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강릉국제영화제에서는 개봉 20주년을 맞은 <봄날은 간다>의 허진호 감독과 유지태 배우, 조성우 음악감독을 초청해 다시 한번 관객과 만나는 행사를 마련했다. <봄날은 간다>는 강원도 강릉, 삼척 일대에서 주로 촬영을 하기도 했던 영화로, 강릉과는 작품 내외적으로 밀접한 연관이 있다. 영화 상영은 물론 영화음악 콘서트와 스페셜 토크 행사를 통해 관객과 다시 한번 만나게 될 허진호 감독을 개막식 직전에 만나 남다른 소감을 물었다. “햇수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관객들이 아직도 이 영화를 생각해주고 있다는 건 좋은 일”이라며 소감을 전한 그는 얼마 전 첫 드라마 진출작인 <인간실격>의 후반작업을 마쳤다. 영화제가 한창 열리는 첫 주말에 최종회 방영을 앞두고 있는 그는 강릉과 <봄날은 간다>의 관계에 대해서, 또 첫 드라마 연출을 하면서 느꼈던 제작과정에서의 소회도 함께 들려줬다.
- <봄날은 간다>의 은수(이영애)가 근무하던 강릉 KBS 방송국, 데이트하던 오죽헌과 같은 강릉의 공간이 영화에 등장했고 설정은 강릉이었지만 촬영은 삼척에서 진행했던 은수의 아파트, 신흥사, 대나무 숲 등 <봄날은 간다>는 강원도라는 공간과 뗄 수 없는 영화다. <외출>의 인수(배용준)와 서영(손예진)의 공간도 삼척이었다. 영화를 찍을 당시 강원도라는 공간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려 했나.
= 너무 오래 돼서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동해 바다가 지닌 정서를 담고 싶었던 것 같다. 어릴 때부터 <바보들의 행진>이나 <고래사냥>의 영향을 받은 덕분에 동해에 대해 막연한 어떤 인상을 품고 있었다. 로케이션 장소를 찾을 때 상우(유지태)의 직업 특성상 소리를 담을 공간들이 많아야 했는데 강원도의 강릉, 삼척의 공간이 적합하다는 판단도 있었던 것 같다. 되도록이면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었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었다. <외출>은 당시 그 곳 병원에서 촬영에 적극 협조를 해줘서 장소를 결정했던 기억이 난다.
- 만드는 영화마다 극중 인물의 공간, 내지는 촬영지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고 화제가 되곤 했는데 촬영지를 다시 찾아가본 적 있나.
= <8월의 크리스마스>를 찍었던 군산에 다시 가본 적 있다. 그 사진관은 원래 세트였다. 주차장 자리에 사진관을 짓는 대신 다시 허물어 원상 복구 해놓는 조건이었는데 군산시에서 그대로 다시 지은 것이다. 사진관 맞은편 무국집은 돌아가신 유영길 촬영감독님이 좋아하셨던 곳이라 촬영 끝나고도 드시러 가시곤 했다. 나로서는 영화를 관객들이 기억해주시는 게 신기할 뿐이다.
- <봄날은 간다>를 이루고 있는 많은 것들, 예를 들면 대사나 의상, 소품, 장소, 상황 등이 문화 전반에 영향을 끼쳤다.
= “라면 먹을래요?” 라는 대사가 그렇게 회자되고 있는 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언젠가 <SNL 코리아>에서 안영미 씨가 똑같이 재현하는 모습이 너무 재미있더라. 사실 그 장면은 이영애, 유지태 두 배우가 즉흥적으로 만들어냈다. 시나리오에는 “커피 한 잔 할래요?”라고 쓰여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왠지 재미가 없는 것 같다, 상황만 던져 줄 테니 알아서 대사를 해보라고 했었다. 반면에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는 영화의 시작 단계에서부터 고민을 하고 만들었던 대사다.
- <봄날은 간다>는 이영애, 유지태 배우뿐만 아니라 김형구 촬영감독, 조성우 음악감독 등 제작진의 앙상블이 뛰어났다. 돌이켜보면 어떤 촬영 현장이었나.
