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런트 라인]
발신과 수신, 공감과 반응 사이에 놓인 '드라이브 마이 카'의 시간
2022-01-12
글 : 송경원
리액션, 리버스, 리마인드

[송경원 기자의 프런트 라인]

내용은 익숙하다 못해 식상하다. 하나의 세계가 끝났음을 뒤늦게 받아들이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남자 이야기는 닳고 닳을 만큼 많이 들어왔다. 그런데 하마구치 류스케의 손을 거치고 나니 전혀 다른 파장을 발산하기 시작한다. 단정하고 아름다운 숏/리버스숏 사이에서 영화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바냐 아저씨, 우리 살아가도록 해요. 길고 긴 낮과 긴긴밤의 연속을 살아가는 거예요. 운명이 가져다주는 시련을 참고 견디며 마음의 평화가 없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이 든 후에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리고 언젠가 마지막이 오면 얌전히 죽는 거예요. 그리고 저세상에 가서 얘기해요. 우린 고통받았다고. 울었다고. 괴로웠다고요. 그러면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어여삐 여기시겠지요. 그리고 아저씨와 나는 밝고 훌륭하고 꿈과 같은 삶을 보게 되겠지요. 그러면 우린 기쁨에 넘쳐서 미소를 지으며, 지금 우리의 불행을 돌아볼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드디어 우린 평온을 얻게 되겠지요.”

연극 무대 위, 소냐는 괴로움을 토로하는 바냐 아저씨의 어깨를 감싸며 수어로 마음을 전한다. 이때의 대사는 너무도 정확하게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가 듣고 싶었던 말을 설명해주는 터라 도리어 마음 한구석이 식어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평소라면 거기서 멈췄을 것이다. 하지만 <드라이브 마이 카>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목소리 없이 마치 무성영화처럼 수어의 동작만으로 진행되는 이 장면은 일견 무척 수다스럽게 느껴진다. 수다스럽다니? 방대한 자막 정보 때문이겠지만 문득 소리가 거의 사라진 이 장면이 수다스럽게 다가온다는 건 재미있다. 감각의 교란이라고 해도 좋겠다. 어느새 관객인 나도 무대 위 배우들처럼 언어에 담긴 뜻 이상의 무언가를 느끼고 있는 걸까.

가후쿠는 배우들에게 말의 기능적인 의미를 걷어내고 언어 이상의 무언가로 교감하는 순간을 익히도록 연습시킨다. 로봇이 아니라며 대사에 자꾸 감정을 싣고자 하는 배우들에게 그는 잘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고, 우선 천천히 또박또박 말하라고만 한다. 대사에 감정을 싣는 건 ‘나’를 표현하는 방식이다. 가후쿠는 나를 드러내기 전에 상대의 반응을 살필 수 있도록 말에서 ‘나’의 존재를 극단적으로 제거한다. 가후쿠의 의도를 제일 먼저 알아차린 사람은 수어를 사용하는 이유나(박유림)다. “매일이 행복해요. 체호프의 글이 내 안에 들어와 움직이지 않던 몸을 움직이게 해줘요.” 그리하여 어느 맑은 날, 야외에서 연습하던 제니스와 이유나의 연기를 보며 드디어 원하는 바를 달성한다. “지금 뭔가가 일어났어.” 그것은 나를 발산하는 대신 온몸의 감각을 곤두세워 상대방의 세계 속으로 들어갔을 때라야 열리는 ‘반응’의 발견이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상영시간 내내 그런 감각을 차곡차곡 훈련시킨다. 액션보다 리액션, 숏보다 리버스숏으로 성립하는 영화라고 해도 좋겠다.

