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푸른 호수> 신보경 미술감독
2021-10-21
글 : 남선우
사진 : 최성열
처연함에도 색이 있다

<미쓰 퍼플> <푸른 호수>, 차기작 <자모자야>까지. 한국계 미국인 저스틴 전 감독의 영화에는 한국인 프로덕션 디자이너의 손길이 함께했다. 그 주인공은 <접속> <태극기 휘날리며> <동창생> 등 199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충무로에서 활약해온 신보경 미술감독. 미국 채프먼대학교에서 객원 연구원으로 지낼 당시 LA에 있는 프로듀서로부터 저스틴 전 감독을 소개받았다는 그는, 새로운 10년의 시작을 할리우드에서 맞이하고 있다. 한국계 미국인 영화인들로부터 남다른 자극을 받았다는 그에게 <푸른 호수>를 채운 색과 무늬에 대해 물었다. 낯선 땅에서의 기억을 반추한 신보경 미술감독은 말은 잘 통하지 않았지만 마음만큼은 이어져 있었던 스탭들에게 연신 고마움을 표했다. 그가 다시 영화를 사랑하게 만든 시간과 사람들에 대한 대화를 옮긴다.

- <푸른 호수>라는 제목에서부터 프로덕션 디자인의 힌트를 얻었을 것 같다.

= 저스틴 전 감독과 <미쓰 퍼플>을 했을 때부터 느꼈는데, 그의 시나리오는 굉장히 시적이고 압축적이다. <푸른 호수>도 핵심은 명확하지만 시나리오가 슬프고 아름다웠다. 처연하다고나 할까. 미술감독마다 스타일이 다른데 나는 컬러 컨셉을 먼저 세우는 것을 좋아해 색으로서 이 느낌을 표현하고자 했다.

- 안토니오(저스틴 전)에게는 노란색, 캐시(알리시아 비칸데르)에게는 푸른색과 흰색을 부여했다. 인물 고유의 색이 의상, 공간 등 영화 곳곳에 변주된다.

= 안토니오라는 인물이 품은 문제의식은 태어남과 자라남에 있다. 어린 시절을 연상시키는 색이자 아시아계 사람들의 피부색인 노란색을 그의 색깔로 사용했다. 파랑은 희망을 상징하지만 한편으론 차가움을 보여주기도 한다. 냉정한 현실 속에서 사랑해야 하는 인물이면서 간호사라는 직업을 가진 캐시는 푸른색으로 표현했다. 영화에 물의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쓰여서 그것도 염두에 두면서 굵직한 컬러 컨셉을 잡았다.

- 안토니오 가족이 사는 집의 꽃무늬 벽지, 딸 제시(시드니 코왈스키) 방의 이불과 커튼의 퀼트 패턴도 눈에 띄었다. 엄마와 아빠의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이 포근하게 융화된 듯했다.

= 공간이 인물을 엄습할 때 색만큼이나 힘을 가진 게 패턴이다. 미국은 주로 단색 페인트로 벽을 칠하는데, 한국에서는 벽지를 붙이지 않나. 내게도 어릴 적 봐온 촌스러운 벽지에 대한 기억이 있다. 주인공 집에 그런 벽지, 커튼, 이불을 사용함으로써 코리안 아메리칸의 정서, 다국적이자 무국적인 느낌이 살아나길 바랐다.

- 집을 채우는 색과 무늬만큼이나 집 자체의 구조도 재밌다. 구글 맵과 에어비앤비로 배경인 뉴올리언스의 면면을 살폈고, 샷건 하우스라는 주거 형태를 발견했다고.

= 작품을 준비할 때 주인공의 직업부터 동네까지 파고들며 인터넷 뒤지는 걸 좋아한다. 인터넷에서 일반인이 찍은 사진들을 보는데 뉴올리언스의 색감이 마치 츄파춥스처럼 팡팡 튀어오른다고 느낄 정도로 묘하고 매력적이었다. 서민적이면서 자유롭고, 예술적이면서 사랑스러웠다. 그곳의 라이프스타일을 좇다보니 집들이 길쭉하다는 걸 알게 됐고, 그러한 집들의 별명이 샷건 하우스라는 것도 알게 됐다. 그 깊이감이 좋아 가족의 집으로 택했고, 재즈 기타리스트 남편과 인형극하는 아내의 집을 빌려 촬영했다. 정갈하면서도 예술적인 집이라 마음에 들었다.

