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은의 마음이 하는 일]
[오지은의 마음이 하는 일] 아이의 손을 잡고 지뢰밭을 바라보다
2021-10-28
글 : 오지은 (뮤지션)
일러스트레이션 EEWHA

※ 이 글에는 영화 <로건>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나이 든 슈퍼히어로는 어디로 갈까. 어떤 삶을 살까. 교외의 소박한 집에 머물며 주변의 존경을 받으며 조용한 삶을 살다 죽을까. 아니면 인지도와 인기, 지금까지의 공적을 토대로 정계에 진출하여 정치인이 될까. 아니면 슈퍼히어로 연금이 들어오는 매월 25일을 기다리며 시간을 죽일까.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고생할까. 그 모든 것의 믹스일까.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 영화는 슈퍼히어로가 슝슝 날아다니는 영화보다 흥행은 안될 것 같다. 시원하고 통쾌하고 빵빵 터져서 집에 오는 길에 개운한 마음으로 “아 재미있었다!” 할 순 없을 테니까.

<엑스맨> 시리즈는 한편밖에 보지 못했다. 시리즈물이 그렇다. ‘언젠가 각 잡고 시작해야지’ 하는 마음은 분명 있는데 그 마음보다 새 시리즈가 나오는 속도가 빨라서 정신을 차려보면 5편을 내리 봐야 한다. 평행 세계가… 어쨌다고? 그렇게 우물쭈물하던 차에 시리즈를 17년간 이끌었던 휴 잭맨, 그러니까 울버린이 <로건>이라는 영화로 은퇴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능력을 잃어가는 울버린, 즉 로건이 한 소녀를 만나서 남은 생을 거는 내용이라니 안 볼 수가 없다. 그렇게 나는 울버린의 시작, 울버린의 중간도 잘 모른 채 갑자기 울버린의 마지막을 보게 되었다.

영화는 술에 전 로건이 동네 양아치들에게 맞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리무진 운전사. 그의 꿈은 돈을 모아 요트를 사서 바다 한가운데로 가는 것. 낚시나 다이빙이 취미라서가 아니고 인간이 없는 곳으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이유는 뒤에 나온다). 한때 세상을 함께 구하던 돌연변이 동료들은 없다. 새로운 돌연변이도 태어나지 않는다. 먹여살려야 할 사람은 둘. 한명은 조력자 칼리반, 그리고 한명은 그 프로페서X다. 모르는 분들을 위해 프로페서X에 대해 잠시 얘기하자면 그는 엑스맨의 설립자이자 지도자였고, 정신 조종이 가능해서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두뇌를 가진 사람’이라 불렸다. 지금은 그 두뇌를 가진 채로 발작을 일으켜서 주변을 위험하게 만드는 치매 노인이다. 그래서 바다 한가운데로 가서 민폐 끼치지 않고 살아야 한다. 로건은 뒷돈을 주고 구한 약을 가지고 사막 한가운데로 달려간다. 녹슨 물탱크 속에서 사는 프로페서X에게 약을 먹이기 위해. 심지어 영감은 고집이 세서 순순히 먹지도 않는다….

여튼 그래서 돈이 필요하다. 많이 필요하다. 불법으로 사는 약이니 보험도 되지 않아 무지막지하게 비쌀 것이다. 투닥거리거나 하소연을 하거나 힘을 모을 동료도 없다. 사랑하던 존재는 다 죽었다. 세상을 구했다는 사실에 취할 수도 없다. 그건 많은 생명을 죽였다는 사실과도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계속 술을 마신다. 몸 상태는 엉망이다. 히어로의 몸이 아니다. 멍하게 하루를 반복한다. 리무진 뒷자리에 탄 10대들이 조롱한다. 울컥하지도 않는 로건을 보니 내 목구멍이 까끌해진다. 이 까끌함은 쉽게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목이 타는데, 물은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달콤하고 차가운 물을 마실 수 있겠지? 하는 희망이 없이 사막을 계속 걸어야 하는 어른의 삶.

