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화의 충무로 클래식]
[정종화의 충무로 클래식] 고래를 꿈꾸다
2021-11-08
글 : 정종화 (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

<병태와 영자>

약혼식장에서 영자(이영옥)를 데리고 나가는 병태(손정환).

제작 화천공사 / 감독 하길종 / 상영시간 115분 / 제작연도 1979년

예술성과 대중성 사이에서 고뇌하던 하길종은 1979년 최고의 흥행 성적을 거뒀다. 여섯 번째 작품 <속 별들의 고향>(1978)과 일곱 번째 작품 <병태와 영자>가 각각 1979년 흥행 1위와 5위를 차지하며 그의 상업적 역량을 확인시킨 것이다. 1978년 11월에 개봉한 <속 별들의 고향>은 명보극장에서 다음해 1월까지 상영을 이어가며 30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고, 1979년 2월에 개봉한 <병태와 영자>는 스카라극장에서 18만 관객을 모았다. 자신의 연출작이 연달아 흥행에 성공한 기쁨도 잠시, 그는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2월28일 세상을 떠난다. 하길종의 마지막 작품 <병태와 영자>는 <바보들의 행진>(1975)의 속편으로 만들어졌다. <바보들의 행진> 때는 작가 최인호가 자신의 소설을 시나리오로 각색했는데, 2부 격인 <병태와 영자>는 작가가 직접 시나리오를 썼다. <속 별들의 고향>에 이어 최인호의 대중 감각에 기댄 것이라 볼 수 있지만 감독은 안정된 연출을 통해 시나리오 이상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다. <병태와 영자>에서는, 혹독한 검열을 겪었던 <바보들의 행진>이 노출한 거친 만듦새와 과격한 에너지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 할리우드의 고전적 문법에 기반한 영화는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대중적 감각을 영리하게 차용할 뿐이다.

애틋한 청춘 로맨스

<바보들의 행진> 때만큼은 아니지만 이 영화 역시 시나리오 사전심의 단계부터 적지 않은 이슈를 만들었다. ‘바보들의 행진 제2부’라는 프로젝트명에 이어 영화의 정신을 상징하는 ‘고래사냥’을 제목으로 내세웠더니, 당국은 내용과 전혀 무관하다며 바꾸게 했고 동시에 고래가 포함된 대사들도 모두 삭제시켰다. <바보들의 행진>에서 완전히 지워내지 못한 저항성이 부담스러웠던 것인지 검열 당국은 두 영화의 연관성을 지우고 싶었던 것 같다. 결국 최종 제목은 주인공들의 이름인 <병태와 영자>가 되었다. 사실 완성된 영화에서 고래를 언급하는 대사들이 살아 있는 것을 보면 영화 본편 검열은 무난하게 지나간 듯하다. 청춘 로맨스 장르로 잘 마무리된 영화에서 전작의 불온성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영화는 군대 내무반의 사열 장면으로 시작한다. 장군은 기합이 빠졌다며 병태(손정환)의 관등 성명을 반복시키고 관물대에서 영자(이영옥)의 사진을 찾아 누구인지 물어본다. 장군 앞에 주눅 든 병태는 말을 더듬는데, 전작의 두 청년인 병태와 영철이 합쳐진 캐릭터로 느껴진다. 영자가 보낸 편지를 읽는 병태의 목소리 위로 군인들의 훈련 장면이 보인다. 병태가 “예”라고 기합을 넣는 얼굴이 프리즈 프레임되고 다음 장면은 흙먼지를 날리며 달리는 버스의 모습이다. 3년 만에 처음 영자가 면회 온 것이다. 병장 병태는 군인들과 함께 “때려잡자 김일성, 무찌르자 북괴군”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구보하다 면회 소식을 듣는다. 영화의 주제가인 사랑과 평화의 <한동안 뜸했었지>가 경쾌하게 흘러나오며, 망원렌즈로 잡은 위문소로 달려오는 병태의 모습, 창밖을 바라보는 영자의 모습, 유리창을 중경에 두고 전경의 영자와 후경에서 달려오는 병태의 모습을 딥 포커스로 잡아낸 장면까지 공들인 데쿠파주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렇게 한달 뒤면 제대하는 병태와 이미 은행에 취직해 두달 후면 졸업하는 영자의 이야기로 2편이 시작된다.