- 안토니오가 일하는 타투숍도 존재감이 상당하다. 스탭들이 가져온 스케치, 조각, 사진, 골동품들로 세트를 채웠다고 들었는데 재밌는 에피소드가 있을 것 같다.

= 어느 나라건 영화인들은 영화를 위해 자신의 모든 걸 내어줄 준비가 돼 있는 것 같다. 내 디자인에 공감해준 이들이 자기가 베던 베개, 찍은 사진, 아내가 그린 그림, 작은 조형물을 가져와서 세트에 걸고 싶어 했다. 우리가 함께 이 영화를 사랑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행복했다. 미술팀 아닌 스탭들도 우리에게 진심이 느껴진다고 격려해줬다. 다시 생각해도 기쁘다. (웃음)

- 안토니오와 친구가 되는 베트남 이민자 파커 가족의 집도 중요한 공간이다. 특히 파티 장면이 아름답게 그려지는데, 베트남 여행의 기억을 떠올리며 디자인했다고 들었다.

= 촬영감독인 남편과 다낭국제영화제 워크숍에 참가한 적이 있다. 베트남 학생들과 단편을 찍기 위해 관광지 뒤편의 삶으로 들어가볼 수 있었다. 그때 에메랄드그린에 가까운 옥색과 핑크색이 자주 조합되는 걸 봤다. 한국에서는 어색할 것 같은데 동남아시아에서는 그런 식으로 트로피컬 컬러가 참 많이 쓰이더라. 그 기억과 더불어 호이안 거리에서 인상적이었던 실크등을 재현해 파티 장면을 채웠다.

- 가장 애착이 가는 디자인이 있다면.

= 안토니오의 바이크와 헬멧에 애착이 크다. 처음에는 클래식한 오토바이를 구해보려 했는데, 감독님이 <비트>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남편이 촬영한 영화이기도 해서 많이 웃었다. 레이싱 오토바이가 영화에 어울릴지 고민이 됐지만 안토니오가 유년의 기억에서 탈출하고 싶을 때 타는 중요한 이동수단이라 영화의 정서를 잘 담아보기로 했다. 그래서 오토바이에 노란색을 칠하고, 오래된 느낌을 더한 뒤 저스틴 전 감독의 부인과 함께 타투 패턴도 입혔다. 백업 오토바이까지 총 3대를 그렇게 만들었다. 안토니오의 마음을 오토바이로 잘 표현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 <푸른 호수>팀에는 저스틴 전 감독을 비롯해 알렉스 지 프로듀서, 유니스 예라 리 의상감독 등 한국계 미국인 스탭들이 많다. 할리우드에서 아시아계 영화인들의 활동이 활발해지던 시기에 그들과 협업한 경험은 어땠나.

= 2018년 <미쓰 퍼플> 작업을 위해 이들을 처음 만났다. 내년이면 영화를 한 지 30년이 되는데, 당시 일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예전만큼 열정이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생각을 좀 정리해야겠다고 결심한 타이밍에 그들을 만난 거다. 그들에게서 90년대 초반의 내가 가졌던 것과 비슷한 에너지를 받았다. 아직 영화를 사랑한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들과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차올랐다. 할리우드에서 코리안 아메리칸은 마이너 중에서도 마이너인데, 그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함께 볼 수 있어 좋았다. 덕분에 영화에 대한 약간의 권태를 극복한 지금, 다시 힘을 내자는 생각이 든다. OTT 시장이 커지고 있지만 극장 영화를 계속하고 싶다는 오기도 있다. 괜히 한번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든다. 많이 배우며 계속해나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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