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진 강릉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의 말을 빌리자면, 강릉국제영화제의 프로그램은 “관객의 지적 열정”을 충족시켜주는 다양한 상영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화와 문학’ 섹션은 단지 문학 원작의 작품을 골라 틀지 않는다. 문학과 영화의 본질적인 차이를 탐구하고 두 영역을 넘나들었던 예술가들의 작품을 통해 그들의 실험적 면모를 분석한다. ‘마스터즈 & 뉴커머즈’ 섹션 역시 예상 가능한 이름의 회고전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전통적인 영화제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는 시대에 가장 시네필다운 영화제를 고민하는 강릉의 프로그램은 20년 동안 프랑스에 살면서 프랑스 국립 예술사원과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프로그래머로 일했던 조명진 프로그래머가 책임지고 있다. 올해 강릉국제영화제가 선택한 116편의 상영작이 어떻게 선정되었는지 들었다.
- 원래 ‘강릉국제문학영화제’로 시작하려던 영화제인 만큼 ‘영화와 문학’ 섹션이 계속 강화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 실제 영화제를 준비하면서 그 명칭을 포기했다. 영화를 문학의 하부 장르로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도 있고 문학과 관련된 영화만 소개하게 되는 한계가 지어질 위험도 있기 때문이다. 문학과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 실제 영화 퀄리티와는 상관없이 상영작을 선정할 리스크도 있다. 대신 ‘문학’이란 키워드는 한 섹션에서 강화하자며 만든 부문이 바로 ‘영화와 문학’이다. 강릉은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을 쓴 김시습, 최초의 한글소설을 쓴 허균 그리고 허난설헌의 고향이며 문향(文鄕)의 전통이 있었다. 강릉의 특성을 살리면서 영화 발생 태초부터 존재했던 각색 작업의 전통을 접목시킬 수 있는 섹션인 것이다.
- 올해는 프랑스 작가 조르주 페렉 특별전을 진행한다.
= 그가 가장 중요한 20세기 작가 중 하나라는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페렉은 자신의 작품을 영화로 만들기도 했고, 영화를 만든 후 그에 대한 글을 쓰는 등 영화와 글의 차이를 두고 굉장히 많은 실험을 했던 작가다. 조르주 페렉의 작품 중 절대 번역될 수 없는 책들이 있다. <실종>과 <돌아온 자들>이다. <실종>은 알파벳 ‘e’를 쓰지 않고 쓴 장편 소설이다. 조르주 페렉의 부모님이 아우슈비츠에서 죽었다. 우리의 가장 중요한 이웃이 없어도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을 형식적으로 담아낸 것이다. <돌아온 자들>은 알파벳 ‘e’만 갖고 썼다. ‘e’의 의미가 무엇인지 글로 느낄 수 있는 실험을 했다. 페렉의 영화도 그의 책처럼 많은 실험을 했다. 이번에 페렉의 소설을 번역한 김호영 교수, 문화사회학을 연구한 신지은 교수, 그리고 김태용 작가가 조르주 페렉에 대해 이야기하는 라운드테이블을 마련했다. 김태용 작가는 페렉의 첫 영화 <잠자는 남자>를 개조한 타자기 연주와 함께 실험적인 퍼포먼스로 상영하는 ‘씨네라이브’도 함께 한다. 만약 페렉이 영화를 상영한다면 이런 실험적인 방식을 원하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기획했다.
- ‘여성은 쓰고 영화는 기억한다’ 섹션엔 전부 스페셜 토크 게스트가 있다.
= 허난설헌, 신사임당 등 강릉의 뛰어난 여성 아티스트들은 실제 그들이 가진 재능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많이 가려졌다. 그로부터 시작된 게 첫해부터 있던 ‘여성은 쓰고, 영화는 기억한다’ 섹션이다. 여성 서사 영화를 상영하고 비슷한 주제를 다루는 여성 작가들을 모셔서 작품에 대해 말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단순히 어떤 문인이 영화를 보고 그에 대한 감상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영화와 문학이 어떻게 다른 언어로 같은 목소리를 내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올해는 게스트들을 초청하다 보니 김초엽, 오승현, 이서영 등 SF 작가들이 많았는데, 상영작도 그런 특징적인 작품들이다.
- 올해는 ‘원작의 발견’이라는 서브 섹션이 하나 추가됐다.
