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런트 라인]
'나는 이곳에서 영원히 일어나고 싶지 않다'
2021-12-15
글 : 송경원
<프렌치 디스패치>와 <퍼스트 카우>, 오프닝과 엔딩 사이 '영화'의 시간

[송경원 기자의 프런트 라인]

끝자락에 선 기분이다. 매체가, 시대가, 삶이 바뀌고 있다. 저항하다가 사라질 수도 있고, 순응하며 살아질 수도 있을 것이다. 혼란스럽고 두려운 와중에 몇편의 시가 나에게 왔다. 기꺼이 길을 잃을 각오로 몇편의 영화들을 더듬고 나니, 무릎 아래가 녹아 없어지는 기분이다. 이대로 주저앉아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이쯤에서 끝을 내야겠다. 여기가 끝이다. 그렇게 다짐하면서 시작되는 영화들이 있다. 현실과 이야기를 구분짓는 건 오로지 시작과 끝, 두개의 점이다. 연속된 삶의 어느 지점에 두개의 점을 찍을 때 비로소 이야기가 탄생한다. 현실을 이야기의 형태로 잘라낸다고 표현해도 좋겠다. 시작과 끝에 의미를 부여하고픈 창작자의 의지로 성립되는 또 하나의 현실. 그러므로 오프닝과 엔딩은 대체로 세계의 윤곽을 결정짓는 거대한 창문이다. 때론 창문 너머 비치는 세계보다 창틀 자체에 시선을 뺏기기도 하고, 창틀 너머 마주하는 첫 풍경이 모든 걸 결정짓기도 한다.

웨스 앤더슨의 <프렌치 디스패치>를 보며 새삼 오프닝의 매혹에 대해 생각했다. <프렌치 디스패치>는 잡지 편집장의 죽음으로 문을 연다. 편집장의 유언에 따라 잡지사는 문을 닫기로 예정되어 있다. 하나의 세계, 한 시절, 어떤 시대가 종언을 고하는 풍경. 다만 웨스 앤더슨은 거기서 과거를 회상하는 대신 마지막 호가 어떤 내용으로 채워져 있는지 차례로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엔딩에서 기자들은 마지막 호에 실릴 편집장 부고 기사를 쓰기 위해 한자리에 모인다. 세계(잡지)가 끝났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건만 이 이야기는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어째서일까. 이건 흘러가버릴 과거일까. 아니면 끝에서 다시 시작되는 이야기일까. 중요한 건 여기가 길의 끝자락인지 아닌지가 아니다. 발 디딘 자리에서 고개 들어 어디를 볼 것인지에 따라 세계의 풍경은 바뀐다. 문득 오프닝과 엔딩만을 놓고 영화의 풍경을 말해보고 싶어졌다. 이것은 끝의 시작, 아니 시작의 끝에서 내뱉는 사적 고백이다. 영화의 시작점이자 이야기의 끝자락, (신경림 시인의 <내가 살고 싶은 땅에 가서>의 시구를 빌리자면) ‘이쯤에서 길을 잃어야겠다’.

사실보다 진실을 추구하는 취향의 고백

한권의 잡지처럼 구성된 <프렌치 디스패치>는 4명의 기자가 쓴 4편의 기사가 옴니버스 형식으로 붙어 있다. 각기 다른 개성으로 채색된 연출(여기서는 문체라고 해도 좋겠다)로 구성된 4개의 조각난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주는 건 앞뒤로 붙어 있는 편집장의 부고 기사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아서 하위처 주니어(빌 머리)의 에피소드는 이 영화의 모든 것이라 봐도 무방하다. 우열의 문제는 아니지만 5분 남짓한 오프닝은 나머지 모든 상영시간을 압도하고도 남을 울림이 있다. 아서의 부고 기사를 중심으로 한 오프닝과 엔딩의 무게는 여타 에피소드들의 총합을 초과한다. 새저렉(오언 윌슨)의 입체적이면서도 현란한 단신, 베렌슨(틸다 스윈튼)의 능청스럽고도 우아한 에세이, 크레멘츠(프랜시스 맥도먼드)의 건조하면서도 들끓는 취재, 로벅 라이트(제프리 라이트)가 한땀 한땀 구성해낸 감각적인 보도는 모두 편집장 아서의 의지 위에 성립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아서(혹은 아서의 죽음)는 ‘프렌치 디스패치’를 하나의 이야기로 성립시키는 프레임이다.

