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007 노 타임 투 다이'의 이별공식
2021-10-20
글 : 김성찬 (영화평론가)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하는 것

역병이 창궐한 시대 아무런 연고도 없는 지역에서 집과 근무지 사이만 맴도는 생활을 하다 보니 변화라는 건 당최 감지할 수가 없다. 영화만이 변화를 인지하게 하는 유일한 통로이다. <007 노 타임 투 다이>도 그 통로의 갈래 중 하나였다.

변하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변하는 것들을 문득 떠올리게 된다. 변하지 않는 것은 덕수궁 돌담길 같은 것이다. 돌담길 곁을 수없이 지나는 동안 어린아이는 키가 좀더 자랐고, 곁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은 여러 차례 바뀌고, 청년은 노인이 되고, 누군가는 죽었고, 누군가는 다시 돌아왔다. 변하는 것들은 박형서 작가의 산문집 제목 <뺨에 묻은 보석>의 보석처럼 여느 때는 알지 못하다가 덕수궁 돌담처럼 변하지 않고 계속 버티고 서 있는 존재를 의식할 때 뺨을 한번 훑어보면 언제 어디서 흘렸는지 없어져 있다. 공연히 애꿎은 빈 볼만 매만질 때 느끼는 감정은 기쁨이나 환희는 아닐 것이다. 그보다 회한, 그리움, 씁쓸함에 더 가깝다.

변하는 것들

007 시리즈에도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하는 것이 있다. 변하지 않는 건 단연 제임스 본드의 존재다. 또 곁에는 본드걸이 있다. 신체가 변형된 악당과 과대망상에 빠진 빌런이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활력이 넘치는 액션이 있고, 무수한 살인과 비릿한 음모도 상존한다. 물론 변하는 것들도 있다. 본드걸은 성적 대상화에서 차츰 벗어나 다소나마 진취적인 인물로 변했고, 본드를 추동하는 배경은 전쟁과 냉전의 위협에서 개인이나 조직이 벌이는 테러리즘의 공포로 변모했다. 무엇보다 제임스 본드 곁에 있던 사람들이 바뀌었다. 6대 제임스 본드의 시대로 한정하자면 기존의 M은 죽었고 새로운 M이 등장했다. 사랑의 대상은 베스퍼에서 매들린으로 옮겨갔다. 업무적 파트너인 미국 CIA의 펠릭스는 신참 요원 팔로마로 대체될 것으로 암시되고, 본드조차 새로운 007의 등장과 함께 세대교체의 대상이 된다.

핵심부터 말하자면 이번 <007 노 타임 투 다이>(이하 <노 타임 투 다이>)는 변하지 않는 것보다 변하는 것에 주목하는 영화다. 6년이라는 오랜 시간 끝에 돌아온 이번 영화에서 변하지 않은 면을 보고 있자니 그간 변한 것들을 다시금 떠올리게 된다. 변하는 건 일종의 이별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을 텐데, 대표적인 건 베스퍼와의 이별일 것이다. 배신 아닌 배신을 하고 수장되는 철창의 자물쇠를 스스로 채우는 것으로 목숨을 잃어가는 베스퍼의 모습은, 이번 영화에서 펠릭스가 내부의 적에게 일격을 맞고 쓰러진 후 물속에 잠기며 본드에게 이별을 말하던 장면과 겹친다. 펠릭스의 죽음은 베스퍼의 죽음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며 변해버린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이건 마치 영화가 관객에게 변하지 않고 굳건히 존재하는 007 시리즈의 뼈대가 아니라 지나쳐갔던 인물과 사연을 재차 떠올려주기를 권유하는 것만 같다.

그런 점에서 관객은 <노 타임 투 다이>에서 블록버스터영화가 주는 스펙터클의 쾌감이 아니라 아쉬움과 그리움의 정서를 더 진하게 느낄 수도 있다. 일반의 블록버스터 액션영화가 롤러코스터 같은 스펙터클을 연속적으로 전시하는 데서 오는 피로나 집중력 저하를 감추기 위해 최소한의 개연성이라도 보전할 요량으로 서사를 군데군데 욱여넣는다면, 이번 영화는 변해버린 것들을 주목하도록 하고, 이제 변하는 것에 속할 제임스 본드 자신의 이야기까지 관객에게 들려주는 데서 발생할 혹시 모를 심드렁함을 무마하기 위해 서사 앞뒤로 액션 시퀀스를 배치한 것으로 볼 여지도 있다. 그런 탓에 러닝타임은 무리하게 길어졌더라도 관객 중 누군가는 007 시리즈 중에서도 6대 제임스 본드가 활약한 시절에서 지나가고 변했던 것들을 반추하며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별 공식-변화들을 불러내다

