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매트릭스: 리저렉션'이 실패한 속편이 된 두 가지 이유
2022-01-12
글 : 오진우 (평론가)
추억은 추억일 때 아름답다

<매트릭스> 시리즈의 팬으로서 이번 영화에 대해 기대보다 우려가 컸다. 우려는 현실이 되었고 그것에 대해서 짚어보았다.

과거의 대중문화들이 현재로 다시 소환되고 있다. 사이먼 레이놀즈의 저서 <레트로 마니아>에 달린 부제처럼 ‘중독’에 가까운 수준으로 말이다. 음악으로 국한해서 보자면 ‘쎄시봉’을 필두로 7080이 붐이었다가 ‘토토가’의 90년대를 거쳐 이젠 ‘싸이월드’의 2000년대 초중반까지 올라왔다. 고개를 돌리면 바로 닿을 곳까지 왔다. 콘텐츠를 향유했던 장소는 물리적 공간에서 가상의 공간으로 이동했다. 이러한 공간에서의 공통의 추억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어쩌면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중반까지가 마지막 시기이자 무대가 아닐까 싶다. 그 시기에 진행된 PC의 광범위한 보급과 이후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콘텐츠를 다종다양한 방식으로 즐기게 되었고 사회는 전보다 개인화되고 파편화되기 시작한다.

이 마지막 시기에 등장했던 영화 중 문화 현상을 일으키고 아이콘이 된 <매트릭스>가 있다. 다시 보면서 느낀 것은 영화가 세상이 개인화되고 파편화되어 점차 가상의 세계에 몰입되어갈 것이라는 세기말의 불안감을 포착하고 있다는 점이다. 0과 1 사이를 자유롭게 거니는 네오(키아누 리브스)를 통해 시온이란 마지막 인류를 기계로부터 구원하는 내용의 <매트릭스> 시리즈는 진짜가 무엇이며 자유가 무엇인지를 물으며 안에서 밖으로 향하는 운동성을 선보였다. 2편과 3편이 1편에 비해 턱없이 못 미치는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영화사에 남을 시리즈임은 분명하다.

또 하나의 가상현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18년 만에 돌아온 4편 <매트릭스: 리저렉션>은 위에서 언급한 맥락에서 부활한 것은 아니었다. 단독 연출을 맡게 된 라나 워쇼스키 감독은 개인적인 상실과 그로 인한 슬픔으로 인해 이 시리즈를, 더 정확히는 네오와 트리니티(캐리앤 모스)를 부활시켰다고 밝혔다. 강산이 두번이나 바뀔 시간이다. 영화 밖 현실은 밖에서 안으로 더 깊게 파고들어왔다. 실재감과 몰입감을 제공하는 가상현실(VR)과 메타버스 등의 기술 혁신은 현실과 가상을 계속해서 뒤섞어버리고 있다. 나아가 현실과 가상을 구분 짓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점차 개의치 않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러한 감각으로 <매트릭스: 리저렉션>이 동시대에 유효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이번 4편은 여러모로 상당히 애매한 위치에 서 있는 작품이다. 추억은 추억일 때 가장 아름다운 법임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영화는 앞선 3부작에 확실하게 선을 긋는다. 나름의 차별화를 꾀하지만 패착에 가까운 수였다. 이 글에서 두 가지만 이야기하고자 한다.

하나는 또 하나의 가상현실이다. 영화는 게임을 활용해 또 하나의 매트릭스를 기존 매트릭스 내에 생성한다. 이때 게임의 이름은 ‘매트릭스’고, 창조자는 앤더슨(키아누 리브스)이다. 3편에서 장렬히 전사한 네오는 4편에서 기계들에 의해 부활하며 포드에 갇혀 다시 매트릭스 안에서 살게 된다. 그 안에서 그는 매트릭스란 게임으로 성공한 게임 디자이너 토마스 앤더슨으로 살고 있다. 영화는 그가 새롭게 개발 중인 ‘바이너리’(Binary)라는 게임에 접속하면서 시작한다. 1편에서 트리니티가 등장한 신을 다른 인물이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이를 벅스(제시카 헤닉)가 지켜보고 있다. 벅스는 NPC인 모피어스(야히아 압둘마틴 2세)를 게임에서 매트릭스로 꺼낸다. 이유는 네오를 찾기 위해서다. 이러한 설정은 <프리 가이>를 연상시키면서 극 초반에 흥미를 자아낸다. 게임을 통해 매트릭스를 메타적인 시선에서 조망하는 것 역시 좋은 설정이다. 하지만 영화는 더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게임에서 자신이 창조한 캐릭터가 앤더슨 앞에 나타나 게임처럼 자신을 매트릭스에서 꺼내주겠다고 말한다. 앤더슨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는 이를 정신착란으로 받아들이고 이에 대한 상담 치료를 받고 있다. 상담사는 파란 약을 처방해준다. 이 부분에서 기계들이 왜 결함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매트릭스 내 네오의 삶을 설계했는지 의구심이 들기 시작한다.

