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 동아수출공사 / 감독 이장호 / 상영시간 118분 / 제작연도 1980년
결국 유신은 무너졌고 얼어붙었던 문화계도 해동의 순간을 맞았다. 1976년 대마초 사건으로 한국영화인협회 감독위원회에서 제명당한 후 4년 동안 활동이 막혔던 이장호도 다시 연출할 기회를 얻는다. 그의 말대로 이데올로기적 각성의 시간을 보낸 후 선택한 원작은 최일남의 중편소설 <우리들의 넝쿨>이었다. 크레딧에는 감독이 쓴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송기원이 썼다. 당시 그가 수배 중이어서 이름을 뺀 것이다. 1980년 3월 완성된 시나리오로 문화공보부에 제작 신고해 주로 외설적인 장면들을 순화하라는 지적을 받았지만, 현재 볼 수 있는 118분 버전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장면들이 많아 감독은 아랑곳하지 않고 촬영을 단행한 것으로 보인다. 6월 말 촬영을 마치고 7월 말 검열 신청을 했는데, 다소 늦어졌지만 8월19일 서류 기록상으로는 어떠한 수정 사항도 없이 113분의 러닝타임으로 통과했다. 개봉은 예정보다 늦어졌는데, 10월8일 대종상영화제에서 이장호가 감독상을 받았고 11월27일 명보극장에서 개봉해 10만 관객을 모았다. 비평적으로도 흥행적으로도 성공적인 재기였다.
하류 청년들의 내면 풍경
영화는 세명의 청년이 거센 바람에 날아와 서로 기대어 버티는 애니메이션 장면으로 시작한다. 서양음악과 전통음악을 절묘하게 배합한 김도향의 흥겹고 유쾌한 음악이 흐르면서, 시골에서 상경한 세 청년이 도심의 고층 빌딩이 가리는 그늘진 곳에서 서울 생활을 시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재활용 쓰레기장, 갈빗집, 철공소, 기사식당, 폐차장 같은 공간들에서 고단한 일상을 견디는 그들의 모습은 세피아 톤과 프리즈 프레임을 활용해 압축적으로 설명된다. 영화는 한창 개발 중인 강남의 어느 동네로 보이는 곳으로 장면을 넘겨 셋의 현재를 소개한다. 덕배(안성기)는 중국집 배달부, 길남(김성춘)은 여관 보이, 춘식(이영호)은 이발소 세발사로 자리 잡아 고되지만 앞으로의 삶이 더 나아질 거라 꿈꾸고 있다.
초반부 영화는 티격태격하지만 그래도 서로를 의지하는 세 청년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낸다. 그들이 타향살이를 견디는 가장 큰 동력은 각자 마음에 품고 있는 여성들 덕분이다. 길남은 미용실 보조로 일하는 진옥(조주미)과 미래를 함께하려 하고, 춘식은 이발소의 면도사 미스 유(김보연)를 좋아하지만 선뜻 나서지는 못한다. 덕배는 상류층 명희(유지인)와 마주치며 안될 걸 알면서도 마음이 흔들린다. 포장마차의 이씨(김인문)가 “서울 인구가 800만이면 진짜 서울 사람은 8만도 안된다”고 말하듯이 그들은 서울 사람으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이장호는 얼굴은 보이지 않는 포장마차 손님의 목소리를 빌려 지나가듯 슬쩍, 하지만 알아챈다면 노골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다음과 같은 대사를 들려준다. “꼭 최 선생님 소설에 자주 나오는 분위기군요”, “선생님은 하층 구조에 관심이 많으시죠?” 같은 대사는 원작 소설을 환기시키는 동시에 민중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된 감독의 입장을 밝힌다. 미스 유가 화제에 올라 춘식과 길남이 주먹다짐을 벌이고 덕배가 말리는 야밤의 공터, 땅을 빼앗긴 노인(이향)이 임씨에게 업혀 “내 땅 내놔라”라고 외치며 지나가자 셋은 그 모습에 압도당한다. 임씨 역을 맡은 마당극 연출자 임진택은 이장호와 사회적 관심사를 나누던 인물이었다.
