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산이 좋다 사람이 좋다 풍악 따라 걸어온 유랑의 길 (중략) 가진 건 없어도 행복한 인생 나는 나는 나는 딴따라.” 송해의 노래 <딴따라>의 가사일부다. “딴따라라는 게 불어로 팡파르에서 나온 말이에요. 쿵짝쿵짝 팡파르, 쿵짝쿵짝 딴따라. 전에는 비아냥대고 경시하는 소리로 들렸지만 지금은 상당히 좋은 소리라 생각합니다.” 방송인 송해는 1927년 일제강점기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나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 와 이름을 송해로 바꾸고 떠돌이 악극단 생활을 하며 희극인으로서 토대를 닦았다. 무엇보다 1988년부터 지금까지 <전국노래자랑>의 진행을 맡아, 최장수 프로그램의 최장수 진행자로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는 원로 방송인이다. 일요일 낮 12시가 되면 들려오는 정겹고 힘찬 “전국~ 노래자랑”이라는 구호, 땡과 딩동댕을 경쾌하게 오가는 실로폰 소리와 유쾌한 웃음소리. 그 한가운데 30여년이 넘게 송해라는 존재가 있었다. 그러나 11월18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송해 1927>에서 만나게 되는 건 우리에게 익숙한 최고령 현역 방송인이자 딴따라 송해의 웃음 가득한 얼굴이 아니다. 음악을 하고 싶어 했던 아들의 꿈을 지지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죄스러운 마음, 뺑소니 교통사고로 아들을 일찍 떠나보내야 했던 ‘아버지’ 송해의 눈물맺힌 마음이 영화에 담겨 있다. <송해 1927>의 개봉 전날, 여전히 정정하고 재치 넘치는 입담을 자랑한 송해 선생님을 만났다. 95년의 인생사를 듣기엔 부족한 시간이었지만, 어떤 마음가짐과 태도로 삶에 임했는지 짐작하는 데는 무리 없는 시간이었다.
-코로나19로 지난해부터 <전국노래자랑> 방송 녹화가 중단된 상태입니다. 하루빨리 무대에 서고 싶으시겠어요.
=너무 장기간 녹화를 못하니까 리듬이 깨져요. 알다시피 나는 동적인 사람이잖아요. 또 대포 한잔한다고 소문난 사람인데, 움직이지 않으면 그것(술)도 맛이 없어요. 그게 뭐냐면 일과 건강이 같이 간다는 거지. 그래서 살도 좀 빠졌죠. 부기가 있었는데, 너무 빠진 것 같아. 보는 분들은 지금이 좋다 그러는데.
-원래 약주 많이 드시죠.
=(내 앞에서) 안 도망간 사람이 없지.
-내일(11월17일)이면 선생님이 주인공인 영화가 개봉하는데요, 기분이 어떠세요.
=어릴 때 학교에서 처음 담임 선생님 만나는 기분이에요. 과연 사람들이 어떻게 봐줄까 가슴이 두근거리지. 방송은 많이 했지만 영화는 단역 조금 한 정도이고, 내 영화를 찍겠다 그러니까 망설이기도 한참망설였죠.
-얼마나 망설이셨어요.
=3, 4개월 망설였어요. 그러다가 내 이야기를 뭐 하나 남겨놓아도 괜찮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면서 한번 임해보자 하고 시작하게 된 거죠. 그런데 나로선 만족스럽지가 않습니다. 허허허. 다큐멘터리라 하는 것은 알다시피 각본에 의해서 대사를 주고 받는 게 아니고 감독이 생각하는 바가 담기는 것인데, 감독이 무엇을 찍으려 하고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의문이 많아서 상당히 어려웠죠.
-윤재호 감독은 선생님의 어떤 모습을 담고 싶다고 했나요.
