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 드라이버>(2017) 이후 4년 만의 컴백이다. <새벽의 황당한 저주> (2004), <뜨거운 녀석들>(2007), <스콧 필그림 vs. 더 월드>(2010), <베이비 드라이버> 등 재기 넘치는 장르영화를 연출해온 영국 감독 에드거 라이트의 신작 <라스트 나잇 인 소호>는 각기 다른 시간대를 살아가는 두 여성의 이야기를 펼쳐낸 호러영화다. 패션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대도시 런던에 온 엘리(토마신 맥켄지)는 매일밤 꿈속에서 1960년대 소호에서 활동하는 가수 샌디(애니아 테일러조이)를 만난다. 샌디처럼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삶을 살아가려는 엘리의 의욕은 샌디가 누군가로부터 죽임을 당하면서 무너진다. 에드거 라이트 감독의 근사하면서도 어두운 이 영화는 화려하지만 어두운 맨살을 드러내는 1960년대 소호에 바치는 애가이자 런던에 처음 당도해 좀처럼 적응하지 못하다가 샌디의 당당한 삶을 동경하는 여성 엘리의 성장담이다. 12월1일 국내 개봉을 앞두고 줌을 통해 만난 에드거 라이트 감독과의 대화를 전한다.
이 영화는 10년 전부터 구상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떤 계기로 출발하게 된 이야기인지 궁금하다.
가벼운 영감들이 많았지만, 이야기의 출발점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1960년대에 대한 궁금증. 부모님이 모은 LP 레코드 중에 1960년대 앨범들이 많다. 큰형이 태어난 뒤 앨범 모으는 걸 그만두셨는데 부모님의 컬렉션 덕분에 어렸을 때 1960년대 음악을 엄청 들었다. 1974년생인데 경험해보지 못한 그 시대에 대한 향수나 호기심이 많았다.
또 하나는 무엇인가.
런던으로 이사한 일. 풀(잉글랜드 남동부 도싯주 연안에 위치한 작은 도시) 출신인데 런던으로 이사한 뒤로 소호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소호는 런던의 대표적인 유흥가이자 영화와 TV 산업의 중심지이자 범죄조직과 성 산업이 연결된 어둠의 지역이다. 그러한 복합적인 면모 때문에 소호는 매력적이고, 불완전하며, 매우 독특한 공간이라고 느꼈다. 27년 동안 런던에서 살고 있는데 이 영화를 통해 내가 잘 알고 있는 런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엘리가 패션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런던으로 상경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당신이 런던에 처음 와서 느낀 감정들이 엘리를 만드는 데 반영됐을 것 같다.
내 경험의 일부를 엘리에게 투영했을 거다. 하지만 나뿐만 아니라 어머니나 형수도 엘리를 구축하는 데 많은 영감을 주었다. 특히 형수는 시골에서 큰 도시로 이사했고 패션 디자인 일을 했으니까. 엘리는 엄마의 엄마, 그 엄마의 엄마 등 많은 여성들이 충분히 공감할 만한 인물이다. 이 영화가 그들 여성들의 자서전은 아니지만 자전적인 부분들이 캐릭터에 녹아들었다고 생각한다. 엘리가 대도시에서 처음 겪는 사연의 대부분은 내가 보고, 듣고, 느낀 이야기니까.
해머 스튜디오(1935년 설립된 영국 호러영화 제작사. 공포, SF, 범죄, 모험 등 B급 장르영화를 주로 제작해왔고, 독특한 영화적 스타일과 저예산 제작 방식인 해머 스타일을 선보이면서 전세계 많은 추종자를 거느렸다.-편집자)가 제작한 호러영화에 출연한 여배우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책 <Hammer Glamour: Classic Images From the Archive of Hammer Films>도 시나리오를 구상하는 과정에서 읽었다고 들었는데, 그 책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은 무엇인가.