아름답지만 슬픈 청춘 커플들의 데이트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들이다. 감독은 그들의 내면 풍경을 서구영화의 지평을 빌려 실어낸다. 먼저 이른 아침 선정릉에서 만난 길남과 진옥의 장면이다. 길남이 웰컴호텔을 짓겠다고 헛꿈을 꾸는 것에 비해 현실적인 진옥은 기술을 배워 야매 파마집을 낼 거라 다짐한다. 다음은 미스 유와 춘식의 데이트다. 야산 위의 거대한 입간판 밑에서 미스 유가 신문에서 읽은 선진국의 복지 제도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는데 철골 구조 위에 매달린 춘식은 그녀가 들리지 않게 “사랑해”라고 속삭일 뿐이다. 압권은 덕배와 명희의 데이트 시퀀스다. 춘식의 여동생 춘순(임예진)의 만류에도 덕배는 명희를 향한 마음을 쉽게 거두지 못한다. 한적한 강가에서의 둘의 데이트 장면은 덕배에게 ‘바람불어 좋은 날’이면서도 그녀가 그저 자신을 장난감처럼 대하는 것임을 깨닫는 시간이기도 하다. 명희가 등장할 때마다 나오는 피아노 연주 소리는 그녀가 졸부 계층임을 알려준다. 다음 신은 안성기에게 두달간 춤 연습을 시키는 등 공을 들인 장면이다. 명희와 간 디스코클럽, 주뼛거리던 덕배가 고향 마을에서 보던 농악을 춰서 스테이지를 사로잡는다. 이때 “바람불어 좋은 날에 내 꿈도 부풀어 온다”라는 영화의 주제곡 가사를 들을 수 있다.
마법 같은 리얼리즘
중국집에 들이닥친 부잣집 자제들과 싸움판을 벌인 셋은 파출소에 잡혀간다. 뒤늦게 명희가 차를 몰고 데리러 오지만 덕배는 타지 않고, 담벼락에 오줌을 갈기던 그의 눈에 권투 경기 포스터가 들어온다. 덕배가 어떤 깨달음을 얻으며 영화는 결말부로 넘어간다. 결국 돈으로 미스 유를 취한 부동산업자 김종배(최불암)가 신축 상가 낙성식을 연 날, 노인은 그 건물의 화장실에서 목매달아 죽으며 최후의 메시지를 전한다. 징소리로 시작된 만가는 해질녘 상여 행렬 장면까지 구슬프게 이어져 빼앗기고 내몰린 사람들을 위로한다. 길남과 춘식에게도 나쁜 일이 닥친다. 입영 영장을 받은 길남은 돈을 맡았던 진옥이 도망가 충격을 받고, 춘식은 미스 유가 김종배와의 관계를 인정해 격렬한 감정의 동요를 겪는다. 길남이 덕배와 춘식 앞에서 울분을 터뜨리는 신축 공사장의 롱테이크 장면, 후경의 포클레인이 상수관을 건드려 물이 치솟는다. 네오리얼리즘을 신봉하던 이장호가 마법처럼 만난 순간이었다. 세 친구가 취해서 비틀거리는 밤, 문제적 순간이 등장한다. 당시 심의위원이던 소설가 박완서가 이 영화에서 한 장면도 잘라낼 수 없다고 버틴 덕에 검열에 통과될 상황이었는데, 당국은 한 군데만 제작사가 직접 삭제할 것을 지시했다. 길남이 부르는 “영자를 부를 거나, 순자를 부를 거나”라는 노래 가사에서 시옷 발음을 자르라는 것이다. 그때 이장호는 쿠데타를 일으킨 신군부 우두머리의 부인 이름을 처음 알게 된다.
이제 덕배와 춘순만 서울에 남는다. 춘식은 종배를 면도칼로 공격해 수감되고 입영을 앞둔 길남은 고향 가는 기차에 오른다. 길남이 제대하고 춘식이 감방에서 나오면 그들은 서울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감독은 덕배가 권투 스파링을 하는 장면을 덧붙이며 희망 어린 낙관에 방점을 찍는다. 하지만 세상은 다시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