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불온한 판타지가 아름답다
2021-12-15
글 : 홍수정 (영화평론가)
<라스트 나잇 인 소호>가 판타지를 수습하는 방식을 의심하다

낄낄대고 주접을 부리며 성장하기를 거부하던 에드거 라이트의 영화가 사뭇 진지해지고 있는 것 같다. 다음에는 예전의 가벼움으로 돌아와도 좋을 것 같다.

에드거 라이트의 영화들은 늘 내게 어쩐지 덜 자란 어른이 꾸는 행복한 꿈, 혹은 망상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영화에 좀비, 로봇처럼 비현실적인 것들이 잔뜩 출몰하기 때문도 아니고, 주인공이 초인적인 액션을 가뿐하게 소화하기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거기에 늘 누군가 염원할 만한 ‘판타지’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서 좀비를 물리치고 여자 친구와의 행복한 일상을 되찾고 싶어 하고(<새벽의 황당한 저주>), 파트너와 함께 멋진 경관이 되고자 한다(<뜨거운 녀석들>). 친구들과 온 동네 맥주를 거덜내고 싶고(<지구가 끝장 나는 날>), 멋진 차를 타고 여자 친구와 드라이브를 떠나고 싶다(<베이비 드라이버>). 얼핏 소박해 보이지만 삶에서 쉽게 허락되지 않은 것들. 에드거 라이트의 영화는 이런 판타지를 향한 욕망으로 추동되고는 한다.

깔끔하지만 미심쩍은

<라스트 나잇 인 소호>에서도 어김없이 판타지가 등장하는데, 그것은 엘리(토마신 맥켄지)의 상상 속에 등장하는 화려하고 우아한 도시, 1960년대 소호로 포착된다. 이것은 특히 그 시대를 누비는 아름다운 여성, 샌디(애니아 테일러조이)로 특정된다. 샌디는 엘리가 꾸는 꿈이다. 그러니까 <라스트 나잇 인 소호>에서 판타지는 샌디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에드거 라이트의 필모그래피에서 굉장히 이례적이라 할 수밖에 없는 변화인데, 그의 작품에서 판타지는 누군가의 눈에 어린 염원으로, 농담에 묻은 소망으로 얼핏 스치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잠깐 현실화되고는 했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에서 주인공이 추구하는 판타지가 이다지도 이상적인 육체로 현신하여, 영화의 전면에 등장한 적은 여태 없었다.

샌디는 황홀한 모습으로 스크린을 누비지만, 그녀에 대한 꿈은 곧 악몽으로 변한다. 이제 엘리는 피 흘리는 여인의 형상과 남자들의 원혼에 시달리게 된다. 그 과정은 환상적인 영상으로 재현되며 관객에게 쾌감을 전한다. 그러니 환상에서 악몽까지, 그 모든 과정이 이 영화의 판타지인 셈이다.

그러나 영화의 끝이 다가올수록 이 판타지는 수습되어야 할 운명에 처하고 만다. 판타지는 엘리의 답답한 현실을 찢어 새로운 세계를 열어젖혔고 그 과정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이제 찢어진 현실을 봉합할 시간이다. 샌디와 남자들, 거기에 사로잡힌 엘리의 이야기를 영화는 어떻게 마무리지어야 할 것인가.

바로 그때 <라스트 나잇 인 소호>가 선택한 결말은 독특하다. 영화는 그간 펼쳐놓은 판타지를 한 오래전 여인(다이애나 리그)의 과거로 수렴시킨다. 이 선택으로 인해 엘리의 상상은 누군가의 실제 역사로 탈바꿈한다. 그녀는 끝내 엘리를 구출하고 자신의 업보와 함께 자멸한다. 한명의 관객으로서 이 결론을 거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샌디가 처한 상황은 분노를 일으키고, 그녀의 결말은 눈물겨우며, 어떤 시대를 살다 간 여인들을 떠올리게 해 일견 숙연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나는 바로 이 시점에서, 판타지를 수습하는 이 영화의 방식이 의심스럽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의 결말은 감동스럽지만, 이상하다. 할머니와 엘리의 공통점은 같은 집에 머물렀고 60년대에 매혹되었다는 것 정도밖에 없다. 그 정도의 우연으로 그녀가 할머니의 과거를 자신의 꿈으로 되살리며, 현실을 잠식당할 정도로 시달린다는 건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다. 스토리의 개연성 차원이 아니라, 둘 사이에 친연성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다.