현실에 대한 리버스숏으로서 성립하는 무대들

<드라이브 마이 카>의 ‘내용’과 ‘메시지’에 대해 묻는다면 마지막 무대 위 소냐의 대사가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랜 시간 자신의 속내와 상처를 감춘 채 살아왔던 남자 가후쿠는 자신이 무대에 올린 연극의 대사를 통해 과거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걸 허락받는다. 가후쿠와 동행했던 드라이버 미사키(미우라 도코)에게도 이 위안의 언어는 유효하다. 오래된 연극의 두루뭉술한 대사는 각자 듣고 싶은 대로 해석할 수 있도록 의미를 고정하지 않은 채 해방되고, 마침내 모두에게 각자 필요한 형태로 당도해 마음을 두드린다. 이걸 다 말해버리면 스포일러가 아니냐고 걱정할 필요 없다. 내용을 안다 해도 영화가 전하는 형태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빈약한 말의 그릇이 담아낼 수 있는 건 의도의 조각일 뿐이다. 아니 솔직히 그조차 되지 못한다.

언어는 대개 출발선에 정지된 자동차다.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발생하지 않는 고철덩이다. 서점의 자기 계발 코너에 아득히 쌓인 명언들은 멋지지만 아직은 그저 뭉쳐진 잉크의 흔적들에 불과하다. 거기에 쓸모가 생기기 위해선 엔진에 시동이 켜지고 목적지가 설정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그 말들은 당신을 향해 움직이고 닿을 때라야 비로소 생명을 얻는다. 식상하기 이를 데 없는 명언들이 어느 날 갑자기 큰 울림으로 다가오기 위해선 적어도 두 가지를 충족시켜야 한다. 우선 그 내용이 필요한 적절한 타이밍에 누군가에게 도착해야 하고, 그 후 주변 상황에 녹아들기까지 어느 정도의 물리적인 시간이 주어져야 한다. 요컨대 진정 중요한 건 말(혹은 그 안에 담긴 의미)보다 그것이 전달되는 정황이다. 그리고 정황이란 언제나 발신자가 아니라 수신자에 의해 형성된다.

<드라이브 마이 카>의 내용은 빤하다. 이 풍성한 교감의 순간들을 다시 납작한 언어로 난도질한 후 편협하게 정리하자면, 중년 지식인 남성이 과한 자기 보호의 껍질을 벗고 자신을 솔직하게 받아들이는 이야기다. 그 과정에서 유사한 상처를 공유한, 돌이킬 수 없는 과거로부터 마음을 닫고 살던 (딸 나이 또래) 여성의 도움을 받는다. 영화는 연극 <바냐 아저씨>의 대사를 빌려, 죽은 아내의 목소리를 빌려 끊임없이 말한다.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살아야 한다고. 이건 히로시마 원폭의 아픔, 동일본대지진의 트라우마 등 상실의 감정을 겪은 이들에겐 어떻게든 성립할 보편적인 대사다. 이 상투적이고 교훈적이며 당연한 내용은 처음엔 당연히 가후쿠에게 닿지 못한 채 겉돈다.