마땅히 갈 곳이 없는 둘은 여인숙으로 들어간다. 그동안 못한 얘기나 밤새 나누자는 영자는 시집갈지 모른다고 고백하고, 병태는 뽀뽀나 한번 하자며 장난을 건다. 물론 전작에서 봤던 에피소드다. 영화는 <바보들의 행진>의 대사뿐만 아니라 구도, 소품 등을 반복하며 효율적으로 전작을 활용한다. 먹을 것을 사오겠다며 나간 병태는 술집 작부들 사이에 앉아 “고래 잡으러 간다”고 외치지만 공허하게 들릴 뿐이다. 어쩌면 병철의 또 다른 자아였던 영철이 세상을 떠나 꿈도 용기도 사라졌기 때문이다. 술의 힘을 빌린 병태는 영자에게 보고 싶었다며 시집가지 말라고 진심을 드러내지만 더이상의 용기는 낼 수 없다. 영화는 청춘의 애틋함이 묻어나는 근사한 장면들로 가득하다.

영자는 집안끼리 약혼을 약속한 의사 주혁(한진희)과 제대한 병태 사이에서 갈등한다. 영자의 졸업식 장면, 주혁은 그녀의 가족들과 함께 사진을 찍지만 영자는 다가오지 못하는 병태와 함께 영철의 묘비를 찾는다. 이후 영화는 병태가 연적을 물리치고 영자와 결혼하려는 고군분투의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보여준다. 대가족과 같이 사는 병태는 영자를 집에 데려와 이런저런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 승낙을 얻어내지만, 더 큰 문제는 연적 주혁과 영자 집안이다. 주혁은 병태에게 같은 시간에 약속을 잡아서 영자가 누구에게 오는지 내기를 제안한다. 영자는 레스토랑에 있는 주혁을 먼저 찾아가지만 그가 사주려는 반지를 미루고 주점에 있는 병태를 찾아간다. 그녀는 병태를 단념시키고 결국 둘은 헤어진다. 전작에서 <날이 갈수록>이 흘렀던 음악 시퀀스가 이제 영자와 병태가 각각 마음을 추스르는 장면으로 반복된다.

연적과 벌이는 세번의 승부

동생(이승현) 덕분에 용기를 낸 병태는 고래를 잡으러 가겠다며 주혁이 일하는 병원으로 간다. 약혼식으로 막 출발하려던 주혁은 1층까지 누가 먼저 내려가는지 두 번째 내기를 건다. 그는 승강기를 타고 병태는 계단을 뛰어가지만 운 좋게 병태가 이긴다. 1승1패 상황, 주혁은 마지막 내기를 제안한다. 그는 자동차로, 병태는 뛰어서 누가 먼저 약혼식장에 가는가이다. 불리한 게임이지만 병태는 흔쾌히 참가한다. 병태는 도심의 지름길을 찾아 마라토너처럼 뛰고 주혁은 국군의 날 퍼레이드와 마주쳐 정체 속에 갇히고 만다. 감독은 병태가 약혼식장의 영자를 데리고 뛰어나오는 모습까지 연출하며 <졸업>(감독 마이크 니컬스, 1967)의 한국 버전임을 숨기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은 병태의 졸업식이다. 병태는 학사모를 들고 병원으로 달려가는데 영자가 출산을 했기 때문이다. 병태는 신생아실 유리창 너머로 딸과 아들 쌍둥이인 “작은 고래 새끼”들을 보고 기뻐한다. 엔딩은 두 아기를 안아들고 복도로 나오는 병태의 모습인데, 환상적인 톤으로 연출됐다. 이 영화가 전작과 달리 병태의 가족들을 세트 공간에서 묘사하고 또 액자 속의 아버지가 호통치는 등 초현실적 표현을 사용했던 것을 떠올려보자. 꿈보다는 현실의 고래를 잡은 병태지만 그 또한 환상일 수 있음을 말하는 듯하다. 당시 정부는 이 영화를 우수영화로 또 해외 홍보영화로 선정했지만 영화의 깊은 내면까지 읽어내지는 못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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