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클래식한, 혹은 올드한 독창성
2021-11-24
글 : 윤웅원 (건축가)
레오스 카락스의 <아네트>가 보여주는 스탠드업 코미디와 오페라의 공간을 살펴보니

오늘날의 오페라극장이 과거의 오페라극장과 다른 점은 무대와 관람석의 중요도가 달라졌다는 거다. 파리의 두 오페라, 1875년에 건설된 오페라 가르니에와 1989년에 개관한 오페라 바스티유를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오페라 가르니에의 화려한 중앙 계단이 귀족들의 과시용 무대라면 관람석의 격실 좌석(박스석)은 서로간 시선의 무대다. 오페라극장은 아니지만, 심지어 공연이 잘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에는 다른 관객이 바라보는 장소라는 이유로 무대 위에 좌석을 설치한 극장도 있었다. 비율로 따지면 오페라 가르니에에서 관람객을 위한 공간은 무대보다 더 크고 화려한데, 오페라 바스티유의 경우는 정반대다. 공연의 중간 휴식 동안 사교의 공간이 되는, 명칭도 다양한 오페라 가르니에의 관람객 공간은 현대에 와서 로비라 불리는 좀더 기능적인 공간으로 통일되었다. 현대의 오페라극장은 관객을 무대 위의 오페라에 몰입하게 하는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 만들어진 공간이다. 즉 현대의 오페라극장을 주도하는 것은 무대다. 관객은 공연의 마지막, 브라보를 외칠 때에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허용된다.

<아네트>는 계속해서 무대를 만들고 있다

현대의 모든 공간들이 각각의 기능적 목적을 위해서 만들어지는 것처럼, 오페라극장에서 무대 위의 배우들과 무대 아래 관객의 역할과 공간은 분리된다. 그리고 현대 오페라극장에서 더 발전된 부분은 관객의 공간이 아닌 공연의 공간이다. 무대 측면, 아래, 뒤로 확장된 무대와 무대 디자인을 위한 부속시설이 관객의 공간을 대신해서 확대되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무대 뒤의 존재는 오페라 무대에 ‘깊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다. <아네트>의 오페라 무대 장면에서, 건물 내부 모습으로 디자인된 무대 뒤로 숲이 나타난다. 관람객의 눈에는 무대 뒤에 존재하는, 끝을 알 수 없는, 이 심연의 공간은 현대의 오페라극장이 새롭게 창조해낸 것이다. 이제 오페라극장의 주인은 무대 자체다.

헨리 맥헨리(애덤 드라이브)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이다. 그리고 그의 연인 안(마리옹 코티야르)은 오페라 가수다. 헨리와 안에게는 스탠드업 코미디와 오페라라는, 서로 다른 성격의 공연만큼이나 무대를 대하는 다른 태도가 존재한다. 헨리에게 모든 장소가 무대라면 안의 무대는 직업으로의 오페라극장에 더 한정된다.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헨리는 오토바이를 타고, 안은 내부가 들여다보이지 않는 자동차를 타고 자신의 공연장으로 이동한다. 스탠드업 코미디 극장에서 공연 전 대기실 장면이 나오는데, 헨리가 거울 앞에서 보여주는 섀도복싱 슬로모션 장면은 상징적이다. 마치 자기 자신을 보면서 공연하는 것 같은, 자신에게 도취된 헨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스탠드업 코미디 공연이라기보다는 연극이나 현대무용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헨리의 무대는 코미디언 헨리의 몸을 전시하고 있다. 공연의 마지막, 팬티 하나만 걸친 헨리는 엉덩이를 보여주며 무대를 떠난다. 헨리의 근사한 몸은 헨리의 공연이 말의 공연이라기보다는 몸의 공연에 가깝다는 착각을 하게 한다. <아네트>가 스탠드업 코미디를 이런 식으로 표현한 것은 헨리가 자기애의 인간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공연 후 오페라극장을 찾아간 헨리는 수많은 카메라 기자들에 둘러싸인 안을 바라보다, 오토바이 헬멧을 벗지 않은 채로 다가가 안과 포즈를 취한다. 자신보다 인기가 더 많은 안의 옆에서 헬멧을 벗지 않는 헨리의 태도는 역설적으로 그가 얼마나 다른 사람을 의식하는 무대의 인간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헨리가 무대의 인간이라는 사실은 영화의 서사를 진행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헨리의 스탠드업 코미디 극장은 관객의 좌석도 무대가 되고 있다. 헨리의 개그에 반응하는 관객의 모습을 대화 장면처럼 번갈아 보여주는데, 이는 헨리가 관객의 반응에 좌우되는 무대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안과 반대로, 헨리의 인기는 점점 쇠락하고, 헨리는 로스앤젤레스를 떠나 라스베이거스 호텔 무대에서 공연을 하게 된다. 호텔 무대는 관객이 테이블에 앉아서 관람하는 공연장이다. 마치 옛날 오페라극장의 격실 좌석을 연상하게 하는, 이 테이블 관람석은 헨리의 무대가 갖고 있는 권능이 약화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동시에, 추락하는 코미디언 헨리의 상황을 상징하는 요소다.