=그런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요. 연기자라고 하면 감독의 요청대로 연기를 하는데. 말이 많은 사람이면 그 근사치로 가야 하고, 근심이 있는 사람이면 그 근사치로 가는 건데, 그런 말씀이 없으시니까. 촬영이 진행되면서는 눈치를 챘죠. 가만히 허공을 보는 것에도 여러 가지 의미가 있잖아요. 감독이 어떤 방향으로 그걸 읽을까 의문이 들고, 그래서 상당히 고민을 했죠. 그런데 코로나19로 상황이 녹록지 않았음에도 스탭들이 적극적으로 할 일을 다 하고 집중해주니까 고마움에 마음이 많이 들떴죠. 젊은 분들이 나에 대해 이렇게 관심을 갖는구나. 아주 큰 걸 얻은 거죠. 너무 고마웠어요. 조금씩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많이 보여주고 싶다, 나에 대한 것을 솔직하게 기탄없이 풀어놔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생님의 가족들도 영화에 출연하잖아요. 다큐멘터리 촬영에 대한 가족들의 반응은 어땠어요.
=가족들한테 다큐멘터리 찍는다는 말을 일절 안 했는데, 스탭들이 골고루 가족들을 찾아가서 인터뷰도 하고 촬영도 한 거예요. 나중에 나는 깜짝 놀랐어요.
-가족들이 출연한다는 사실을 완성된 영화를 보고 아신 건가요.
=전연 몰랐죠. 내가 사는 곳이 아파트 1동이라고 하면 막내딸이 3동에 사는데, 서로 오가면서도 걔도 말이 없고 나도 말이 없어서 몰랐어요. 그런데 화면을 보니까 나오는 거예요. 또 내 아픈 사정을 사람들이 다 압니다만, 하나밖에 없던 아들 녀석을 잃고 몸부림치는 모습이 가족들한테도 왜 안 보였겠어요. 가족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니까. 정말 그 순간엔 어찌할 바를 몰랐죠. 또 하나 놀란 건, 한번은 감독이 노래를 하나 들어보십시오 그랬어요. 젊은 사람 노래인데 이건 누구 노래냐 하니까 잃어버린 내 아들 녀석의 노래라 그래. 그때 정말 심장의 고동이…. 옆에서 작가가 내 손을 잡아줬어요. 만약 그런 이야기를 미리 주고받고 알았으면 그런 내 모습이 안 나왔을 수도 있겠죠. 하나 하나의 동작이. 방송이 직업인 사람이라도 카메라를 들이대면 늘 떨려요. 우리는 온에어 들어오면 기침도 제대로 못하는데. 이건 몇십년을 선고받는 형보다도 더 아프게 느껴지더라고.
-먼저 떠난 아드님의 노래를 들었을 때 말씀이시죠.
=정말 뛰어나가고 싶었어요. 죄책감을 한없이 느꼈죠. 음악이 하고 싶다는 아들을 그런 거 하지 말라고 말렸는데 아들의 노래를 이제야 들었으니. 결국 오토바이를 타다가 사고가 났는데, 그때가 내가 교통방송에서 라디오(<가로수를 누비며>)를 할 때였거든요. 방송 첫인사로“안녕하셨습니까. 오늘도 무사고 운전합시다” 하고 매일 판을 젖히는데, 그런 일을 당했기 때문에 힘들었죠. 영화를 통해서 몰랐던 아들의 이야기를 알게 됐어요. 엄마한테 졸라서 오토바이를 샀던 것도 내가 몰랐던 거고. 자식 둔 부모들은 자식이 하고자 하는 바, 원하는 바를 구체적으로 알아야 되지 않겠나, 그것도 부모의 책임이다 싶어요. 나 역시 예술 계통 간다고 아버님한테 야단맞고 쫓겨났던 사람이고.
-살면서 여러 아픈 이별을 경험하셨지만 직업이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희극인이기 때문에 아픈 감정을 제때 표현하기 힘든 경우도 많으셨을 것 같아요. 희극인으로서의 고충들이 있으셨죠.
