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이 자오와 켈리 라이카트, 2020년대 아메리칸 시네마의 가장 빛나는 이름인 두 감독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로부터 창작의 영감을 받았다는 점이다.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퍼스트 카우>는 “새에겐 새집이, 거미에겐 거미집이, 인간에겐 우정이”라는 블레이크의 시 한 구절로 시작한다. 클로이 자오는 <이터널스>를 만들기 위해 마블의 수장 케빈 파이기를 위한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며 “한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라 그대의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한순간 속에 영원을 보라”는 블레이크의 시를 통해 영화의 비전을 제시했다고 한다. <퍼스트 카우>와<이터널스>의 개봉 시기가 겹쳐 윌리엄 블레이크의 이름을 우연히 발견한 까닭도 있겠지만 두 감독이 같은 예술가의 이름을 모티브로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 단순한 우연으로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창대하고 유구해 보이는 세계와 전통도 결국은 사소하고 일상적인 무언가로부터 시작된다는 것. 윌리엄 블레이크가 노래한 세계의 내밀한 비밀은 클로이 자오와 켈리 라이카트의 영화가 공유하고 있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이번호에서 두 감독의 작품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보다 자세히 만날 수 있다. 클로이 자오와 켈리 라이카트의 영화를 구성하는 중요한 공동의 키워드는 ‘다양성’이다. 최근 한국 관객을 만난 클로이 자오의 <이터널스>는 캐릭터의 나이, 성별, 인종, 국적, 성적 지향의 측면에 있어서 그동안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서 주변부로 밀려나거나 보이지 않던 존재들을 가시화한다. 매 작품 여성과 동물, 자연을 사려 깊게 조망하는 켈리 라이카트의 영화는 <퍼스트 카우>에 이르러 서부 개척 시대 변방에 위치했던 유대인 요리사와 사연 많은 중국인 남성의 우정을 다룬다. 메인 스트림 영화가 종종 간과해왔던 변방의 존재들, 사건조차 되지 못했던 일상의 소소한 순간들, 샛길의 모래알과 물소리와 그곳을 거니는 이들의 고요한 발자국 소리에 귀 기울이는 클로이 자오와 켈리 라이카트의 영화는 다양성의 기치를 중심으로 서서히 변모하는 아메리칸 시네마와 미국의 풍경에 대한 현존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번호부터 안시환 평론가의 빈자리를 대신해 비평지면 프런트 라인의 새 필자로 합류한 송형국 평론가가 <퍼스트 카우>를 비롯한 최근 미국 서부영화에 대해 던지는 질문도 주의깊게 봐주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