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복수를 통쾌하게 묘사하며 ‘사이다’를 주는 작품들이 인기를 얻는 상황 속에서 과연 그 방식이 옳은가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그때 만난 대본이 <구경이>였다.” 이정흠 감독이 연출한 드라마 <구경이>는 ‘살인마와 살인을 막는 자의 사투’를 그린다. 얼핏 익숙한 구성으로 들릴 수 있으나 여기에 ‘나쁜 사람만 죽인다’는 살인마 송이경(김혜준)의 논리와, 이따금씩 도를 넘는 보험조사관 구경이(이영애)의 의심이 더해지며 <구경이>는 예측 불가한 궤도를 그린다. <너를 노린다> <조작> <아무도 모른다> 등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은 작품을 연출하며 “쉽게 답을 내리기 어려운 질문을 던져온” 이정흠 감독은, <구경이>에서 사적 복수를 다방면으로 조명하며 시청자들에게 다시 한번 물음표를 던졌다.
-<구경이>의 종영 소감을 묻고 싶다. 시청률은 2%대였지만 단순히 숫자로 재단하기 어려울 만큼 좋은 평가와 주목을 받았다.
=솔직히 말하면 시청률이 아주 잘 나올 거라고 생각하며 시작하진 않았다. 처음 대본을 읽고 제작사 대표님에게 물었다. “노선을 명확히 해야 할 것 같다. 시청률이 잘 나오는 것과 이 드라마의 시청자가 재밌게 보는 것. 둘 중 무엇을 원하시냐. 전부 챙길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러기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래도 좋은 작품이 나오길 바란다고 말씀하셔서 그렇게 방향을 잡았다. 시청률이 아쉽긴 하지만 목표대로 1030 여성 시청자를 잡았고 그들이 불편함 없이 작품을 즐긴 것 같아 다행이다. 연출자로서도 정말 즐겁게 일했다.
-대본을 읽을 때부터 머리에 그려지는 그림이 있었나.
=50페이지의 시놉시스와 4부까지의 대본을 먼저 받았는데 보통 그 정도 읽으려면 며칠이 걸린다. 그런데 3시간 반 만에 다 읽었다. 대본의 지문도, 신이 넘어갈 때의 맺음새도 그렇고 그림을 잘 아는 작가란 생각이 들더라. 어떤 분인지 여쭤보니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출신이란 답을 들었고, ‘그래서 드라마 공식에 맞춰 쓰지 않으셨구나’ 하고 이해했다.
-이경이와 구경이의 첫 등장이 흥미롭다. 둘 다 어둠 속에서 미스터리하게 등장하는데 그 흐름이 자연스럽게 이어져서 혹시 이경이가 구경이의 어린 시절인가 싶기도 했다.
=그게 1화에서 목표한 바였다. 같은 인물인지 아닌지 모호하게 하기 위해 행동과 대사를 비슷하게 연출했다. 둘 다 기묘하게 등장하지만 이경이는 단지 연극 소품으로 피를 만드는 중이고, 구경이는 게임을 하느라 ‘죽어! 죽어!’ 하고 외칠 뿐이다. 앞뒤 정황을 파악한 뒤 다시 보면 또 다른 맥락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헷갈린다고 욕은 먹었는데 우리끼리는 초기의 목표를 달성했다고 좋아했다. (웃음)
-나제희(곽선영)가 구경이에게 통영의 살인 사건을 설명하는 신도 독특하다. 살인이 재현되는 과거와 현실의 경계가 뚜렷이 구분되지 않는다.
=대본 자체가 온갖 영화와 연극, 게임, 만화, 인터넷 밈들을 넘나드는데 그냥 일반 드라마처럼 연출해선 톤이 안 맞겠더라. 그래서 구경이와 제희가 마치 중계방송을 보듯 회상 신을 바라보고 과거의 전단지가 현실로 날아들어오도록 구상했다. 우리 드라마가 이렇게 이상한 드라마라고 아예 1화부터 장벽을 무너뜨리며 시작한 거다.
-연극의 무대 장치를 활용한 것도 감독의 아이디어였다던데.
=작가님이 대본에 연극적인 장치를 의도적으로 심어놓아서 그걸 시각적으로 구현할 방법을 강구하다 나온 것이다. 이경이는 연극 동아리의 일원이고 마찬가지로 구경이도 연극배우의 컨셉이 강하다. 평소엔 히키코모리 같지만 타인과 만날 때에는 갑자기 사회성이 높아지고,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변장한 채 다른 사람인 척 연기하는 경우가 많다.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요소를 차용한 것도 같은 의도였나.
=대본의 지문이 정말 만화책을 읽는 것처럼 재밌다. 이 발랄하고 파격적인 표현들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컸다. 사실 <구경이>는 하드보일드 장르의 공식에 충실히 임한 작품이다. 하드보일드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서사보다 캐릭터와 분위기가 중요하지 않나. <구경이>도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서사는 과감히 생략되어 있다. 우리 드라마는 서사보다 구경이와 이경이를 따라가면 되는 드라마니까 그런 서사적인 공백을 캐릭터의 특색을 잘 살릴 수 있는 포인트로 채워보자고 생각했다.
