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만 밤, 불현듯 잠에서 깨어나면 어둠에 적응해야 한다. 천천히 눈을 비비고 다시 떠보아도 주변이 칠흑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불을 켜기엔 몸이 굳었고, 머무르기엔 간지러운 이들에게는 밤에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하다. <아워 미드나잇>은 그들에게 암순응의 나날을 쥐어주는 영화다. 기회는 오래 꿔온 꿈을 놓으려는 남자, 꿈꿀 자유마저 잊고 살던 여자에게 찾아온다.
무명배우 지훈(이승훈)은 공무원인 선배의 소개로 한강 다리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지훈이 다리를 걸으며 하는 일은 정찰과 회유. 대사를 읊어보며 연기 연습을 하는 것은 덤이다. 자살 방지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양화대교를 비밀 순찰하던 지훈은 우두커니 물결을 바라보는 한 여자를 주시한다. 그의 이름은 은영(박서은). 은영은 지훈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속절없이 쓰러지고, 지훈은 그를 응급실에 데려다준다. 다음날 같은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지훈은 또다시 은영을 본다. 지훈이 자신을 도와줬음을 알 리 없는 은영은 지훈을 경계하지만, 지훈은 간밤의 걱정스런 마음을 전달하며 자신도 죽고 싶은 적이 있었다고 말을 건넨다. 그러나 은영은 그저 산보를 하던 중이었는데, 사내연애 끝에 데이트 폭력을 겪은 은영의 괴로움이 그를 바깥으로 불러낸 것이기는 하지만 그에게 죽을 생각까지는 없었던 것. 그것도 모르고 본분에 충실했던 지훈은 자꾸만 시야에 들어오는 은영과 대화를 이어간다. 은영도 어떤 이야기든 편히 꺼낼 수 있는 초면의 특권을 누리며 지훈에게 화답한다. 낯선 상대에게서 내 것과 비슷한 고독을, 그러나 전혀 다른 삶의 궤적을 확인한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동안 자신이 원하는 것이 어떤 모양으로 마음 안에 자리 잡고 있는지 재발견한다. 지훈과 은영이 밟는 걸음이 늘어날수록 이들의 대화는 깊어진다. 덕분에 미약하게나마 용기를 내보고, 부질없는 희망도 품어보는 이들의 여정은 강을 지나 이태원, 종로 등 서울 시내로 뻗어간다. 그동안 그림자는 끝까지 이들을 따라와 두 사람의 뒷모습을 연결한다.
심야의 도시 전체를 카페 삼아 대화를 나누는 한쌍에게서 자연스럽게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비포 선라이즈>가 연상된다. <비포 선라이즈>의 제시(에단 호크)와 셀린느(줄리 델피)가 결국 사랑을 속삭이기까지, 오스트리아 빈의 거리는 이제 막 사회와 관계 맺기를 시작한 20대들의 긴장과 환희로 번져간다. 건국대학교 영화과, 단국대학교 영화콘텐츠전문대학원에서 연출을 익힌 임정은 감독의 첫 장편 <아워 미드나잇>에는 그보다는 미세하지만 분명한 낭만이 녹아 있는데, 지훈과 은영의 서울은 불안을 견뎌온 이들이 뿜어내는 어떤 체념의 정서로 물들어 있다. 이때 <아워 미드나잇>의 흑백 화면은 어둠을 더 어둡게, 그 안에서 빛을 더 선명히 볼 수 있게 하는 장치다. 임정은 감독은 사진작가 로이 디커러바의 작품을 레퍼런스 삼아 인물을 감싸는 명암을 카메라에 담았다. 후반부에 이르러 변화를 겪는 이 화면은 “문제가 드라마틱하게 바뀌지 않아도, 심지어 상황이 더 안 좋아져도, 모든 순간을 피하지 않고 온몸으로 버티는 청춘들이 있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감독의 말을 증명하는 형식으로 완결성을 갖춘다. 감독이 말하려는 바와 보여주는 바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며 시네마틱한 쾌감을 선물하는 신으로는, 극장 앞에 앉아 그림자놀이를 하던 지훈과 은영 앞에 펼쳐지는 환상 장면도 꼽을 수 있다. 임정은 감독은 이 장면을 떠올리는 것으로 <아워 미드나잇> 시나리오를 구상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는 고단한 현실을 묘사해온 영화가 현실에서 도피해 상상력을 발휘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지훈과 은영이 목도하는 크고 무거운 존재의 움직임은 기묘한 위로를 준다. 2020년 제25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비전 부문에서 처음 공개되었으며 파리한국영화제, 글래스고영화제, 위스콘신영화제 등에서 소개되었다.
CHECK POINT
서울판 <비포 선라이즈>
“처음 본 청춘 남녀가 목적지 없이 계속 걷는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었다”던 임정은 감독은 지훈과 은영을 이촌역 일대와 명동 거리, 선유도 공원 입구와 이화여고 돌담길, 을지로 노포와 종로3가의 영화관 거리로 데려간다. 서울의 밤 구석구석은 두 사람의 걸음을 따라 여유롭게 어두워진다.
영화 속 연극 <갈매기>
무명배우 지훈이 한강 다리를 마지막 무대로 여기고 뱉는 대사는 안톤 체호프의 희곡 <갈매기>의 한 대목이다. 지훈은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법을 깨닫는 <갈매기>의 여자주인공 니나의 대사를 읊으며 일인극을 펼친다. 실컷 꿈꿔본 이의 회한과 다짐이 담긴 이 장면은 영화의 마지막을 뭉클하게 장식한다.
한밤의 그림자놀이
<아워 미드나잇>의 흑백 화면이 가장 빛날 때는 지훈과 은영이 텅 빈 벽을 두고 그림자놀이를 할 때다. 두 사람의 손동작은 어둠 가운데서 더 짙은 어둠을 만들어내 주변을 더 밝게 한다. 영화의 명암은 인물들의 심정을 대변하고, 마지막에 이르러 형식적 반전을 선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