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턴>(2007), <아이들…>(2010)을 연출한 이규만 감독이 10년 만에 장편영화를 선보인다. 2020년 초 촬영을 마친 작품이지만 코로나19로 개봉이 연기되면서 약 2년 만에 극장가에 안착하게 됐다. 서울경찰청 소속 경찰들의 마약조직 수사 과정을 좇으며 경찰의 본능과 윤리, 남자들의 우정을 조각하는 누아르영화다. 주인공 민재(최우식)는 상관의 강압수사를 재판에서 이실직고할 정도로 수사 원칙이 중요하다고 믿는 90년생 신입 경찰이다. 선배들의 눈총을 받던 중 감찰계장 황인호(박희순)의 호출을 받는데, 그에게 광역수사대 반장 강윤(조진웅)을 지켜보라는 내사 명령이 떨어진다. 광수대 에이스로 통하는 강윤은 범죄를 적발할 수만 있다면 위법 수사도 개의치 않는 경찰청 내 희대의 캐릭터다. 출처 불명의 막대한 후원금을 조성해 수사 자금으로 쓰면서 명품 슈트와 외제차를 소유하고 강남 고급빌라에 거주한다. 한편 이들 경찰의 맞은편에는 재벌가를 중심으로 마약을 유통하는 지하 업계의 일인자 나영빈(권율)과 나영빈의 자리를 노리는 동천파 보스 차동철(박명훈)이 있다. 영화는 강윤의 언더커버이자 강윤과 짝을 이룬 광수대 신입으로 이중의 역할을 수행하는 민재가 스스로 경찰의 도덕을 재구성해가는 과정을 따라간다.
제목 <경관의 피>는 조부와 부친에 이어 3대째 경찰이 된 민재의 가족사로부터 숙명과 딜레마를 읽어낸다. 극중에서 민재를 움직이는 힘은 수사 도중 죽은 아버지(박정범)가 공로에도 불구하고 순직을 인정받지 못한 것에 대한 의문과 슬픔이다. “3대에 걸친 경찰의 피”를 이유로 감찰계장도 민재를 스카우트할 정도지만 민재에게 아버지의 유산은 외려 불명예에 가깝다.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아버지의 죽음과 과거 행적을 파헤치는 일을 자신의 과업처럼 느끼는 그에게 강윤은 유사 아버지로 기능한다. 존경과 콤플렉스, 의심과 환멸이 뒤섞인 채로 자기 아버지와 상관의 그림자를 밟는 남자의 행적은 외롭고도 위태롭다.
혼란스러운 초심자와 모호한 베테랑. <경관의 피>에서 극의 긴장과 밀도를 높이는 것은 보통의 스펙트럼 위에 분명하게 표기되지 않는 두 주인공의 정체성이다. 감찰계장 황인호의 전언에 따르면 강윤은 악당에 가까운 존재이나, 그를 곁에서 지켜본 민재는 강윤을 움직이는 수사 논리와 전략에 일면 수긍한다. 강윤에겐 필요하다면 사채 조직에서 돈을 빌려 수사에 쓴 뒤 도박판에서 돈을 따 바로 되갚는 식의 두둑한 배짱이 있고, 월등히 발달된 특정 능력치를 가진 캐릭터가 곧 작품의 매력이 되어준다. 물론 강윤의 배포는 필요하다면 동료를 공격할 정도로 냉정하고 잔인한 면과도 연결된다. 폭력과 악을 가까이하던 탐정이 결국 그 자신도 어두워지고 만다는 누아르 캐릭터의 컨벤션을 배우 조진웅이 매력적으로 소화했다. 민재의 성장 서사이자 버디 무비의 관점에서 강윤의 양면성은 곧 선악이 공존하는 이 세계 자체를 숙고하도록 이끄는 좋은 통로다. 다만, 작품 안팎에서 여러 의미망이 꿈틀대는 것과 달리 두 인물이 정서적으로 접착되는 관계 진전의 묘사는 구체성이 부족해 다소 헐겁고 비약적이다.
<경관의 피>는 동명의 일본 소설을 각색했다. 일본 경찰 소설의 대가 사사키 조의 원작은 3대를 관통하며 이어지는 장대한 소설로, 중후하고 아련한 시대적 정취가 훨씬 강하다. 원작 소설을 즐긴 독자라면 작품의 중추라 할 수 있는 대하드라마적 분위기가 영화로 축약되는 과정에서 상당 부분 휘발된 것에 아쉬움을 표할 수도 있겠다. 이규만 감독의 영화는 3대째 경찰이 된 손자 캐릭터를 중심 삼아 아버지에 얽힌 과거를 일부 플래시백하는 정도에서 그친다. 하드보일드를 지향하면서도 그 위에 한결 뜨거운 감정의 온도를 채색하고 마는 한국 상업 누아르 특유의 스타일이 도드라지는 대목이다. 스타일의 완성도는 다소 아쉽지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집요한 수사 궤적을 밀어붙인 뚝심은 확고하고 묵직하게 남는다.
CHECK POINT
최우식의 연기 변신
아직은 어수룩하지만 열의만큼은 확실한 입문자를 연기하는 데 지금 한국영화계에서 최우식만큼 적역인 배우가 있을까. <경관의 피>는 그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이미지 위에 확실히 새로운 연기 변신을 더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최우식의 한결 남성적이고 날카로운 얼굴을 발견할 수 있으면서도, 여전히 전형적인 마초성과는 거리가 먼 품새 또한 영화에 숨통을 틔운다.
원작 소설의 중후한 향기
사사키 조의 <경관의 피>는 일본 근현대사의 격동까지 포괄하며 경찰의 태도, 그리고 가족의 초상을 뭉근하게 녹여낸 대작이다. 선 굵은 일본 미스터리 소설과 취향이 맞닿아 있다면 영화 <경관의 피>에서도 즐길 만한 코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에서는 2009년 <TV아사히>에서 동명의 드라마가 방영된 바 있다.
아버지와 아들의 영화
종종 기능적으로만 여성 인물을 배치해 오히려 볼멘소리를 자아내는 한국영화들이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경관의 피>는 차라리 심플하고 솔직한 영화일지도. 오로지 남성들의 세계에 집중하는 이 작품은 아들과 아버지, 그리고 유사 아버지와의 관계를 탐험하는 동안 지나친 신파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