=그런 경험이 두번 있었어요, 하나는 교통방송 프로그램을 하다가 아들의 사고가 생겼을 때였는데. 우연치 않게 교통사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내 말이 자꾸 줄어들었죠. 하지만 그런 일을 넘어갈 때 늘 내 곁에 있어주었던 관중, 그들을 난 금쪽같이 생각하죠. 나의 사연을 알고 내 프로그램에 와서 동해주는 분들, 박수 쳐주는 분들이 내 재산이다, 그래서 <전국노래자랑>은 내 평생의 교과서다 하고 삽니다. 배울 게 너무 많아요. 여러분들이 없으면 내가 없다 생각하면서 이겨나갔죠. 세월호 참사 때도 그랬어요. 당시 8주 결방했거든요. 그러고 밀양에서 방송을 재개하는데, 밀양 남천강 줄기 따라 끝도 없이 사람들이 왔어요. 두달 만에 방송하는 거니까. 그때 처음 시작을 어떻게 하느냐. 나라에 큰 슬픔이 있었으니. 자식 잃어버린 사람들의 슬픔은 더 할 거 아니에요. 그런데 “전국~ 노래자랑” 했을 때 때가 어느 땐데 큰소리치냐면서 가라고 하면 큰일나거든요. 그래서 내가 아이 잃고 느꼈던 마음으로 위로의 말을 건네면서 “어떡할까요, 여러분들 다 아픈 마음 가지고 있는데 이걸 할까요 말까요?” 그랬더니 “하십시오” 하는 답변이 돌아왔어요.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았죠. 그런 어려운 고비를 두어번 넘기면서 다시 용기를 가졌죠.
-코로나19로 인한 결방이 끝나고 다시 <전국노래자랑> 무대에 서면 어떤말로 관중에게 첫인사를 건네고 싶으세요.
=여기 계신 분들이 모두 코로나 내쫓은 분들이다, 해야죠. 허허허. 지금 이 시대 사는 분들이 공로자예요. 방역수칙 잘 지키고, 남을 나같이 귀하게 알고, 그랬기 때문에 우리가 일상으로 넘어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또한 한국전쟁 때 북에서 남으로 피난 온 실향민이기도 합니다. 최근 영화 소개 방송에 출연해 윤제균 감독의 <국제시장>을 소개하기도 하셨어요.
=흥남부두 장면, 주인공이 가족과 이별하는 장면은 내가 겪은 현실하고 똑같은 거죠. 내가 생이별할 때, 어머니와 누이동생이 부둣가에서“조심해라” 하고 손 흔들어주었으니까요. 극장에서 <국제시장>을 보는데, 모두 내 일 같아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나중에 보니까 내손에 흥건히 젖은 손수건이 세개가 있어요. 너무 울어서 극장의 아주머니들이 손수건을 쥐어줬던 거예요.
-고향인 황해도 재령에서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해보는 게 소원이라고 여러 번 말씀해오셨는데, 만약 그 꿈이 실현되면 어떨 것 같으세요.
=죄인이 죄 짓고 와서 용서해달라는 기분이겠죠, 뭐. 그런데 아마 내가 자랐을 때와는 분위기가 너무 다를 것 같습니다. 내가 북한에 두번 갔다왔어요. 금강산 관광단으로 한번, 평양 모란봉에서 <전국노래자랑> 진행할 때 한번. 평양에 갔을 때 안내원한테 여기까지 왔는데 (고향에도) 데려다주면 좋지 않냐 했더니, 거기 가봐도 흐르는 강이나 흐를까, 솟아 있는 산이나 그대로 있을까 다 변해서 모르실 거라 그래.아마 몰라볼 정도로 너무나 달라졌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그래도 거기 사는 사람들 모아놓고 (<전국노래자랑>) 한번 해야죠.
-<전국노래자랑>은 선생님께 어떤 의미를 가지는 방송인가요.
