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화의 충무로 클래식]
[정종화의 충무로 클래식] 역사의 비극을 좇다
2021-11-22
글 : 정종화 (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
<최후의 증인>
끝내 한동주(태일)를 찾아낸 오병호 형사(하명중).

제작 세경영화 / 감독 이두용 / 상영시간 154분 / 제작연도 1980년

1979년 10·26 사건으로 유신 체제가 종말을 맞았지만 ‘서울의 봄’은 오래가지 못했다. 정권 찬탈을 목적한 신군부는 1980년 5월17일 전국으로 비상계엄을 확대했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참혹하게 무력으로 진압했다. 1980년 9월1일 간접선거를 통해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취임했고 10월27일 제5공화국 헌법이 제정되었다. <최후의 증인>은 바로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당국에 처음 시나리오를 접수한 때가 1980년 2월이고 영화제작신고서상의 착수 일자도 이때였지만, 이두용 감독은 1979년 5월부터 주연 하명중, 촬영기사 정일성 등 스탭들과 전국을 누비며 촬영을 진행하고 있었다. 1980년 9월 본편 검열이 진행됐고 네 군데의 화면 삭제만 지시받으며 비교적 무난하게 검열 합격증을 받았다. 빨치산 무리에 손지혜(정윤희)가 윤간당하는 장면 일부와 공권력의 비위를 드러내는 세 장면이 잘려나가면서 최초 158분이었던 러닝타임이 154분으로 줄었다.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버전이다. 하지만 영화는 곧바로 상영되지 못했다.

비운의 걸작

이두용의 회고에 의하면 10월에 개최되는 관변영화제 대종상에서 압도적인 스케일의 이 영화가 작품상을 받을 것이 유력해지자 누군가 감독의 사상과 영화의 내용에 문제가 있다며 청와대에 투고를 넣는다. 대종상 수상이 외화 수입 쿼터라는 강력한 이권과 연결된 탓이었격해 관객을 만난다. 얼마나 잘려나갔을까. 당시 검열 합격증을 보면 기존 검열에서 결정된 화면 삭제 4개처 외에도 대사 삭제 4군데가 추가되었다. 충격적인 것은 “신83의 광주검찰청 등 68개 장면 자진 삭제”라는 문구다. 표면적으로는 제작사가 자진해 68개나 되는 장면을 잘라냈다는 것이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믿기는 힘들다. 특히 광주가 배경인 장면들이 모조리 삭제된 것이 그렇다. 당시의 내밀한 정황은 “계엄사령부 검열필”이라는 스탬프로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영화는 검은 화면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감독 이두용이 밝힌 연출의 변이 등장하는데 내용의 일부는 이렇다. “구악을 일소하고 새 질서를 확립하려는 1980년 이 시대에 어제의 진실이 무엇이고 가짜가 무엇이라는 것을 한 수사관의 집념적인 인간보호를 통해 가식 없이 토론하고 싶었다.” 이때 들리는 전투 한복판의 사운드는 이 영화가 6·25 전쟁에 대한 이야기에서 출발함을 말해준다. 감독의 “어두운 얘기”는 단박에 시작한다. 변호사 김중엽(한지일)이 누군가에게 살해당하는 장면이 나온 후 양조장 주인 양달수(이대근)가 살해당하는 모습이 이어진다. 둘 다 “누구요”라고 물어보지만 카메라 시점인 괴한은 흉기를 휘두르고, 그 타격음은 신문이 인쇄되는 윤전기 소리와 맞물린다. 오프닝부터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은 영화는 잠시도 집중을 풀지 못하게 만든다. 문창경찰서에서 나서는 형사 오병호(하명중)의 모습에 이어 시간상 앞 장면인 서장이 양조장 주인 살인 사건의 수사를 지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두 장면은 계속 교차하지만, 수사에 착수하는 오 형사의 모습 위로 서장의 목소리가 이어지며 오의 개인사부터 사건의 중대함까지 압축적으로 설명된다.