해머가 제작한 호러영화를 무척 좋아한다. 그 시대의 클래식 호러였으니까. 그렇다고 이 영화를 만드는 데 특별한 영향을 받은 건 없다. 오히려 마이클 파월 감독의 <저주받은 카메라>(1960)나 바실 디어든 감독의 <사파이어>(1959) 같은 1960년대 영화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았다. 어쨌거나 그 책은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았다. 당시 수많은 여배우가 사회적 부조리 때문에 비극적인 삶을 살다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돼 깜짝 놀랐다. 쇼비즈니스 산업의 불평등과 그로 인해 생긴 비극 때문에 그들의 인생과 경력은 짧았다. 그들의 사연은 슬프고 애잔했다. 그러한 감정이 <라스트 나잇 인 소호>의 주인공 샌디를 만드는 데 많은 영감을 주었다. 쇼비즈니스 산업에서 샌디와 같은 일을 겪은 여성이 많을 것이다.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만.
이 영화는 소호라는 공간에 대한 애가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영화 속 소호는 무척 화려하게 등장하지만 서사가 전개되면서 어두운 맨살이 드러난다. 이러한 변화를 표현하기 위해 신경 쓴 것은 무엇인가.
정말 중요한 건 지각과 현실의 차이다. 많은 사람이 과거를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포장하곤 한다. 과거의 나쁜 점을 잊은 채 말이다. 내가 1960년대를 살아본 적이 없음에도 그 시대의 향수를 느낀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향수는 일탈이 아닌 퇴행이라는 거다. 지금 살고 있는 시대에서 후퇴하는 것. 왜 나는 현재에 집착하며 살지 않는 걸까. 과거의 특정한 시간으로 돌아가면 좋은 것만 경험하고, 나쁜 것은 겪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지금 발생하는 나쁜 일들은 과거에도 일어났다. 과거를 낭만적으로만 포장하는 건 위험한 일이다.
엘리와 샌디, 두 여성주인공을 누가 연기할 것인지가 중요했을 것 같다. 토마신 맥켄지와 애니아 테일러조이의 어떤 면모에서 두 캐릭터에 각각 적합하다고 판단했나.
엘리는 관객을 1960년대 런던의 화려함 속으로, 그리고 더 어둡고 무서운 세계 속으로 인도하는 배우가 맡아야 했다. 니라 박 프로듀서가 토마신 맥켄지를 추천해주었는데 그녀가 출연했던 <흔적 없는 삶>(감독 데브라 그래닉)을 보고 정말 환상적이라고 생각했다. 토마신 맥켄지는 그 영화에서 너무 사실적이어서 배우가 연기를 하는 거라는 걸 잊을 정도였다. 그뿐만 아니라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세상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다. 그녀라면 관객이 엘리와 함께 모험을 떠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시나리오가 나오기 전부터 염두에 둔 배우는 애니아 테일러조이였다. 2015년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는데 그때 그녀가 출연한 영화 <더 위치>를 보았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애니아 테일러조이가 다양한 역할을 연기하고, 또 대중적으로 인지도를 높여가는 걸 보면서 샌디 역에 맞겠다고 생각했다.
현실의 엘리가 1960년 소호로 넘어가는 시퀀스는 비현실적인데도 마법처럼 연출했다.
처음에는 엘리가 1960년대로 돌아가는 설정이 꿈인지, 다른 사람의 기억 속인지 불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엘리가 자신의 꿈에서 봤던 1960년대 소호의 공간을 가면서 자신에게 벌어진 일이 현실임을 알게 되는 거다. 보통 사람은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하지 않나. 다른 사람이 되어 내 행동을 지켜본다거나 다른 사람과 몸이 바뀐다거나. 이처럼 1960년 소호에서 엘리가 샌디를 보면서 자신과 동일한 사람으로 착각하는 감정을 표현하려고 했다.
이 영화는 호러 장르를 외피로 두른 한 여성의 성장 이야기이기도 하다. 엘리가 샌디의 사연에 깊숙이 들어가고 샌디에게 매료되면서 엘리의 외양(헤어스타일, 화장, 의상)이 서서히 변화하는 모습이 흥미진진했다.