잡지란 무엇인가. 취향의 모음이다. 각기 다른 취향을 그저 한권에 모아둔 게 잡지의 전부다. 간단해 보이지만 사실 이게 쉬운 일이 아니다. 서로 반발하고 충돌하는 것들이 한권의 책, 하나의 장소에서 공존하기 위해서는 간격의 조정이 필요하다. 편집장은 바로 이러한 공존 방식을 고민하고 틀을 제시하는 사람이다. 오프닝 시퀀스는 잡지 ‘프렌치 디스패치’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설명하며 문을 연다. 윤전기에 종이가 인쇄되고 제일 처음 찍히는 1면은 편집장 아서 하위처 주니어의 부고 기사다. 여기서 시점은 마지막 호가 한창 만들어지고 있던 과거로 잠시 돌아간다. ‘프렌치 디스패치’의 건물 전경이 보이고 1층의 카페에서 기자들이 주문한 갖가지 음료들이 한 쟁반 위에 놓인다. 아서가 ‘프렌치 디스패치’를 설립하기까지의 과정을 요약 정리하는 내레이션이 깔리는 가운데 커피, 샴페인, 칵테일, 아이스크림 등 각양각색의 음료가 세팅된다. 잡지의 본질이 담긴 한컷. 이어 바텐더가 ‘프렌치 디스패치’ 건물을 올라가는 장면은 잡지 편집의 물리적인 구성을 형상화한다. 조잡하게 얽히고설킨 미로처럼 보이지만 한 발짝 떨어져 보면 기하학적인 질서 위에 뭉쳐 있는 집합체. 혼란스럽기에 더 구미가 당기는 취향의 공존.

(아마도 미래 시점에 완성된 부고 기사를 읽어 내려가는) 내레이터는 아서가 필자들에겐 한없이 너그럽고 직원들에겐 엄격하다고 평하지만 화면이 보여주는 건 정반대다. 30년 넘게 원고 한편 제대로 탈고하지 않는 직원이나 문법과 교열의 천재라는 직원 모두 편집장과 이미 한몸이다. 머리가 자신의 손발의 무능을 탓하지 않는 것처럼 거기에 판단이나 평가는 없다. 그들은 오직 기자들을 유연하게 상대하고 잡지가 세상에 빛을 볼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일 뿐이다. 아서의 정책은 단순명료하다. “나는 아무도 죽이지 않아.” 할당된 페이지가 넘쳐도 글이 마음에 든다면 어떻게든 지면을 만들어주는 태도는 합리와 이성보다는 취향과 애정의 영역이다. 캔자스 자본가의 아들이었던 아서는 프랑스로 건너가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외부의 압력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액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 수 있으니까. 사랑하는 것들을 지켜주고 책임지려는 마음, 그러니까 취향에는 책임이 따른다. 한 잡지 안에서 이토록 다른 색깔이 공존할 수 있는 건 자신들의 글(취향)을 믿고 보호해주는 아서라는 우산을 지지하기 때문이다. 그 마음을 공유할 때 비로소 타인의 취향이 발견되기 시작한다. 잡지의 진정한 매력은 여기에 있다. 타인의 취향과 색깔을 한자리에 펼쳐놓는 만남의 장. 세계는 그런 식으로 확장되어간다.