= 영화감독들이 어떻게 원래 원작을 자신의 영화적 언어로 해석했는지 보여주는 작품들을 골랐다. 허우 샤오시엔의 <해상화>는 청 말기 소설 <해상화열전>을 원작과는 다른 결로, 플랑 세캉스(한 신이나 시퀀스가 하나의 쇼트로 이루어지는 것) 방식으로 영화를 찍으면서 소설에는 담기지 않았던 청의 몰락을 영상으로 보여준다. 주앙 세자르 몬테이로 감독의 <백설공주>는 사실 영화관에서 보여주기 굉장히 부담스러운 작품이다. 우리가 아는 동화 이야기가 아닌, 동화가 끝난 후 계모와 백설공주의 이야기를 담았다. 처음에 나오는 스위스의 작가 로베르트 발저 사진 외에는 거의 대부분이 암흑이다. 포르투칼 원어의 사운드를 삭제하고 한국어로 더빙한 버전을 상영하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배급사에 허락을 받지 못했다. 이 작품을 영화관에서 오롯이 경험한다는 건 둘도 없을 일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중간에 잠이 들 수도 있지만. (웃음) 디즈니 등의 여러 매체를 통해 보여진 ‘백설공주’ 이미지의 이면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재용 감독의 <스캔들: 조선남녀상열지사>는 피에르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를 각색했다. 이미 여러 번 영상화된 적이 있는 텍스트지만 이재용 감독의 작품은 이를 한국적인 상황으로 옮기면서 원작의 이야기를 넘어섰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여성에게 더욱 가혹했던 조선시대 상이라든지 남성 우위 사회에서 여성이 겪어야 했던 고초를 담아내면서 동시대로까지 오버랩되는 부분이 있다. 이만큼 토착 문화에 가장 걸맞은 색깔로 원작을 각색을 한 적이 있을까. 세 작품 모두 상영이 끝난 후 강연이 이어지는 회차가 있다. 영화 <해상화>와 소설 <해상화열전>의 서사구조를 비교한다든지 피에르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가 변주되어 온 역사라든지 백설공주의 현대적 변용에 나타나는 여성상 변화 등 관객의 지적 열정을 채우는 시간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 칸국제영화제의 아시드 칸(독립영화의 배급과 존속을 위한 감독들의 조합) 섹션과 공식 컬래버레이션을 맺고 있는데.
= 칸국제영화제에 다양한 주간이 있지만 가장 덜 알려져 있는 것이 아시드 칸 섹션이다. 아마 한국 감독들이 이 섹션에 소개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러시아의 알렉산더 소쿠로프 감독, 이번에 베를린에서 황금곰상을 받은 라드 주드 같은 감독이 모두 아시드 칸을 통해 발굴됐다. 일단 아시드 칸이 추구하는 기조가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배급사가 없는 독립영화 중 9편을 선정해 작품을 소개한다는 건 어쩌면 영화제가 가장 추구해야 하는 일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아시드 칸 측에 컬래버레이션을 제안했고 그쪽에서 흔쾌히 수락을 해서 지금까지 관계가 이어지고 있다.
- 올해 ‘마스터즈&뉴커머스’ 섹션에서 존 세일즈와 폴 베키알리를 거장으로 주목한 이유는 무엇인가.
= 내게 폴 베키알리는 한국의 김기영 감독 같은 존재다. 약간 저주받은 감독이라고 할까. 누벨바그 후반기부터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투자 받을 곳을 찾지 못해 직접 모든 것을 만드는, 일명 핸드메이드 영화를 찍었다. 한 사람의 생애를 1년씩 플랑 세캉스로 찍어서 담는 식의 다양한 실험을 했고, 동성애나 에이즈도 거침없이 다뤘다. 프랑스에서는 2015년 즈음부터 곳곳에서 폴 베키알리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의 작품이 있었기에 우리가 지금 이런 영화를 만들고 있고 지금도 놀라운 영화를 만들고 있는 감독이라며. 묻혀 있던 제야의 고수가 드러나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한국에 와보니 폴 베키알리 감독의 영화가 전혀 소개되지 않았더라. 이번 영화제에서 폴 베키알리의 수작만을 골라서 소개하고 싶진 않았다. 굉장히 잘 만든 명작과 수작 그리고 그보다는 차이가 나는 작품을 섞어서 상영하면서 그의 영화를 전체적으로 맛볼 수 있는 느낌을 받기를 바랐다. 폴 베키알리가 ‘매운맛’이라면 존 세일즈 감독은 좀더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부분이 있는 ‘순한 맛’이다. 영화감독이 되기 전에 소설가였기 때문에 좀더 대중적인 화법을 가진 혁명가였다.- 개막작을 <스토리베리 맨션>으로 정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 공동연출을 한 앨버트 버니 감독의 첫 영화 <비스트 패전트>를 봤다. 굉장히 기괴한 작품이었다. <스토리베리 맨션>은 켄터커 오들리 감독과 협업한 두 번째 작품인데, <비스트 패전트>에서부터 지속되어 온 모티브가 이 작품에도 등장한다. 기계화된 사회, 전산화된 사회 속에서 인간이 잃어가는 것들에 대한 탐구를 아주 독특한 캐릭터라든지 일상의 무언가를 하나 잡아서 보여준다. 그리고 CG가 아닌 수작업을 많이 하는 감독이다. <비스트 패전트>는 스톱 애니메이션 같은 느낌이 드는 흑백 영화였고, <스토리베리 맨션>은 색감이 굉장히 알록달록한 컬러 영화다. 앨버트 버니의 흑백 영화가 컬러가 되면서 이분의 상상력이 어느 지점에 이르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미래를 다루지만 사실 우리가 겪고 있는 현재의 이야기이기도 해서 굉장히 와 닿았던 작품이다. 이 영화를 보고 미셸 공드리나 테리 길리엄을 언급하는 사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