아내를 잃은 후 가후쿠는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 역을 맡아 무대에 서지 못한다. “체호프는 두려워. 그의 대사를 입에 올리면 나 자신이 끌려나와. 못 느껴? 그걸 견딜 수 없게 됐어.” 가후쿠가 끝내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아내가 죽기 전에 자신과의 관계가 이미 파국에 이르렀다는 진실이다. 그는 무대 위에서만 해방된다. 아내를 원망하는 마음, 원망조차 제대로 못했던 마음, 그럼에도 곁에 있어주길 간절히 바랐던 마음, 이제는 더이상 그런 기회조차 사라졌다는 걸 그는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래서 무대에서 내려왔다. 무대만이 스스로에게 솔직함을 강요하는 곳이었으므로. 가후쿠의 궤적에 초점을 맞춘다면 <드라이브 마이 카>는 가후쿠가 다시 바냐 아저씨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상처를 응시하는 과정을 따라가는 이야기다. 여기서 가후쿠를 이끄는 건 거울상과도 같은 상처를 지닌 드라이버 미사키의 존재다. 가후쿠는 마음의 문을 닫고 평온을 가장했던 거짓된 일상의 균열을, 미사키를 통해 발견한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무대를 만들고, 무대 그 자체를 응시하는 영화다. 무대라는 거울상에 대한 형상화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 영화엔 세개의 무대가 있다. 첫째는 연극 <바냐 아저씨>의 무대, 두 번째는 가후쿠와 미사키가 함께하는 붉은색 사브 안, 세 번째 무대는 이 영화의 형식 그 자체다. 자신마저 속이고 있는 (가후쿠로 대변되는) 우리가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무대 위에 재현된 ‘무언가’를 목격하는 것이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구태여 시간을 들여 “뭔가가 일어나는” 순간을 기다린다. 어쩌면 이건 거기서 뭔가 일어나는 시간이라기보다는 관객이 그걸 받아들이는 데 걸리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때문에 중요한 건 극의 내용이나 대사의 의미 따위가 아니다. 소냐의 장황한 설교 같은 대사가 마지막 무대 위에서 폭발적인 위력을 발휘하는 건 거기에 당도하기까지의 상황과 해당 장면의 위치 덕분이다. 바로 앞 장면에서 연기를 마치고 들어온 배우 제니스가 대기실에서 무대를 찍은 TV를 보고 있다. TV 속에는 소냐와 바냐가 연기를 하고 있고 카메라는 무대로 이동한다. 좀더 앞으로 거슬러 가면 미사키의 고향, 무너진 집을 덮은 새하얀 눈밭에서 두 사람이 나눈 포옹과 대화가 있다. “살아남은 자는 죽은 자를 계속 기억해. 어떤 형태로든. 그게 계속되지. 너와 나는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어. 살아가야 해. 괜찮아. 우린 틀림없이 괜찮을 거야.”

요컨대 마지막 연극 무대는 그동안 가후쿠가 꾸준히 외면했던 자신의 진심, 그날의 진실에 대한 리액션으로서 위치한다. 다만 현실에 대한 리액션으로서의 사건을 재현하는 것보다 리버스숏으로서의 무대를 구현하는 데 집중한다는 점이 <드라이브 마이 카>를 좀더 특별하게 만든다. 만약 이 대사들이 당신에게 가닿았다면 그건 말의 내용물 때문이 아닐 것이다. 그런 건 처음부터 반복해서 들어왔으니까. 이 장면에서 살아나는 건, 당신이 마침내 목격하는 건 이전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파동과 동작과 시간들이다. 소냐의 수어가, 침묵이 수다스럽게 느껴질 만큼 꽉 찬 무언가. 영화 내내 먼저 출발했던 말들, 아내의 목소리를 빌린 체호프의 대사들은 머물 자리를 찾지 못하다가 드디어 무대 위에 안착한다. 새하얗게 뒤덮인 죄의 고백, 마음의 짐처럼 쌓인 뒤늦은 후회와 함께. 이 무대는 발신자(가후쿠)와 수신자(미사키) 사이에서 발생한 무언가를 전한다. 당신이 여기서 하얀 눈밭의 이미지와 붉은색 사브의 엔진 소리를 겹쳐 본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무대는 미사키에게 전달되고, 이에 호응하듯 카메라는 미사키의 얼굴을 정면으로 잡는다. 쏟아지는 박수와 갑자기 단절되는 소리. 이윽고 시간을 건너뛰어 부산에서 삶을 이어가는, 붉은 사브를 운전하는 미사키의 모습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미사키와 바냐(가후쿠)의 숏/리버스숏. 관계의 끝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기후쿠와 ‘무대’라는 이름의 리버스숏.

폐허의 시간에서 꽃피우는 하마구치 류스케의 뉴 클래식

엔딩의 명료함은 오프닝의 불투명함과 비교하면 한층 명확하다. 새벽녘의 푸르스름한 창을 배경으로 한 오토(기리시마 레이카)의 실루엣으로 출발하는 첫 장면은 그야말로 불안, 불온, 불투명한 심상을 이미지로 형상화한다. 실루엣으로만 포착되는 오토처럼 그녀가 내뱉는 말들 역시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다. 그것이 꿈(혹은 욕망)에서 발현된 정제되지 않은 언어라는 게 한참 뒤에 설명되기 전까지 이 장면은 모든 것이 엇나간다. 오토의 말은 가후쿠에게 가닿지 않고 가후쿠의 시선은 오토를 정확히 바라보지 못한다. 숏과 리버스숏은 서로 조응하고 소통하지 못한 채 각각 따로 서 있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 <드라이브 마이 카>는 이 평행선 같았던 숏/리버스숏 사이의 간격을, 말과 이미지의 불일치를, 뒤늦게 당도한 파국의 거리를 좁혀나가고 받아들이는 영화다.