‘프렌치 디스패치’의 미래는 궁금해할 필요도 없다. 아서의 유언장엔 “인쇄기는 해체해서 녹이고, 건물은 모두 비운 후 매도하라”라고 적혀 있다. 그는 세계의 종언을 고하고 떠났다. 왜? 자신의 죽음과 함께 잡지의 본질이 흐려질까 걱정했던 걸까. 끝까지 책임지지 못할 바엔 깔끔하게 끝내고 간다는 마음이었을까. 이미 죽은 사람의 마음 같은 거 알게 뭐람. 영화는 아서의 마음을 추측하거나 기억을 복원시키는 짓 따윈 하지 않는다. 그저 각자의 반응을 각자의 방식으로 남길 뿐이다. 엔딩에서 기자들은 각자 기억하는 편집장 아서를 쓰기 위해 자리를 떠난다. 이것은 아서라는 인물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의 기록이 아니다. 아서라는 인물에 대해 각자가 느낀 진실의 고백이다. <프렌치 디스패치>는 이미 끝난 세계에 대해 말한다. 더이상 ‘프렌치 디스패치’는 없을 거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또 다른 잡지가 나온다 해도 그건 ‘프렌치 디스패치’와는 다르다. 설사 그렇다 해도 무슨 상관인가. 우리가 목격한 ‘프렌치 디스패치’의 진실들, 타인의 취향을 향한 모험의 가치는 변함이 없다. 웨스 앤더슨이 굳이 에피소드마다 다른 방식으로 기자 각자의 취향(이라고 쓰고 본인이 하고 싶었던 것들이라고 읽는)을 콜라주하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말하자면 아서는 20세기의 돈키호테다. 운 좋게도 그는 풍차에 패배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시대가 바뀌고 잡지의 쓸모와 효용이 사라지는 날이 올 수도 있다. 시대의 변화라는 거대한 물결로 밀려나는 중인 모든 올드 미디어는 마찬가지의 운명에 놓여 있다. 예정된 소멸 앞에서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웨스 앤더슨(혹은 아서)의 조언은 단호하다. ‘울지 말 것.’ 사라져가는 것을 연민할 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낫다. ‘프렌치 디스패치’ 마지막 호를 발간하며 부고 기사를 쓰러 간 기자들처럼. 영화가 영화여야 하는 이유 역시 이성과 합리의 영역에 있지 않다. 무용(無用)한 것들로 가득 찬 영화의 생명은 오직 취향의 고백으로 시간의 흐름에 저항하고 버텨낸다. 산초에게 잔혹한 사실을 들은 돈키호테는 말한다. 진실이 사실들에게 살해당하고 있다고. 그럴지언정, 아니 그렇기 때문에 각자의 진실, 나의 취향, 내가 믿고 싶고 사랑하는 것을 지키려는 이들의 (남 일 같지 않은) 고백은 무모하고 위태롭고 고집스러울수록 어여쁘다.

끝의 풍경을 마주하는 두 가지 진술

끝의 풍경 위에서 현재를 지속시키는 <프렌치 디스패치>의 오프닝과 엔딩을 보며 두편의 영화가 떠올랐다. 나는 <프렌치 디스패치>에서 <홀리 모터스>(2012)의 영혼을 본다. 아서와 잡지가 한몸이듯 레오스 카락스는 영화(혹은 극장)와 하나의 육체로 얽혀 있다.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오프닝은 영화의 역사(혹은 미래)가 투영된 상상의 무대에서 출발한다. 흑백의 활동사진을 관람하는 관객은 모두 잠들어 있다. 레오스 카락스는 침대에서 일어나 느린 걸음으로 밖으로 나간다. 몇개의 문과 프레임을 통과한 그는 극장 객석의 뒤편에 다다른다. 관객은 여전히 죽은 듯 잠들어 있고, 고요한 극장에는 늙은 개 한 마리가 어슬렁거린다. 마치 악몽 속에 갇힌 것 같지만 레오스 카락스는 이곳을 떠날 수 없다. 평생을 밤의 어둠을 마주하며 살아왔으므로.