에드거 라이트가 어째서 이런 결말을 선택했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선택으로 얻는 효과는 가늠해볼 수 있을 것 같다. 현실을 환상적으로 수놓던 판타지는 그것이 감당되지 않아 너저분해질 즈음에 말끔하게 제거된다. 엘리는 안전하게 구출되고, 그 경험은 그녀에게 선물(엘리가 디자인한 60년대 스타일의 옷 작품)로 남는다. 판타지의 제거와 엘리의 성공.

그러나 나는 이 영화가 성취한 모든 것들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판타지는 판타지로 남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갑작스레 판타지가 현실과 접목하는 이 영화의 결말은 깔끔하되 미심쩍고 작위적이다. 그리고 영화가 할머니의 과거를 소환해낸 것이 아니라, 엘리가 자신의 환상으로부터 벗어나 말끔하게 새 출발을 할 수 있도록 할머니에게 모든 환상을 덮어씌우고 그 집과 함께 지워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드는 것이다. 그 과정은 감동적인 이야기에 가려져 있다. 하지만 어딘가 지워지지 않는 불편감이 이 영화의 결말을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든다. 엘리가 차라리 영화의 초반에 제시되었듯이 학교에 적응해야 된다는 중압감, 엄마의 부재에 대한 불안, 남성에 대한 두려움 등으로부터 도망가기 위해 판타지를 만들어냈고, 그것을 통제하지 못한 채 잠식되어 망가졌다고 한다면, 그 결말은 씁쓸해도 설득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환상에서 아이디어만을 취한 뒤 무대로 당당히 걸어나오는 엘리의 마지막 모습은 훈훈하지만, 믿기 힘들다.

보기 좋은 여백이 채워야 할 기록으로

사실 에드거 라이트의 전작들을 보면, 그의 이런 경향이 처음은 아닌 것 같다. <베이비 드라이버>를 예로 들자면, 주인공 베이비는 믿을 수 없이 빼어난 운전 실력으로 여기저기서 사고를 치고 다닌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때, 그로 인해 영영 여자 친구와 드라이빙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영화는 가석방의 가능성을 제시하며 이 상황을 얼렁뚱땅 넘긴다. 영화는 판타지(위험한 운전)가 현실(여자 친구와 데이트)을 위협할 때 약간은 얼버무리듯 상황을 해결한다. <새벽의 황당한 저주>의 마지막 장면에서 숀(사이먼 페그)은 자신의 베스트 프렌드와 계속 함께하기 위해, 좀비가 된 그를 집에 들인다. 여태 에드거 라이트의 이런 ‘얼렁뚱땅 해피엔딩’은 다소 무리해 보이는 순간에도, 코미디 장르 특유의 재치로 이해되며 용인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라스트 나잇 인 소호>에 이르러서는 이런 결말의 갑작스러움이 다소 돌출되어 보이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결말(샌디가 사실 하숙집 할머니였다는 것)을 볼 때, 정말 안타까운 이유는 따로 있다. 중요한 것은 이 결말이 핍진성 부족을 떠나, 판타지 자체의 매혹을 지운다는 데 있다. 그 자체로 아름다운 한 소녀의 상상은, 현실의 기준에 맞춰 재단되기 시작한다. 그녀가 정말 샌디라면, 그 살인 사건이 실제로 발생했다면, 영화가 이렇게 전개되어도 되는 것일까. 환상 속에서 즐거운 여백으로 남겨졌던 부분은 이제 누락되어 채워야 할 기록이 된다. 비현실적이어서 아름다웠던 순간들은 의문을 만들어내고, 판타지만의 매혹은 현실과 만나 마모된다. 그런데 과연 이런 점들을 감수할 정도로 엘리의 상상의 정체를 확정짓는 일이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그리고 그 과정을 보며 다시금 깨닫는다. 판타지는 현실과 만나지 못할지언정 그 자체로 생생하고 숨을 쉴 때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므로 친애하는 에드거 라이트에게 이 말을 전하며 긴 글을 마치고 싶다. 당신이 펼치는 판타지는 현실에 무사히 안착할 때가 아니라, 현실과 분리된 채로 불안하고 불온하게 허공을 떠돌 때 충분히 온전하며 아름다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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