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이른 작별이다. <시실리 2km>(2004), <차우>(2008), <점쟁이들>(2012), <죽지않는 인간들의 밤>(2019)을 연출한 신정원 감독이 지난 12월4일 급성 패혈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47살. 평소 간경화를 앓던 그는 12월3일 고열과 호흡곤란 증세를 보여 응급실을 찾았다가 중환자실로 옮겨졌지만, 다음날인 4일 눈을 감았다. 신작을 준비하다가 갑자기 맞은 죽음이라 영화계를 더 안타깝게 하고 있다.
1974년생인 그는 계원예술고등학교와 계원예술대학교를 졸업한 뒤 단편영화 <아줌마>를 연출해 재능을 인정받았다. <아줌마>는 신 감독의 어머니가 주인공으로 출연해 화제를 모은 슬랩스틱 무성영화다. 하지만 장편영화로 데뷔하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대학을 졸업했지만 일이 없어 지방 도시에서 반년간 중국집 배달원으로 일했고, 모 영화의 연출부에 들어갔다가 군대식 작업 스타일에 기겁해 ‘탈출’하기도 했다. 이후 결혼식장에서 비디오 촬영 아르바이트를 하고, 가수의 뮤직비디오를 연출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그런 그는 가수 겸 배우 임창정의 뮤직비디오 <슬픈 혼잣말>을 연출하며 영화계와 연을 맺게 된다. “뮤직비디오를 영화처럼 찍는”(임창정) 그를 눈여겨본 임창정은 자신이 출연하는 영화 <색즉시공>(감독 윤제균)의 비주얼 슈퍼바이저 자리를 소개해준다. <색즉시공> 현장에서 그는 윤제균 감독 옆에서 장면 구축하는 것을 도왔다. 윤제균 감독은 <씨네21>과의 전화 통화에서 “당시 임창정씨로부터 신 감독을 소개받아 그에게 비주얼 슈퍼바이저를 맡겼다”라며 “현장에서 무뚝뚝했지만 착하고 마음이 여렸었다”고 고인을 떠올렸다.
이후 그는 임창정의 소개로 김형준 한맥컬쳐그룹 대표가 기획한 영화 연출을 제안받으며 충무로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그것이 ‘신정원표’ 코미디의 시작을 알린 <시실리 2km>였다. 개봉 당시 126만명(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집계)의 관객을 동원한 이 영화는 조폭 무리, 마을 사람, 소녀 귀신 사이에서 벌어지는 호러와 코미디의 독특한 조합물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시실리 2km>를 시작으로 <차우> <점쟁이들> <죽지않는 인간들의 밤> 등을 만들면서 그는 관습을 비트는 걸 주저하지 않았고, 자신만의 개성을 덧입히는 데 있어서도 능력이 탁월했다. <차우>는 여러 장르의 혼합과 식인 멧돼지와 다양한 캐릭터들에서 비롯된 유머가 균형을 이룬 ‘괴수 어드벤처 영화’였다. 한국 무속 신앙과 히어로영화의 문법을 결합시킨 <점쟁이들>, 엇박자 유머와 사회에 대한 신랄한 풍자 그리고 묘한 오싹함이 공존하는 <죽지않는 인간들의 밤>도 그의 감각이 돋보인 작품이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는 동료 영화인에게 그는 “무뚝뚝하지만 유머와 따뜻한 마음씨를 지닌 사람”으로 기억된다. <시실리 2km>로 데뷔하고, <차우>에 출연했던 배우 박혁권은 “연극 무대에서 활동하다가 <시실리 2km> 오디션을 보고 영화에 얼굴을 내밀게 됐다. <차우>는 감독님이 내 배역을 비워놓은 채 다른 배역을 전부 캐스팅한 뒤 나를 캐스팅한 사실을 제작진에 알렸었다”며 “현장에서 배우와 친해지려고 노력하고, 배우가 편하게 연기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말수가 적었지만 속으로 연출과 관련한 고민을 많이 하셨던 것 같다”고 떠올렸다.
<차우>를 함께 작업한 배우 정유미는 “감독님도 나도 상대방이 먼저 얘기하지 않으면 말이 많지 않은 성격인데 감독님의 그런 성격이 되게 편했다”며 “<차우>는 당시 처음 시도하는 시각효과(VFX)가 많았던 영화라 제작 난이도가 높았지만 팀워크가 워낙 좋아 전혀 힘들지 않았고, 즐겁게 작업했던 기억뿐이다. 미국 촬영이 끝난 뒤 한국에서 촬영을 진행할 때 배우들이 애드리브를 많이 시도할 만큼 감독님과 서로 신뢰하며 일했었다”고 말했다.
<점쟁이들>에 출연한 배우 이제훈은 “추운 겨울날 전국을 돌아다니며 촬영했는데 힘든 여건이었지만 감독님의 따뜻한 리더십 덕분에 무사히 촬영을 마친 기억이 난다”며 “묵묵히 진심이 가득한 연출로 힘이 되어준 감독님에게 감사하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죽지않는 인간들의 밤>을 함께 작업한 배우 이정현은 “신정원 감독은 자유로운 연출 스타일이 인상적이었다. 대본 그대로 찍지 않고 현장 분위기에 맞게 수정해 배우 입장에서 이야기에 적응하기 편했다”며 “말수는 적었지만 말할 때마다 유머와 위트가 있어 ‘빵’ 터진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좀더 많은 작업을 함께하고 싶었는데 너무 일찍 떠나 속상하다”고 전했다.
<시실리 2km>를 제작한 김형준 한맥컬쳐그룹 대표는 “<시실리 2km>는 기획이 독특해서 감독을 구하기가 무척 힘들었는데 주연배우(임창정)가 신정원 감독을 데리고 오면서 진행할 수 있었다”라며 “말수도 적고 숫기도 없었지만 아이디어가 많아서 함께 작업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얼마 전 신 감독이 오랜만에 전화를 걸어와 밥을 사주겠다고 해서 약속까지 잡았는데 갑자기 이런 소식을 듣게 돼 허망하다”며 안타까워했다. 윤제균 감독은 “독특한 코미디와 재기발랄한 개성을 갖춘 감독이라 앞으로 보여줄 게 많은데 일찍 세상을 떠나 너무나 안타깝다”고 말했다. 공동 제작자이자 주연배우로서 <시실리 2km>를 함께 작업했던 임창정은 “누구보다 창정이 형을 좋아했던 동생(신정원) 얼굴을 사진으로 떠나보내며 우리는 평소처럼 작별 인사를 했다. 변한 건 없었으나 서로의 눈물로 그의 뒷모습을 보진 못했다”고 전했다.
어디로 튈지 예측하기 힘든 유머와 한국 사회에 대한 신랄한 풍자 그리고 질서와 무질서 사이에서 묘하게 균형을 이룬 오싹함을 두루 갖춘 영화를 만들었던 신정원 감독은 충무로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없던 독보적인 개성을 가진 연출자로 기억될 듯하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