신비한 분위기로 뒤덮인 <홀리 모터스>의 오프닝 역시 뒤에 이어질 9개의 에피소드를 압도한다. 세세하고 정확한 해석은 애초에 불가능하지만 몇 가지 진술은 가능하다. 13년 만에 스크린으로 돌아온 레오스 카락스는 두렵다. “너의 벌은 네가 되는 거야. 평생 너 자신으로 사는 것.” 리무진을 타고 내리며 9개의 삶을 연기하는 오스카(드니 라방)가 내뱉는 대사는 온전히 레오스 카락스를 향한다. 레오스 카락스가 믿었고 사랑했던 초기영화, 활동사진의 움직임은 이미 스크린 위에서 사라졌다. 그럼에도 카락스는 탈출할 수 없다. 애초에 그가 머물 수 있도록 허락된 곳은 극장(영화)뿐이다. 때문에 레오스 카락스는 오늘도 아름다운 악몽 속에서 움직임의 아름다움을 스크린 위에 되살려낸다.

오스카가 9개의 배역을 소화하며 어떤 연기를 하는지, 어디까지가 연기이고 어디서부터가 진짜인지는 중요치 않다. 오히려 <홀리 모터스>는 사실과 재현 사이 그어진 경계를 부숴나가는 영화다. 레오스 카락스가 휘두르는 망치의 이름은 당연히 움직임 그 자체다. 드니 라방의 육체, 카메라의 동작, 모든 움직이는 이미지가 지금 당신을 현재에 붙들어 맨다. 여기에 과거를 재현한 ‘이야기’는 없다. 존재하는 건 오직 (영화라는) 움직임과 관객. 그리고 어둠 속에서 가만히 숨죽인 채 이 모든 상황을 관조하고 있는 감독의 희망이다. 마지막 장면. 불 꺼진 차고, 리무진(이라 불리는 영화 기계)들은 말한다. 우리도 곧 폐차장으로 밀려날 텐데./ 쓰레기라고?/ 인간들은 큰 기계를 원치 않아./ 가동 자체를 원하지 않아./ 아멘. 레오스 카락스가 사랑했던 활동사진(무빙 픽처)의 마력은 이제 사라졌다. 비슷하다고 믿어왔던 영화들도 점점 사라질 것이다. 주차장에서 폐차를 기다리는 리무진들처럼 움직임은 결국 정지할 운명이다. 명백한 진실. 아마도 관객은 <홀리 모터스>의 오프닝처럼 긴 잠에 빠진 채 눈을 감고 있겠지. 레오스 카락스는 그 사실을 부정하고 거부하지 않는다. <프렌치 디스패치>의 아서가 그랬던 것처럼 눈물도 흘리지 않는다. 그런들 어떠한가. 모두가 눈을 감은 극장에서도 당신은 눈을 뜰 수 있다. 당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어쩌면 시대나 흐름 따윈 중요치 않을지도 모르겠다. 당신이 원하는 한 이 순간들은 영원히 현재가 될 수 있다. 레오스 카락스는 악몽 속에 갇힐지언정 성스러운 기계들을 버리지 않는다. 취향을 지킨다는 건 그런 것이다.