1편에서 네오가 검은 고양이를 보고 ‘데자뷔’라고 말하는데 이에 트리니티는 ‘기시감’은 매트릭스의 결함이라고 말한다. 4편에서 3부작의 이미지는 앤더슨의 삶에 중첩돼 등장하며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앤더슨은 그것을 게임 이미지로 받아들이지 자신의 기억인지는 꿈에도 모른다. <매트릭스>에 빚을 진 영화 중 하나인 <인셉션>에서도 현실과 꿈이 혼동되기에 기억을 토대로 꿈을 설계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이미 매트릭스란 공간에 균열이 가게 설정한 뒤 파란 알약으로 그 틈을 메우는 것은 기계들의 유약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기계들이 강력하지 않기에 포드에서 투명막을 찢고 나오는 네오의 모습을 스크린으로 다시 볼 때 팬심에 반가울지언정 강력한 탈출의 카타르시스가 일어나지는 않는다.

문화의 아이콘에서 시대착오적 속편으로

다른 하나는 사랑의 힘이다. 영화는 기계와의 전쟁보다 네오와 트리니티의 재회에 초점을 맞춘 듯하다. 반으로 쪼개진 하트 조각을 다시 합치는 과정처럼 보이는 영화는 이를 손을 통해 형상화한다. 4편에 나오는 3부작 이미지 중 맞잡은 두손이 반복해 등장한다. 하지만 매트릭스에서도 현실에서도 이들은 먼발치에서 서로를 바라볼 뿐이다. 기계들은 이들을 부활시키는 과정에서 서로 붙어 있을 때 엄청난 에너지가 나온다는 것을 알았다. 손을 붙잡으면 기계를 파괴시킬 에너 지가 뿜어지기에 살짝 떨어뜨려놓은 것이다. 매트릭스 안에서도 이들은 서로 멀리서 바라볼 뿐이다. 왜냐하면 기계들이 얼굴을 바꿨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인의 눈에서만 다른 얼굴로 비칠 뿐이었다. 둘은 서로의 얼굴을 네오와 트리니티로 인식한다. 트리니티는 매트릭스 안에서 티파니(캐리앤 모스)로 살아가며 아이가 둘 있는 기혼자다. 그런 그녀를 짝사랑하는 앤더슨은 우연한 기회에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하게 된다. 이때 테이블에 그녀의 얼굴이 살짝 다른 얼굴로 비쳤다 사라진다. 어쩌면 이들은 얼굴 스킨 코드 너머의 진짜 얼굴을 서로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붙잡은 손과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 매트릭스 공간은 계속해서 균열이 가고 있던 것이다. 3부작을 통해 기계들은 사랑의 강력한 힘을 체험했다. 이들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사랑을 에너지원으로 쓰는 것은 문명을 이룩한 기계를 우습게 본 설정이다.

<매트릭스: 리저렉션>은 네오와 트리니티의 부활에 무게를 둔 탓에 기계들의 설정에서 빈약함을 드러냈고 극의 균형감을 잃는 참극을 보여줬다. 이외에도 CG, 엉성한 슬로모션, 빛을 강조한 특유의 쨍한 톤의 이미지 등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집중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즐비하다. <매트릭스> 시리즈는 시대의 대운을 탔는지도 모른다. 이 시리즈가 빚진 선배 격인 영화 <블레이드 러너>는 시대에 조응하지 못했지만, 이후에 찬사를 받았다. <매트릭스: 리저렉션>은 시대에 조응하거나 앞서가지도 않았을뿐더러 1999년에 애매한 모습으로 머물러 있다. 그렇다고 추억 팔이나 팬 무비의 성격을 확실히 지닌 것도 아니다. 이 영화는 시대착오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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