초겨울처럼 보이는 풍경 속에서 오 형사는 수사를 시작한다. 저수지를 둘러본 그는 문창 시장의 어느 술집에 들어간다. 여주인과 오 형사가 주고받는 대화 장면부터 이두용의 연출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오 형사의 측면을 전경에 걸고 여주인이 말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후경에는 방에 누워 있는 아들까지 잡혀 있다. 주모는 양달수가 본처와 첩 사이에 문제가 있었음을, 아들은 본처가 풍산에 살고 있다는 정보를 알려준다. 오 형사가 본처의 집에 찾아간 신의 데쿠파주 역시 스타일적 맥을 같이한다. 한방에 있는 오 형사와 본처와 아들을 잡아내는 숏의 연쇄는 그저 감탄스럽다. 와이드 화면의 절반 이상 점하는 오 형사의 뒷모습은 그들을 심리적으로 압박해가는 상황임을 근사하게 설명한다.

오 형사가 양달수의 수첩에 적힌 김중엽 변호사의 연락처를 확인하며 살해된 둘이 모종의 관계가 있음이 처음 확인된다. 오는 풍산 마을의 노인들로부터 양달수가 우익청년단 우두머리였고 공비 13명을 잡았다는 얘기를 듣는다. 그중 4명이 자수해서 살았는데 황바우(최불암)와 한동주(태일)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오 형사는 당시 그들의 자수를 주선한 교장 조익현을 만나 강만호(현길수)라는 이름을 듣고 그를 찾아간다. 오 형사가 인민군이었던 강만호를 만나며 첫 번째 플래시백이 시작된다. 지리산의 빨치산 대장이었던 손석진은 죽기 전 강만호에게 딸 손지혜를 부탁한다. 공비 소탕 작전으로 살아남은 빨치산들은 국민학교 교사 밑에 숨어 지내는데, 손지혜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 결국 양달수가 데려간 군경에 의해 공비들은 모두 죽고 손지혜와 그녀를 끝까지 보살핀 머슴 황바우, 한동주와 강만호가 살아남았다. 이야기를 들은 오 형사는 강만호가 손지혜를 보호하지 않는 이유가 “당신이 그녀를 임신시킨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20년간 감춰온 진실이 밝혀진 충격으로 그는 급사한다. 이때 오병호를 앙각으로 잡는 카메라는 그를 영웅처럼 보여준다기보다 심연에 도사린 진실과 이를 파헤치는 그와의 관계를 묘사하는 듯하다.

다섯번의 플래시백

술집에서 일하는 손지혜를 찾아낸 오 형사는 두 번째 플래시백을 통해 이후 사연을 듣는다. 지혜는 강만호의 아이를 낳아 황바우와 살다가 지리산에 숨겨놓은 아버지의 보물을 찾기 위해 양달수의 도움을 받게 된다. 하지만 양달수의 계략으로, 한동주를 죽였다는 죄를 뒤집어쓴 황바우는 감옥에 갇히고 손지혜는 원래 검사였던 김중엽에게 농락당한 후 양달수의 첩이 된다. 하지만 한동주는 20년 동안 숨어 살고 있었다. 다시 만난 박 노인이 아들 용재가 한동주를 봤다고 알려준 다음 신, 오 형사가 노름판에 있는 박용재를 잡는 장면의 데쿠파주는 영화의 백미다. 천장에 매달려 그네를 타는 전구를 사이에 두고 밀착하는 숏들은 1970년대 중반 태권도 액션영화로 단련해 스타일적 경지에 오른 이두용의 연출력을 확인시킨다. 황바우가 출옥했다는 사실은 알게 된 오 형사는 그의 고향 집으로 간다. 그의 누님이 전하는 세 번째 플래시백을 통해 손지혜가 낳은 태영이 그곳에서 자라다 아버지로 알고 있는 황바우와 해후하고 그의 사연을 알게 되어 집을 나간 것까지 설명된다. 세번의 플래시백으로거대한 이야기들을 요령 있게 전달한 영화는 결국 오병호와 황바우와 손지혜, 세 사람을 만나게 한다. 두번의 짧은 플래시백으로 남은 이야기들이 모두 설명되고, 셋 모두 죽음을 택한다. ‘최후의 증인’은 영화를 보는 우리의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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