= 유지태 배우는 당시 26살이었다. 배역에 굉장히 깊이 들어와 있었다. 현장에서 두 배우와 정말 많은 대화를 나누며 찍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하루에 평균 4컷, 5컷 정도를 찍었는데 전체 컷 수가 220컷 정도로 적었다. 김형구 촬영감독이 롱테이크에 대한 아이디어를 많이 내셨는데 그래서 더 컷수가 적어졌던 것 같고. 그러다 보니 하루에 찍을 수 있는 분량이 적어졌고 자연스레 배우들과 더 많은 대화를 하게 됐다. 당시 촬영팀이 몇 천 컷으로 이뤄진 <무사>를 찍고 넘어왔는데 촬영 내내 카메라가 가만히 있으니까 처음엔 아주 좋아하다가 가면 갈수록 힘들어했던 기억도 난다. 류장하 감독이 제일 고생했다. 당시 조감독이었는데 느리게 진행되는 현장에서 전혀 채근하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제작자의 압력이 있었겠나. 그걸 다 막아주고 참고 기다려줬다.
- 공교롭게도 영화제 기간 중에 첫 드라마 연출작인 JTBC 드라마 <인간실격> 마지막회가 방영된다. <인간실격>의 부정(전도연)이 빨간 목도리를 두르고 등장하는 설정은 직접적으로 <봄날은 간다>의 은수 목도리와 연결되고 부정의 아버지 역의 박인환 배우, 시어머니 역의 신신애 배우는 <봄날은 간다>에서 상우의 아버지와 고모를 연기하기도 했기 때문에 두 작품이 연결되는 지점이 많다.
= 나는 목도리가 등장하는 걸 반대했지만 작가가 꼭 넣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그 목도리는 류장하 감독의 아이디어였다.
- <인간실격>은 편집 구성이 독특하다. 각 인물의 기억, 의식의 흐름에 따라 순서가 뒤바뀌어 있는 데다가 부정과 강재(류준열)의 내레이션이 덧입혀져 있기 때문에 모든 장면을 꼼꼼하게 보지 않으면 감정과 이야기의 흐름을 놓칠 수가 있다. 2시간 분량의 영화를 이끌어가는 것과 완전히 다른 경험이었을 텐데.
= 일단 엔딩을 모르고 찍는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였다. 4회차 정도의 대본을 받고 시작했기 때문에 드라마라는 것은 작가가 갖는 위치가 중요하다는 걸 느꼈다. 영화를 찍을 때는 촬영 전날에 대본의 상황을 가지고 대사를 다시 만지기도 하는데 드라마 현장에서는 그럴 시간 여유가 없었다. 이번에 시청률이라는 지표를 처음 받아봤는데 후반작업을 하는 와중에 드라마가 방영되면 스태프들이 실시간 댓글반응을 보면서 이야기 해주기도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해서 봐야 하는 드라마의 스타일에 시청자들이 당황한 점도 있었던 것 같다. 작가 특유의 호흡이나 내레이션이 낯설었을 수도 있다.
- 전도연, 류준열 두 배우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연기를 보여준다. 전도연 배우는 디테일하고 밀도가 높은 연기를 보여주는 반면, 류준열 배우는 상대적으로 다른 호흡, 즉흥적인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 두 배우의 연기하는 방식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현장에 와서 대사를 외우는 식으로 자유로운 연기를 추구하는 류준열, 정말 많은 준비를 해와서 첫 번째 촬영 테이크에 오케이 싸인을 떨어지게 만드는 전도연의 연기가 현장에서 어우러지는 것이 신기했다. 재즈와 정통 클래식의 만남 같았다고 해야 할까. 나는 현장에서 배우들의 연기를 보면서 좋다, 라는 말을 잘 못하는 성격이다. 박광수 감독님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웃음) 이번 현장에서는 전도연 배우에게 좋다는 표현을 참 많이 했다. 편집을 하면서도 집중시킬 수 있는 아우라, 가만히 있어도 눈빛으로 연기하는 모습이 놀라웠다. 류준열 배우는 순간의 변화를 잘 캐치한다. 말을 절거나 같은 호흡이 반복되지도 않는, 매 테이크마다 다른 일상어 연기를 본능적으로 잘한다.
