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녹색 광선의 경이
2021-11-08
글 : 송경원
사진 : 오계옥
<초록밤> 윤서진 감독

초록은 자연, 생명, 평온, 재생, 조화, 회복, 부활의 색이다. 붉음과 푸름의 중간 스펙트럼에 위치한 초록은 균형과 내면의 평화, 그리고 넘치는 생명력을 반영한다. 동시에 초록은 우울과 죽음, 붕괴와 질투의 색이기도 하다. 짙은 어둠에 물든 초록은 우리를 한없는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초록은 그렇게 탄생과 죽음을 동전의 양면처럼 품고 있다.

윤서진 감독의 <초록밤>은 초록의 조명 아래 잠식된 영화다. 제목만 듣고선 이게 초록의 어떤 얼굴에 가까울지 감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초록과 밤의 조합은 어딘지 위태롭게 들린다. 이것은 한 가족의 이야기다. 야간 경비원으로 일하는 아버지의 하루는 무기력하 다. 살림을 도맡은 어머니는 늘 지쳐 있다. 장애인 활동 보조사인 아들에게 내일을 꿈꾸는 건 사치다. 이들 가족을 잠식한 초록은 어둡고 무겁고 우울해 보인다. 이들의 삶도 그렇다. 그런데 그렇게 결정짓는 순간 영화는 기이한 마력을 발휘한다. <초록밤>은 매우 단순하고 단선적인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각자의 짐에 지친 가족들은 대화가 없고 서로의 삶을 버텨내기 바쁘다. 늘그렇듯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반갑지 않은 이별과 죽음이 몇 차례 가족의 방문을 두드린다. 가족들은 평온하고 덤덤해 보이지만 미세한 균열과 떨림은 감출 수 없고, 집안 전체로 조용하고 무겁게 확산된다.

<초록밤> 스틸

스토리만 이야기한다면 몇 문장이면 족할 상황을 영화는 살뜰하게 쓸어담는다. 그렇다고 흔한 롱테이크와 응시를 기대했다면, 당신의 예상은 기분 좋게 빗나갈 것이다. <초록밤>은 이야기의 빈자리를 독특한 분위기와 형식으로 채워나가는 종류의 영화다. 마치 초현실처럼 초록색이 장면을 가득 메우는 순간 영화는 화려하면서도 조용하게 한폭의 그림을 그려나간다. 윤서진 감독은 데뷔작이란 수식어가 무색할 만큼 과감한 시도를 통해 전에 없던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일반적이지 않은 방식이란 걸 안다. 두려움도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함께 만드는 과정이 재미있고 의미 있는 작업을 해보고 싶었다.”

윤서진 감독은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OTT가 대세가 되어가는 요즘, 부쩍 영화와 영화가 아닌 것의 차이가 무엇일까 궁금했다. 단순히 완성도나 재미를 생각하면 한국 독립영화보다 훨씬 앞서나간 결과물들도 많다. 이런 상황에서 적은 예산으로 독립영화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고 싶었다.” 그저 이야기를 전달하는 도구로서의 영화가 아닌 감정을 공유하고 퍼트리는 행위로서의 영화. <초록밤>은 그 근본적이고 당연한 질문에 대한 패기 넘치는 답이다. 이러한 고민이 무르익기까지 필요했던 시간은 결코 짧지 않았다. “2015년경 처음으로 시나리오를 썼다. 가족이 함께 여행을 떠나면서 벌어지는 전형적인 로드무비였다. 지인 중 한 사람이 이들이 왜 여행을 떠나야 하는지 툭 하고 물었는데 답을 내지 못했다.” 그렇게 이야기가 멈춰 있던 와중에 윤서진 감독은 소중한 이들을 떠나보냈다. “2017년에 15년을 함께했던 반려견이 죽고 외할머니, 친할아버지가 차례로 돌아가셨 다. 장례식에서 속물적인 마음과 애도의 감정이 뒤엉키는 순간들을 겪으면서 자연스럽게 지금의 시나리오가 나왔다.”

