 감사하게도 거리두기가 4단계라도 크게 휘청거리진 않는다. 힘들어도 멀티플렉스처럼 영화 티켓값을 올리진 못하겠더라. 코로나19가 아니었다면 <최선의 삶>은 관객수 3만명 이상을, <메이드 인 루프탑> 또한 고정 퀴어 팬들이 많아 4만, 5만명을 동원할 수 있었을 텐데. 직원들이 믿고 따라주어서 미안하고 힘들고 고민도 많다. 장사가 안될 때 극장 리모델링을 포함해 할 수 있는 건 다 하려고 한다.
-서울시 합정동에 짓고 있는 아트나인 강북점 공사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코로나19 때문에 적자가 누적돼 은행에 매각할 수 밖에 없었다. 아트나인이 강남과 강북에 각각 하나씩 있으면 지금보다 더 전략적인 배급을 할 수 있고, 좀더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일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해 진행한 공사인데 코로나19에 직격탄을 맞았다.
-40, 50대 영화인들 사이에서 골프가 유행인데 골프는 안 치나.
=(골프채 하나를 들고 와 보여주며) 골프채 세트만 4개인데 지난 2년 동안 한번도 라운딩하러 골프장에 간 적 없다. 제일 싫은 게 골프다.
-왜 그런가. 마음을 다스리기에 골프만 한 운동이 없다던데.
=라운딩을 한번 하면 6시간이 소요된다. 골프장 오가는 시간에 밥 먹는 시간까지 합치면 10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주말에는 극장에 관객이 얼마나 왔는지 보러 나가야 되고, 직책도 여러 개라 골프 칠 시간이 어디 있나.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지.
-그렇게 일을 벌인 이유가 뭔가.
=아무것도 맡지 않으려 했다. 영화수입배급사협회 회장도 내가 없는 자리에서 결정됐고, DMZ영화제 집행위원장도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출장 가는 길에 임명됐다.
-이재명 대선 후보 캠프에서도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대선 캠프에 합류한 이유가 뭔가.
=합류? 합류라는 말보다는 성남시장 시절부터 경기도지사까지 이재명 후보를 겪어보니 인상적이었다. 이 사람은 자신이 내뱉은 말에 대해 약속을 반드시 지키고, 무엇보다 좋았던 건 독립예술영화나 다큐멘터리를 지원하는 데 관심이 무척 많다는 거다. 문화·예술·체육·관광 분야의 전문가는 아니지만 저변을 확대하고 씨앗을 뿌리는 일에 대한 아이디어가 많고, 예리한 사람이다. 영화계에서 경험한 것들을 옆에서 보태면 영화산업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함께하게 됐다. 이재명 후보의 출마 선언을 연출한 것도 그래서다. 그건 여의도 정치사에서 한번도 본 적 없는 형식으로 남을 것이다.
-정치적 야심이 있는 줄 알았다.
=전혀 없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건물주인데(웃음) 지금 하고 있는 일도 벅차서 장관 임기 1, 2년 그 힘든 걸 뭐 하러 하고 싶겠나. 뒷짐 지고 있어도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에 충실하려고 한다.
-당분간 버티는 수밖에 없겠다.
=그동안 영화 일을 하면서 받은 혜택들이 있으니 그건 영화를 만드는 데 써야지. 아직은 공개할 수 없는 빅 프로젝트 하나를 제작하고 있다. 뭔지 궁금하나. (웃음) 기다려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