=내가 제일 오래 진행을 하게 된 이유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여긴 남녀노소는 물론이고 상하 구별도 없고 빈부 차이도 없고, 똑같은 자격을 가지고서 놀아요. 직업도 천차만별이죠. 별 사람 다 나와요. 거기서 배우는 게 너무 많아요. 겪지 못한 체험들을 많이 하기 때문에 이게 공부다, 생각하고 하기 때문에 사람들도 관심이 큰가봐요.
-볼 때마다 놀라운 건, 말씀하신 대로 다양한 배경을 가진 온갖 사람들과허물없이 친구가 되어 소통하신다는 겁니다.
=거기 나온 최연소 참가자가 만 3살, 최고령 참가자가 115살이었어요. 무대에선 1세기의 시간이 하나가 되는 거죠. 100년이 넘게 나이 차이나는 분들을 맞이하는데, 내가 늘 배워요. 만 3살짜리 아이가 유학 가있는 아빠한테 “아빠 보고 싶어 빨리 와. 아빠 아프지 마” 하는데 눈물이 안 날 수 없죠.
-교통방송의 효시인 당시 동양방송에서 라디오 프로그램 <가로수를 누비며>도 17년간 진행하셨잖아요. 한번 인연 맺으면 예사로 10년을 넘기며장수 진행을 하십니다.
=이게 다시 나한테 돌아오기 힘든 기회이고, 나한테 왔다는 건 인연을 소중히 맺어라 하는 거라 생각하고 그 프로그램이 의미하는 속으로 빠지는 거죠. 교통 프로그램이면 교통 속으로 빠져서 진행합니다.그때 당시 운전하는 사람 중에 나 모르는 사람이 없었지. 교통방송을 송해 방송이라 할 정도였으니까. 노래 방송할 때는 사람들의 성격도 파악해야 하고 지역도 파악해야 되잖아요. 그런 데 빠져서 진행하니까 공감해주는 사람이 많아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건 천직이다 생각하는 거죠. 나에게 주어진 천직이다. 사람들이 무슨 방법이 있냐고묻는데, 파고드는 것밖에 없어요. 그 프로그램이 의미하는 대로.
-1960, 1970년대에는 영화에도 많이 출연하셨습니다.
=단역들을 한 거죠. 다 단역이었지. 구봉서씨, 배삼룡씨, 서영춘씨하고 한 것도 있고. 박시명씨하고 둘이서 콤비로 희극할 때도 같이 영화에 나오고 했지. 희극인으로서 연기를 잘했던 건 구봉서씨죠. 구봉서씨가 주연한 <수학여행>이라는 영화는 대종상에서 상도 탔죠.
-기억에 남는 영화 출연작이 있으세요.
=영화는 그렇게 기억에 남는 게 없습니다만. 이만희 감독님이 만든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라는 영화에 제가 보초 서는 단역으로 나왔어요. 이만희 감독과는 군대에 같이 있었어요. 같은 통신병으로. 그래서 아는 입장이었고, 그게 좀 특이한 기억입니다.
-다시 <송해 1927> 이야기로 돌아가, 영화가 끝나면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에게 바칩니다”라는 자막이 뜹니다. 스스로는 어떤 자식이었고, 어떤 아버지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버지한테는 불효를 한 자식이죠. 아버지가 말리는데도 예술학교에진학했고, 장난도 많이 쳤고, 골목대장질도 많이 했고. 부모들은 그런거 싫어하지 않습니까. 그런 데다 아들 녀석까지도 일찍 떠나보냈으니, 죄인에 또 죄인입니다 하고 사죄를 드려야죠. 그런 게 다 교훈이돼서 지금 있는 자식들에겐 어떻게 하면 잘할까 하고 애를 씁니다.-이 영화를 꼭 봐줬으면 하는 분들이 계신가요.
=이 세상에 자식 가진 부모님들은 꼭 좀 봐주셨으면 하고, 하고자 하는 일이 있는데 부모님 때문에 제동이 걸린다 하는 자녀들이 있으면 동석해서 보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