- 드라마는 작가의 예술이라고는 하지만 <인간실격>은 묘하게 허진호 월드라고도 할 수 있는 전작들이 공유하는 작품 세계의 자장 안에 놓인 작품이 아닐까 싶었다. 첫 화에서 부정이 “외롭다”면서 우는 장면의 정서로 시작해서 “나 자신을 조금도 사랑할 수 없는 내가, 이런 나도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요?”라는 내레이션, 혹은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일 만큼 대단한 이유가 아니라서, 나를 구하지 못해서 나를 지키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등 부정이 쏟아내는 모든 대사가 절망적인 죽음의 기운을 품고 있지만 사랑을 찾게 되는 순간과 맞닥뜨리게 되는 건 허진호 감독의 색채라는 생각도 들었다.
= 나도 대본을 읽으면서 어떤 대사의 경우에는 정말 내가 썼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김지혜 작가의 대본을 전혀 바꾸거나 하지 않았다. <인간실격>은 작가가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이 묻어나는 작품이다. 한석규 배우가 한 편의 영화에서 기억나는 대사가 몇 개만 있어도 좋은 영화라는 이야기를 한 적 있는데 이 드라마는 매회마다 정말 좋은 대사들이 쏟아졌다.
- 어떤 장면, 어떤 대사가 가장 기억에 남나.
= 시어머니인 신신애 배우가 남편 이야기를 하면서 “금니 해줄 때보다 팔아서 쓸 때가 더 고마웠다”라고 말하던 장면은 너무 좋지 않나. 감정의 깊이, 그 슬픔이 절절하게 전해진다. 부정과 강재가 옥상에서 대화하는 장면도 좋아한다. 처음으로 두 사람이 만나서 부정에게 변화가 생기는 장면이다. 3화에서 부정과 아버지가 TV보면서 대화하는 장면은 굉장히 긴 대화를 몇 분 동안 주고받는데 NG 없이 한 번에 오케이했다. 앵글에 맞춰서 정면, 뒷모습을 몇 번 반복해서 찍었는데도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현장에서 마치 두 배우가 협주를 하는 느낌을 받았다.
- <인간실격>의 부정과 강재, 그 주변 인물들 모두 각자의 고통 속에서 사랑을 찾아 나가게 된다. 사랑이 사람을 구원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작품에 임했는지 궁금하다.
= 나 역시 그랬던 것 같다. 자살까지 생각했던 부정적인 삶을 살았던 부정을 사랑이 치유해주는 것 같고 강재는 어린 시절의 가난에 대한 기억 때문에 돈이 곧 사랑이라고 생각하던 인물이지만 변화한다. 자신을 지배해왔던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이유, 그런 면에서 사랑이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 스페셜 토크를 통해서 20년 만에 다시 관객과 만나게 됐는데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예정인가.
= 강릉 오기 전에 오랜만에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뭘 하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영화의 모티브가 되었던 백설희 씨의 ‘봄날은 간다’를 다시 들어봤다. 당시에는 몰랐는데 작사가 손로원 씨가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하고 산소에서 이 가사를 쓰셨다고 하더라. 나는 <봄날은 간다>라는 제목을 아버지 환갑 잔치 때 어머니께서 연분홍 치마를 입고 이 노래를 부르시던 모습을 떠올리며 지었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담긴 곡이었다는 걸 뒤늦게 알고 우연이 겹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래 가사가 주는 정서적인 울림을 통해 사랑과 세월에 대한 변화, 찬란한 슬픔 같은 걸 느꼈는데 그 곡의 여운이 영화에 굉장히 많이 반영되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이 노래로 영화의 엔딩을 장식하지 못한 게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