한없이 벌어졌던 가후쿠와 오토의 거리는 오토의 죽음으로 영영 좁힐 기회를 상실했다. 그렇게 생각했건만 그걸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게 영화언어, 그리고 무대다. 방법은 간단하다. 말의 의미를 반추하는 대신 말이 발화되는 태도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 발신자-오토는 세상에서 지워졌으니 이제 남은 건 수신자-가후쿠에게 집중하는 수밖에 없다. 한데 가후쿠는 애초에 그런 방법을 알지 못하는, 아내의 외도를 목격하고도 조용히 뒤돌아서곤 모른 체하는 남자다. 가후쿠에겐 진실로 자신을 대면할 수 있는 무대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영화는 붉은색 사브 차 안이라는 무대와 미사키란 상대(거울)를 만들어준다. 미사키와 차 안에서 나누는 침묵의 시간들은 <드라이브 마이 카>의 진정한 무대이자 마음의 형상이다. 이 영화는 차 안에서 이뤄지는 숏/리버스숏으로 채워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곳에서 가후쿠는 눈앞의 타인의 상처를 존중하고 조심스레 대함으로써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마음속 부스러기로 방치해둔) 오토의 세계, 망자의 세계, 애도의 단계로 들어갈 수 있다. 그리하여 마침내 마지막 무대 위에서, 그동안 계속 도망치고 지연되고 흩어졌던 ‘말들’은 제자리에 당도한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비범함은 말의 내용이 아닌 교환 방식에 있다. <드라이브 마이 카>의 말은 지나치게 빨리 오거나 늦거나 길을 잃고 맴돈다. 차 안 테이프로 반복되는 <바냐 아저씨>의 대사들은 자기 고백이나 예언, 혹은 망자와의 대화처럼 들린다. 아내의 외도를 목격한 다음 일주일 뒤 차 안에서 “25년 동안 녀석은 남의 자리에 앉아 있었던 거지”라는 연극 대사를 연습하는 건 노골적이다. 하지만 이 대사들이 1차원적인 내면 고백으로 소비되지 않는 건 대사와 장면 사이의 간격 덕분이다. 하나의 의미로 확정되면 밋밋할 법한 대사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확산된다. 가후쿠가 죽은 오토의 목소리와 대화를 할 수 있는 건 대사의 내용이 아닌 속도와 박자, 호흡 덕분이다. 유나, 윤수 부부와 저녁을 먹고 온 날, 가후쿠는 미사키에게 말한다. “바냐 부분의 대사가 비어 있는데 내 리듬으로 이야기하면 딱 다음 대사가 나오죠.” 테이프를 튼 순간 가후쿠는 오토와 같은 시간의 흐름을 공유하고 있는 셈이다.