사실 대니얼 크레이그가 제임스 본드로 분한 일련의 작품들이 변하는 것을 강조한 것은 <007 스펙터>부터인 것 같다. 이 영화는 그간 장장했던 빌런들을 줄줄이 소환하며 마침표를 찍게 만드는 악의 정점 블로펠드와의 대결을 다룬다. 블로펠드는 빌런들이 레퍼토리처럼 말해온, 본드의 행보가 무의미하다는 점을 재차 역설하며 그의 곁을 떠나갔던 사람들을 불러온다. 이건 빌런과 아군을 가리지 않는다. 영화의 결말 즈음 블로펠드가 매들린을 납치해 가둔 이전 영국 정보국 청사 건물의 긴 복도 양옆에 병렬한 각방의 벽에는 르쉬프, 그린, 실바 등 역대 빌런뿐 아니라 베스퍼, M, 매들린의 아버지 미스터 화이트의 초상이 걸려 있다. 본드가 이 복도를 지나며 블로펠드를 제압하고 매들린과 새 삶을 향해 떠나는 결말은 어쩌면 6대 제임스 본드 시절의 마지막을 선언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결말이 아직 충분하지 않았는지, 바꿔 말해 변하는 것들에 대한 헌사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본드는 다시 돌아온다. 그러고는 다시금 변했거나 변하는 것들을 불러온다. 여기서 <노 타임 투 다이>가 변화, 즉 이별을 다루는 방식의 윤곽이 좀더 분명해진다.

<노 타임 투 다이>가 변하는 것을 대하는 태도는 말 그대로 재현이다. 변한 것 중의 하나, 이별한 베스퍼와의 인연에는 불신의 모티브가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관계는 영화 초반 베스퍼의 무덤을 찾은 본드가 폭탄 공격을 받은 일의 배후에 매들린이 있다는 의심을 심어주는 것으로 다시 한번 반복돼 재현된다. 두 번째로 인상적인 자기 재현은 앞서 말한 펠릭스의 죽음이다. 펠릭스는 본드의 연인도 아니고, 배신의 서사가 개입돼 있지도 않지만 우정이라는 인간적 감정을 바탕으로 수장되는 대상을 바라보는 데서 베스퍼의 죽음을 떠올리지 않기란 쉽지 않다. 자기 재현의 정점은 본드의 숙명 자체다. 새로운 악당 사핀의 계략으로 매들린과 그의 딸을 만나게 되면 둘의 목숨을 앗아가는 운명을 지니게 돼 다시는 사랑하는 사람들 곁으로 갈 수 없게 된 본드는, 그간 숱한 빌런들이 본드의 존재가 주변인에게 고통을 준다고 말했던 것을 기정사실화해버린다. 본드는 신화 속에서 익히 보았던 고통을 체화한 자, 반복적인 고통 속에서 생을 마감해야 하거나 끝없이 고통 속에 있어야 하는 자, 그럼으로써 절대 고독에 빠져 있는 자이다. 영화는 본드의 숙명을 마지막으로 자기 재현함으로써 15여년간 이어온 시리즈의 막을 내린다.

그런 점에서 <노 타임 투 다이>는 의도치 않게 영화의 속성을 가리킨다. 영화야말로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하는 것들의 총체이지 않을까. 또 영화는 자기 재현을 발판삼아 생명을 연장하는 매체이기도 하다. 우리가 영화를 떠올릴 때 늘 그대로인 것 아래로 무수히 많은 변화들이 지나쳐갔다. 최초의 무성영화, 유성영화와 컬러의 도입, 필름과 디지털, CG, 피고 지는 배우들, 찬란했던 서부극과 물결의 이름을 지닌 여러 영화 사조들. 영화는 여전하지만 빛나는 보석과 같았던 지난 영화들은 지금 우리들 뺨에는 없다. 습관처럼 빈 볼을 매만지듯 그때 그 영화들을 여러 번 변주해 재현하는 것으로 허전함을 달랠 뿐이다. <노 타임 투 다이>는 제임스 본드 자신의 변화를 끝으로 퇴장하는 영화이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영화 속 변화들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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