-그런 면에서 구경이는 작품의 독특한 가이드가 돼줬다는 생각이 든다. 이영애 배우에게서 전에 없던 새로운 얼굴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본 배우 중 가장 디테일한 분이다. 대본 지문부터 대사, 이야기 라인까지 본인이 납득하지 못하면 넘어가지 않는다. 까탈스럽다는 뜻이 아니라 ‘이건 왜 이렇게 됐고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내 생각은 이런데 감독님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말 모든 부분을 꼼꼼하게 살피고 질문한다는 의미다. 구경이가 게임을 할 때는 구부정하게 있다가 추리를 할 땐 허리를 편다는 설정도 있었고 떡진 머리도 엄청난 연구의 결과물이다. 처음에 시청률이 저조할 때 내게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 “나는 시청률 50% 넘게 찍어본 사람인데 그게 뭐가 중요하겠나. 나는 내가 즐거운 작품을 하는 게 중요한 사람인데 지금 작품을 하면서 너무 신나고 재밌고, 이 작품이 자랑스럽다. 감독님 지금 잘하고 있으니 어깨 펴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하시면 좋겠다.” 들으면서 눈물이 날 뻔했다. (웃음)
-이영애 배우에 맞서 김혜준 배우가 보여준 에너지도 만만치 않았다.
=이경이는 캐스팅할 때 가장 고민이 많았다. 캐릭터 자체가 낯설고 예측이 되지 않다보니 아예 신인을 발굴하자 싶어 4개월 동안 300명의 오디션을 봤다. 그런데 후반부 대본을 받아볼수록 신인이 감당하기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덜 대중적이면서도 연기 베이스가 탄탄한 배우로 기준을 바꿨는데, 그때 김혜준이 눈에 들어왔다. 첫 리딩을 할 때 정제되지 않은 에너지가 이리저리 튀어나오는 걸 보면서 ‘풀어주면 엄청난 뭔가가 나오겠다’고 직감했다. 덜 망가지려고 조절할 법도 한데 그런 것 하나 없이 필요할 때 가진 모든 걸 아낌없이 쏟아붓는 배우였다.
-나제희는 구경이의 최측근이자 배신자, 엄마, 비혼모, 가장 등 다양한 역할을 감내하는 캐릭터다. 연출적으로도 신경을 많이 썼을 것 같은데.
=내게 제일 중요한 캐릭터가 나제희였다. <구경이>의 인물들이 전부 만화적이고 비현실적인데 그중 나제희가 유일하게 현실에 발을 붙이고 극의 중심을 잡아준다. 구경이를 이미 배신한 상황에서 죽은 줄 알았던 나제희가 다시 돌아왔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작가님이 고민이 많으셨다. 나제희를 8회에서 죽이고 퇴장시키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래서 내가 캐스팅을 잘하겠다고, 배신을 하고 와도 사람들이 미워하지 않을 배우를 찾겠다고 했고 그게 바로 곽선영 배우다. 외모나 말투가 신뢰감을 주는 배우라 미워하기 힘들다. 배우의 노력도 대단해서 대본상의 나제희가 50이었다면 오롯이 배우의 노력으로 100이 채워졌다.
-그런 면에서 보면 산타(백성철)는 나제희와 가장 반대급부에 서 있다. 결말을 보고 나서도 정체가 모호하고 명확히 설명하기 어려운 인물이었다.
=내게도 가장 이상했던 게 산타였다. 왜 말을 하지 않는지, 왜 AI 보이스를 쓰는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거다. 작가님한테 물었다. “얘는 그냥 이런 애죠? 설명이 필요 없는 거죠?” 그렇다고 하길래 산타는 그냥 그 자체로 보여주면 되겠다고 심플하게 컨셉을 잡았다. 작가님이 참 짓궂다고 생각한 게, 산타에게 뭔가 있는 것처럼 계속 암시를 준다. 칼을 능숙하게 다루는 걸 여러 차례 보여주며 결정적인 순간 크게 활약할 인물처럼 그리지만 결국 서사에 깊이 개입하지 않는다. 그냥 공기처럼 곁에 있는 존재랄까. 산타에 대한 질문을 정말 많이 받았는데 그때마다 이야기했다. “산타는 그냥 산타지 그 누구도 아니다. 아무것도 숨겨놓지 않았으니 있는 그대로 보면 된다.” 근데 아무도 안 믿었다. (웃음)
-조현철, 곽선영 배우를 인터뷰할 때 가장 쉽지 않은 촬영으로 둘 다 수중 장면을 언급했다. 연출자로선 어땠나.
=물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상황에서 누가 대신 해줄 수도 없고, 호흡기는 잠깐 물었다 떼고 찍어야 했으니 배우들 입장에선 힘들었을 거다. 안전상으로 걱정이 많은 신이었다. 그런데 <구경이>에 난이도가 높은 신이 너무 많아서 촬영 전체로 보면 아주 힘든 장면은 아니었다.