한편 켈리 라이카트의 <퍼스트 카우>는 또 다른 방식으로 웨스 앤더슨이 보여준 태도에 접속한다.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오프닝 시퀀스가 의미심장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퍼스트 카우>는 좀더 각별한 면이 있다. 강물 위를 도도히 흐르는 거대한 화물선의 움직임은 영화가 스크린에 새길 수 있는 물리적인 운동의 총합이다. 그 유장한 속도에 세월, 시간, 운명 등 다양한 이름표를 붙일 수 있을 것이다. <퍼스트 카우>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시간의 간격을 지워버린다. 숲속에서 뭔가를 찾고 있는 여자와 개의 모습을 찬찬히 따라가던 카메라는 조신하게 누워 있는 2구의 해골을 발견한다. 이윽고 라이카트는 아무런 설명 없이 200년의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미국 서부개척시대로 관객을 데려간다. 사냥꾼들의 식량 담당인 쿠키(존 마가로)와 중국에서 건너온 킹루(오리온 리)의 운명을 이미 알고 있다. 이들은 언젠가 한자리에서 나란히 누워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예정된 죽음에 대한 긴장감 대신 얼어붙은 대지를 녹이는 한줌 햇살 같은 미약한 연대의 분위기로 감싸여져 있다. 야만과 폭력의 시대 한가운데에서 서로를 향한 선의를 제공하는 두 사람의 관계는 역사나 미디어가 기록하지 않은 진실들을 복구시킨다. 거기에도 사람이 살았고 생활의 질척이고 지루한 시간들로 가득 차 있다는 진실. 미디어가 만들어낸 폭력과 극적인 사건 이외에도 공기처럼 스며드는 종류의 우정이 존재했다는 진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에게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진실. 한줌의 연대가 우리 삶을 얼마나 자유롭고 아름답게 하는지에 대한 고백은 거꾸로 시간을 건너뛰어 현대의 관객을 덮쳐온다.

<퍼스트 카우>는 죽음이라는 끝의 풍경에서 시작된다. 따뜻했던 순간과 험난한 위험을 지나 마침내 쿠키와 루가 예정된 땅에 몸을 누일 때 주변은 고요하고 한없이 평화롭다. 이 신비로운 엔딩 장면은 마치 시간을 정지시키고 순간을 영원으로 만들어주고 싶은 것처럼 느껴진다. 영화의 기본적인 속성이 정지한 것을 움직이도록 만드는 것이라면 <퍼스트 카우>의 엔딩은 고요함의 지속을 체험케 한다. 이것은 단순한 멈춤, 정지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홀리 모터스>의 정지가 죽음과 소멸이라면 <퍼스트 카우>의 정지는 현재의 연속이다. 쿠키와 루가 나란히 누워 있는 고요한 시간은 차라리 그들에게 가까스로 허락되는 평화의 순간을 유지하는 것에 가깝다. 해골을 발견하는 오프닝부터 끝내 닥쳐올 마지막을 짐작했던 것처럼, 쿠키와 루가 나란히 누운 엔딩의 시간은 200년의 시간을 관통하여 다시 시작될 오프닝까지 이어진다. 그리하여 어느 날 한 마리의 개와 한명의 여성이 찾아와 그들의 해골을 마주할 때, 비로소 이들의 여정은 끝이 난다. 끝에서 시작되는 이야기.

언젠가 세상은 멈출 것이다. 영화는 사라질 것이고 삶은 정지할 것이다. 누구도 시간을 피해갈 수 없다. 영화는 시간에 저항한다. 그렇다고 죽어버린 시간을 되살리는 건 아니다. 과거를 기록하는 도구와도 다르다. 영화가 시간을 다루는 방식의 매혹은 끊임없이 ‘지금’을 생산하는 데 있다. 무수히 많은 ‘지금’들의 연결은 끝내 시간의 흐름마저 지워버린다. 모든 것이 바뀌는 중이다. 극장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영화의 황혼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아찔함에 어지럽다. 혼란스러운 2021년의 끄트머리, 끝과 시작이 꼬리를 물고 있는 영화들을 보며 문득 ‘지금’을 향한 욕망과 애착이 결국 (내가 사랑하는) 영화와 극장을 유지시켜줄 것이란 예감에 사로잡힌다. ‘이곳에서 발이 녹는다. 무릎이 없어지고, 나는 이곳에서 영원히 일어나고 싶지 않다.’(김행숙 시인의 <다정함의 세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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