안과 헨리의 딸 아네트가 태어났을 때, 아기는 실제 배우 대신 마리오네트로 표현되었다. 다소 기괴하고 낯선 느낌을 주고 있는 마리오네트를 신화적인 해석이나 예술적인 의도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보다는 헨리의 눈에 실제로 보이는 아기의 모습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에서 아기가 처음 태어났을 때 원숭이를 닮은 모습을 띠고 있는데, 헨리가 아기에게서 느끼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 일 것으로 보인다. 무대의 인간인, 혹은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는 헨리는 아이를 대상화해서 인식한다.

성공한 안과 인기가 쇠락한 헨리의 관계는 결국 파국을 마주한다. 안이 헨리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요트 장면은 문자 그대로의 무대다. 폭풍우 치는 바다는 과장되게 표현되었고, 헨리와 안의 동작은 춤에 가깝다.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요트 위 갑판은 신만이 볼 수 있는 무대가 되겠지만, 영화는 마치 관객이 보고 있는 오페라 무대처럼 이 장면을 표현했다. 끝을 알 수 없는 폭풍 속의 바다는 안의 오페라 무대를 연상하게 한다. 이어진, 아이와 함께 난파된 해안 장면을 무대 디자인처럼 만들거나, 두 번째 살인 후 재판 장면에 관객을 끌어들이거나 하는 방식으로 <아네트>는 계속해서 무대를 만들고 있다.

평면도의 시대에서 투시도의 시대로

영화의 마지막, 헨리가 감옥에 면회 온 아네트에게 살인의 이유를 변명하기 위해 ‘심연’에 대해 노래했을 때, 나는 잠시 헨리에게 동화되었다. 추락하고 싶은 충동, 심연에 빠지는 감정에 대해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나는 헨리가 ‘무대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동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이야기하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축에서 평면도를 정의할 때, 1m 정도의 높이로 건물의 벽을 잘라 위에서 본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평면도의 정확한 설명이 될 수 없다. 실제로 위에서 바라본다면 원근감이 생겨서 벽의 측면이 보인다. 현실의 공간이 평면이 되려면 가늠할 수 없는 아주 먼 거리에 도달해야 한다. 즉 ‘추상의 세계’에 도달해야 한다. 건축 설계에서 사용하는 평면도는 실제 공간이 추상화되어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평면은 십자가 형태의 성당 평면 같은 것을 통해 상징에 도달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는 평면도 같은 것으로 건축을 하지는 않는다. 투시도 이미지같이 눈에 보이는 것이 더 중요한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오페라 무대는 언어 대신 노래, 음악, 무대, 춤으로 하는 공연이다. 현실 언어에 더 의존하는 영화가 오페라에 가까운 형식을 선택하는 순간 그 자체로 추상의 성격을 갖게 된다. 추상을 통해서 세상을 표현하는 것은 20세기의 예술 태도에 가깝다. 아마도 그래서 나는 <아네트>를 보고 독창적인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독창적인 영화이기 때문에 더 옛날 영화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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