연극 대사의 의미를 상황과 매칭하는 건 순전히 관객(보는 이)의 욕망이다. 하마구치는 이런 연결의 가능성을 일부러 방치한 뒤 말이 공간에 머무는 상황(혹은 시간)을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가후쿠가 아내의 이야기를 꺼낸 장면에서 미사키 역시 처음으로 속내를 드러낸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가후쿠의 얼굴 위로 미사키의 목소리가 깔리고, 이어 카메라는 측면에서 앞뒤로 앉은 두 사람을 같은 방향으로 나란히 찍는다. 살짝 이어진 대화가 부담스러운 듯 미사키가 오토의 테이프를 틀면 그녀의 목소리는(혹은 터널의 적당한 소음은) 배경음이 되어 가후쿠와 미사키를 감싼다. “당신이 운전해주면 차에 타고 있다는 것도, 당신이 있는 것도 잊어요.” 가후쿠의 솔직한 칭찬과 함께 두 사람이 자신의 과거를 슬며시 고백하는 이 장면에서의 카메라는 미사키의 앞쪽으로 넘어가 두개로 분할된 화면을 하나의 투숏으로 모은다. 그리하여 앞뒤 좌석의 두 사람을 함께 찍은 이 장면은 온전히 두 사람의 시간으로 거듭난다. 가후쿠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때 분명 두 사람 사이에는 “무언가 일어났다”. 카메라는 말과 말 사이, 침묵과 공백을 담아냄으로써 말을 초과하는 그 어떤 순간들의 정보를 놓치지 않는다. 이윽고 터널을 빠져나간 사브를 뒤에서 카메라가 잡아주면 메인 테마 음악이 흐르며 장면이 완성된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이런 장면들이 겹치고 쌓여 너무 일찍, 혹은 뒤늦게 도착한 말과 진심 사이의 거리를 차츰 메우는 영화다. 고상하고 위악적인 중년 지식인 남성의 뒤틀린 속내가 시대착오적이거나 식상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붉은 사브 안팎에서 가후쿠와 미사키의 시간을 담은 시퀀스들은 숏/리버스숏 하나하나 숨 막히는 밀도로 채워져 있다. 말과 글로 전달되지 않을, 영화언어의 진실과 가능성이 여기에 있다. 히로시마를 안내해달라는 가후쿠의 요청에 거대한 공장과 평화의 공원으로 데려가는 미사키, 가후쿠와 미사키의 강변 장면 등 그 프레임과 숏들을 다 해체하자면 끝도 없을 것이다. 다만 여기서는 하나의 모티브에 대해 이야기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붉은 사브가 터널을 통과할 때마다 두 사람의 시간은 점차 하나의 시간 축으로 겹친다. 카메라는 뒤에서 사브가 앞으로 지나갈 궤적을 찍기도 하고, 어쩔 땐 리버스숏으로 사브가 지나온 길을 되돌아 찍기도 한다. 이 두숏 사이 간극을 줄여나가는 게 이 영화의 할 일이자 목적이며 전부다.

가후쿠와 미사키를 숏/리버스숏으로 분리하던 카메라는 후반으로 갈수록 점점 한장의 프레임 안에 두 사람을 담기 시작한다. 오토와 불륜 관계였던 다카즈키(오카다 마사키)가 오토의 칠성장어 꿈의 뒷이야기를 해준 그날, 가후쿠는 처음으로 미사키의 옆자리에 앉는다. 두 사람을 태운 붉은 사브에서 뒤를 돌아보는 카메라의 시선은 호텔에 내려놓은 다카즈키가 작은 점이 될 때까지 응시한다. 이윽고 데칼코마니의 접힌 무늬마냥 두 사람을 번갈아 찍던 카메라는 선루프 지붕 위로 내민 두 사람의 담배를 한숏에 담는다. 마치 구원을 기다리는 손길마냥, 혹은 죽은 사람에게 바치는 향마냥 차 위로 조심스레 내밀어진 담배와 손. 그리고 이 모든 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도심의 교차로를 찍는 익스트림 롱숏의 풍광은 이렇게 말을 거는 것 같다. “살아남은 자는 죽은 자를 기억해. 어떤 형태로든 그게 계속되지. 나와 너는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어. 살아가야 해. 괜찮아. 우린 틀림없이 괜찮을 거야.” 언젠가 가후쿠가 미사키에게 건넬 말은 이미 진즉에 장면으로 먼저 도착해 있었던 셈이다. (무대 혹은 영화라는 이름의) 거대한 리버스숏은 그렇게 말보다 먼저 도착해 관객의 뇌리에 자리 잡는다. 뒤늦게 도착한 말은 이미 준비된 무대 위에서 꽃을 피운다.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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