-그럼 어떤 신이 가장 난이도가 높았나.
=9화의 저유조 신이 가장 어려웠다. 구경이가 오크 통에 갇힌 채 굴러떨어졌는데 눈을 떠보니 저유조에 걸려 있고, 여기서 살아나간다고 대본에 적혀 있는데 그 개념 자체를 잡는 게 어려웠다. 스탭들도 처음에 이해를 못했다. “감독님, 이게 가능한 일인가요? 이런 장소가 있나요?” 과연 시청자들은 얼마나 납득할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았다. 작가님도 이 장면을 써도 될지 고민하셨지만 구경이가 삶의 이유를 찾는 상징적인 장소이자 장면이었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했다.
-보면서 가장 궁금한 장소 중 하나였다. 로케이션은 어디로 설정했나.
=전부 세트였다. 상암동 문화비축기지에 있는 저유조를 레퍼런스 삼아 세트를 지었다. 환상에 기반한 장소라 대본대로 구현하긴 어려워서 큰 골격만 잡고 나머지는 CG로 완성했다.
-구경이가 9화를 기점으로 삶의 이유를 찾는다면, 이경이는 마지막 화에서 결국 감옥에 갇히며 살아갈 이유를 잃는다. 이때 이경이의 세상은 채도가 점점 낮아지다 못해 흑백으로 처리된다.
=<구경이>를 연출하며 가장 중점을 둔 건 서사보다도 구경이와 이경이의 관계였다. 같은 듯 다른 두 사람의 차이를 어떻게 줄 수 있을까 고민했을 때 빛과 색을 활용하는 게 가장 명료한 방법이란 결론에 도달했다. 감옥에 갇혀 살인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이경이의 삶은 점점 색을 잃는다. 이경이가 어릴 때 “깜깜하다”라고 말한 것과도 이어지는 대목이다.
-1화에서 칙칙하던 이경이의 세상이 살인을 시작하고 구경이와 만나며 본래의 색을 되찾는 것도 같은 맥락이겠다.
=맞다. 완성된 대본이었기에 처음부터 그런 대비를 구상할 수 있었다. <구경이>는 살인자와 그를 막는 사람의 내면을 두루 살피며 사적 복수에 관해 세심하게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나는 마지막 이경이의 신이 그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 받아들였다. 나는 이경이가 살해한 사람들이 전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선 이경이의 살인 기준이 그리 명확하지 않다. 이모나 건욱(이홍내)이 나쁜 사람이라 칭하면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편이다. “기분 나빠서 죽인 사람도 있는 것 같은데”라는 건욱의 말과 “자기 합리화”라는 구경이의 말도 일종의 암시로 볼 수 있다. 실수도 잦다. 이경이 이모도 그렇게 목숨을 잃지 않았다. 그렇다면 죗값은 치러야 하지 않을까. 이경이가 나쁘다고 단정 짓기보다 책임을 지는 장면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구경수탐정사무소’의 간판을 보면 구경이와 산타, 경수가 수사를 펼치는 다음 이야기를 상상하게 된다. <구경이> 시즌2의 가능성은 전혀 없나.
=사실 작가님과 나는 완전히 닫힌 결말이라고 생각했다. 특별출연으로 배우 이영애가 나왔을 때 이건 ‘시즌2는 없다’는 선언과 다름없었다. 드라마 속 구경이가 현실의 이영애를 만났는데 이 드라마에서 뭐가 더 나올 수 있을까. 시트콤이 되지 않는 한 방법이 없지 않을까.
-특별출연도 감독님이 제안한 것으로 안다. 그럼 그건 닫힌 결말을 위한 장치였나.
=그것도 있지만, 제일 큰 건 <구경이>에 온 힘을 쏟아낸 배우 이영애에 대한 일종의 찬사였다. <구경이>는 많은 이들이 참여해 일군 작품이지만 이영애라는 배우가 결심하지 않았다면 할 수 없는 드라마였다. 더불어 이영애는 본래 이런 면을 지녔지만 구경이와 같은 캐릭터도 연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이렇게 스펙트럼이 넓은 배우를 혹시 선입견을 갖고 봐오진 않았는지 묻고 싶었다.
-<구경이> 다음으로 어떤 작품을 구상 중인가.
=우선 여성 서사는 계속 가져가고 싶다. 장르물을 좋아하는데 <구경이>의 경우처럼 장르물은 성별이 여성으로 바뀌기만 해도 재해석할 여지가 정말 많다. 여성이 주인공인 드라마는 많지만 장르물의 주인공이 여성인 경우는 여전히 적다. 요즘 농담처럼 하는 말은 이영애 선배가 특별출연했을 때의 그 압도적인 정갈함을 베이스로 ‘007’을 찍어보고 싶다는 거다. 아직 따로 말씀드리진 않았다. (웃음) 언젠가 정통 스파이물을 꼭 해보고 싶다.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 멀리, 길게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