<초록밤>은 그릇의 영화다. 사건을 지우고, 표정을 비우고, 이야기를 줄인 자리에는 무드와 뉘앙스가 들어찬다. “처음엔 A4 70장 가까운 시나리오였는데, 15번째 버전이 나왔을 땐 30장까지 줄어 있었다.” 비어 있는 이야기, 건조한 시선, 표현을 덜어내라는 요구에 배우들도 처음엔 낯설어했다. “특정한 감정을 요구하지 않았다. 공간을 잡는 전경 숏을 많이 사용했고 인물들 사이의 거리도 최대한 확보했다. 앞뒤 컷을 안 찍느냐고 불안해하기도 했지만 이게 맞다는 믿음이 있었 다. 누군가 불안할 때면 다른 스탭들이 나서서 감독님을 믿어달라고 하는 분위기였다. 나의 비전을 구현한 현장이 아니라 함께 머리를 맞대고 창조한 ‘우리’의 현장이었다.” 그는 겸손하게 말했지만 여느 내러티브 영화와는 다른 접근 방식에서 스탭들이 믿고 따라올 수 있었던 건 사전에 감독과의 수많은 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박찬욱 감독님이 부산영화제에서 진행한 마스터클래스 영상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 박 감독님은 함께하는 즐거움을 강조하며 함께하는 동료들에 의해 현장에서 수정되는 것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고 하셨다. 결국 영화는 집단 창작이고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 다.” 우스갯소리로 “감독이 없어도 돌아갈 수 있을 만큼 유기적이었 던” 현장은 사전에 수많은 자료를 공유하고 소통했던 시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윤서진 감독은 “추경엽 촬영감독과 서로 나눠본 사진첩만 수십권은 된다”라며 각자의 영역에서 서로를 존중했던 시간을 즐겁게 회상했다.

<초록밤> 스틸

이야기를 비워낸 자리에 무엇을 채워넣을 것인가. 어느 영화가 그렇지 않겠냐마는 <초록밤>은 촬영과 조명, 미술과 음악 등 이른바 영화 언어가 절대적인 지분을 차지하는 작품이다. 이야기로 설명하는 대신 공간을 만들어놓고 관객을 그 자리로 초대한다고 해도 좋겠다. 공간을 비워두고 거기에 빛을 떨어뜨림으로써 생각의 여유를 만들고자 했던 윤서진 감독은 “빈 공간에서 원영의 가족을 따라가기보다는 각자 자기의 시간을 떠올리길 바랐다”고 밝혔다. “오정미 감독의 단편 에서 함께 작업했던 신우정 미술감독은 한정된 예산과 시간에도 불구하고 완벽한 공간을 세팅해주었다. 덕분에 정교한 조명과 정확한 촬영이 가능했다. 불필요한 에너지 낭비 없이 시나리오 최종 버전을 그대로 옮긴 촬영 현장은 장면의 완성도를 끌어올리기 위한 최적의 환경이었다.”

감정의 형상을 조형하듯 다듬어낸 장면을 하나의 덩어리로 완성시킨건 나가시마 히로유키의 손에서 탄생한 영화음악이다. “하남규 사운드 디자이너를 통해 소개받았는데 아오야마 신지,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과 작업해온 도쿄국립예술대학 영화과 교수님이다. 처음엔 조니 그린우드가 연상되는 과감한 사운드를 보내주셨는데 조금 더 친절한 쪽으로 수정해서 지금의 결과물이 나왔다. 사운드는 무게를 담을 수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리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소리가 사라지고 난 뒤 남겨진 여운까지 끝까지 들려주고 싶었다.” 그리하여 <초록 밤>은 사건이 침묵하고 감정이 진동하는 영화로 거듭난다. 이것은 낯선 실험영화도, 어려운 영화도 아니다. 간단한 이야기에 익숙한 감정, 독창적인 형식의 조합으로 빚어낸, 영화만이 할 수 있는 무언가를 고민한 끝에 도달한 친절한 결과물이다. 올해 부산영화제에서 CGV아 트하우스상, 시민평론가상, CGK촬영상을 수상하며 3관왕에 올라 독창성과 대중성을 증명했다. 스크린을 마주한 이들을 초대하는 초록의 공간. 사각의 프레임을 가득 채운 초록 빛깔은 생기와 우울을 거쳐 오직 신비로움으로 자리한다.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