멋있게 산다는 것은 뭘까. 미끈하게 사는 것일까. 고결하게 사는 것일까. 남들이 인정하는 업적을 이루는 것일까. 나만의 단단한 행복을 많이 모아두는 것일까. 그렇다면 버티는 삶은 어떨까. 그저 그런 하루하루를 이어가는 삶은 어떨까. 자기가 했던 일을 직시하는 삶은 어떨까. 젊은이들은 아무래도 칙칙하고 멋지지 않다고 생각하려나. 커다란 빛이 있었다면 그 옆에는 커다란 어둠도 있었을 것이다. 그 자리를 메워버리는 쪽과 들여다보는 쪽, 어느 쪽이 더 멋진 행동일까. <로건> 속 사람들은 고전영화 <셰인>을 본다. 대사는 이렇다. “사람을 죽이면 고통 속에서 살게 돼. 되돌릴 방법은 없어. 그게 옳든 그르든 낙인이 되어 지워지지 않지.”

그런 꺼끌한 인생에 돌연변이 여자아이 로라가 등장한다. 로건은 보자마자 딱 싫다. 지금 막 만난 돌연변이 애가, 자신을 저 멀리 북쪽의 꿈의 땅 에덴에 데려가달라고 하는데 좋을 리가. 겨우 숨 붙이고 살고 있는데 배터리 3%인 날 보고 대체 뭘 하라는 거지. 하지만 프로페서X는 손주(?)를 보는 마음에 그저 싱글벙글이고…. 그렇게 로건과 로라, 프로페서X의 로드무비가 시작되는데, 힘을 잃어가는 영웅과 슈퍼 할아버지와 미래의 영웅의 알콩달콩 새콤달콤 로드무비일까? 잠시 그런 생각을 했던 나는 바보였다.

<로건>은 목이 뎅겅뎅겅 썰리는 19금 액션영화지만 내 생각에 가장 잔인했던 부분은 ‘좌표’에 대한 이야기였다. 로라가 꼬깃꼬깃 쥐고 있는 종이에 적힌 좌표, 그곳은 돌연변이 아이들이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꿈의 땅, 에덴의 주소다. 그리고 길을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 로건은 알게 된다. 그 좌표는 <엑스맨> 만화에 나오는 설정, 그러니까 만화가가 그냥 적어둔 숫자였다. 하지만 아이는 굳게 믿고 있다. 진짜 꿈의 땅의 주소라고. 그것 하나만 믿고 버티는 것이다. 하지만 어른은 알고 있다. 그런 곳은 없다고.

세상을 얼마 안 살아봤고 별 지혜도 없는 나지만 어렴풋이 아는 것 중 하나는, 세상에는 지뢰가 가득하다는 것이다. 그건 누군가의 잘못도 아니고 그냥 세팅이 그렇게 되어 있다. 아마 내가 만든 지뢰도 있을 것이다. 그럼 앞으로 나아가는 아이에게 어떻게 할 것인가. 지뢰야! 오지 마! 하고 소리를 지를 것인가. 네 지뢰 네가 밟든가, 하고 내버려둘 것인가. 내 발밑의 지뢰에 당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것인가. 우리 로건은 어떻게 하냐면 아이의 면전에서 그건 만화야! 꿈의 땅은 없어! 하고 소리 지른다. 그리고 데려다준다(그래서 영웅인가봐). 그리고 도착한 그 지점에는 놀랍게도 돌연변이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시작은 허구였어도 사람들이 믿고 뜻이 모이면 진짜가 된다.

이 영화의 액션은 처절하다. 호쾌한 타격감, 이런 단어가 낄 틈이 없다. 내가 죽지 않기 위해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 상황의 괴로움이 전해진다. 나와 같은 운명을 갖고 태어난 아이를 만났을 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줄 순 없다.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도 없다. 내 코가 석자니까. 하지만 운전사가 될 순 있겠구나. 나는 면허가 없지만. 여튼 마음이 그렇다는 것. 2017년 개봉영화 <로건>에 4년 늦은 박수를 보내며, 희망이 없는 사막을 걷고 있는 모든 어른에게 이 영화를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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