엘리는 런던에 처음 왔을 때 자신감이 넘치지만 그곳에서 사람들을 만나면서 위축되고, 다른 사람이 자신보다 더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감정을 느끼면서 금세 대도시에 적응한다. 1960년대로 넘어가 샌디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고 그를 닮아가려고 노력하지 않나. 영화는 반전이 있는 방식을 통해 엘리를 묘사하지만 기본적으로 사람은 낯선 환경에 놓여 있을 때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전세계적으로 디지털로 영화를 찍는 시대에 보기 드물게 35mm 필름으로 촬영했다. 이야기의 어떤 점 때문에 필름이 필요했나.
이 영화는 대부분 장면을 35mm 필름으로 찍었다. 실제 소호에서 로케이션 촬영한 장면 중에서 밤 신만 디지털로 촬영했다. 유동 인구가 많은 그곳에서 조명을 세팅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웠고, 그러다보니 광량이 부족해 디지털 말고는 답이 없었다. 무엇보다 필름의 룩을 좋아한다. 필름은 찍을 수 있는 양이 한정되어 있어 좀더 정확하게 찍으려고 노력하고 절제하게 된다. 내 영화 대부분을 필름으로 찍을 수 있어서 좋았고, 앞으로도 계속 필름으로 작업하고 싶다.
이 영화는 제목부터 록 밴드 데이브 디, 도지, 비키, 믹 앤드 티치의 노래에서 따올 만큼 음악이 중요하다. 음악이 서사의 처음부터 끝까지 끊이질 않고 흐르는데 영화음악의 주요 컨셉이 무엇이었나.
시나리오를 쓸 때 직접 모은 노래들을 들으며 작업했다. 배우들이 완성된 시나리오를 읽을 때 함께 들을 음악 리스트도 작성했다. 전작 <베이비 드라이버>를 함께 작업한 작곡가 스티븐 프라이스에게 주문한 건 크게 두 가지였다. 음악이 현재와 1960년대, 두 시대적 배경을 음악적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하고, 엘리와 샌디 각기 다른 젊은 여성의 이야기를 한데 묶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엘리가 사는 런던 하숙집 주인을 연기한 배우 다이애나 리그(<007 여왕폐하 대작전>에서 트레이시 디 비첸조 역할을 연기했고, <왕좌의 게임>에서 올레나 타이렐 역을 맡았다.-편집자)를 추모하는 자막이 뜨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다이애나 리그는 이 영화를 촬영한 뒤 세상을 떠났는데 그녀와 함께 일하면서 가장 기억나는 일화가 무엇인가.
다이앤(다이애나 리그의 애칭)을 알고 함께 일한 것은 이 영화뿐만 아니라 내 인생에서 하이라이트였다. 그녀의 마지막 해를 함께 보냈고, 죽기 몇주 전에도 만났다. 몸이 아팠는데도 그녀는 여전히 유머러스했고, 강렬했으며, 굉장했다. 모든 면에서 눈부신 배우였다. 그와 함께 일할 수 있어 영광이었고, 좋았다.
당신은 시네필로도 유명하다. 최근 본 한국영화 중에서 인상적인 작품은 무엇이었나.
한국 감독들과 친분이 많아 이제는 한편을 꼽는 게 쉽지 않다. (웃음) 코로나19 때문에 밖에 나갈 수 없는 기간 동안 여자 친구와 함께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를 봤다. 진짜 무서운 영화였는데 여자 친구가 굉장히 집중하고 집요하게 감상하더라. 또 연쇄살인범을 쫓는 영화도 봤는데….
나홍진 감독의 <추격자>?
맞다. 그 영화뿐만 아니라 연쇄살인을 소재로 한 한국영화 몇편을 보았다. 최근에 다시 본 영화는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 봉준호 감독의 영화 중에서 가장 먼저 접했던 영화인데 최근 봉 감독과의 Q&A 세션이 있어서 다시 보았다. 아마도 살인자가 잡혀서 감옥에 있는 첫 영화일 것이다. 봉준호 감독으로부터 영화 속 살인자가 체포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정말 혼란스러웠다.
<라스트 나잇 인 소호>를 끝낸 뒤 미국 밴드 스파크스 형제를 그려낸 다큐멘터리 <더 스파크스 브라더스>도 완성했는데.
처음으로 연출한 장편다큐멘터리인데 한국에서 빨리 공개되길 바란다. 그때 더 많은 얘기를 나누자.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