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형국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엄연히 존재하는데 잘 얘기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 그런 얘기를 계속하려 한다.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모든 걸 지우고 싶었다. 가짜뉴스 말이다. 가짜뉴스로 인한 대중의 오해 말이다. 그것이 만든 타락한 시대 말이다. 피해자는 씻기 어려운 고통을 받는다. 많은 사람들이 진실을 믿는 게 아니라 믿고 싶은 걸 믿는다. 앞뒤 자른 다음 교묘하게 편집하면 손쉬운 분노는 삽시간에 퍼진다. 화를 낼 준비가 된 이들이 여기에 열광한다. SNS는 조작된 진실을 들불로 만든다. 개인은 내가 구성한(줄 알지만 말초적 알고리즘이 만든) 나의 미디어를 믿는다. 전통 언론들의 부화뇌동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다. 이제 당사자의 고통은 씻을 수 없는 것이 된다.
한국 미디어 이야기일까. 트럼프 시대를 가까스로 벗어났으나 여전히 그 망령이 잔존하는 미국 사회 이야기일까. 물론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2021, 이하 <노 웨이 홈>)의 모티브 이야기일 뿐이라고 읽어도 된다. 영화는 가짜뉴스로 신분이 노출된 피터 파커(톰 홀랜드)의 난감함에서 시작한다. 태평양 건너 우리가 이 영화를 어떻게 소비하든,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할리우드 영웅 서사 가운데에서도 당대의 사회상을 꽤나 즉각적·직접적으로 반영해온 프랜차이즈다. <스파이더맨: 홈커밍>(2017)의 빌런 벌처(마이클 키턴)는 전쟁 산업의 떡고물을 찾아 일자리를 만들어보려다 실패해 원한 감정에 빠진 블루칼라였고,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2019, 이하 <파 프롬 홈>)의 빌런 미스테리오(제이크 질런홀)는 환영으로 가짜뉴스를 제조하는 거짓 영웅이었다. <노 웨이 홈>은? 2020년대 미국인들의 마음속에 있는 그 무엇이다.
<노 웨이 홈>의 키워드를 꼽자면 ‘기억’과 ‘치료’를 들 수 있겠다. 영화는 지난 20년간 시리즈를 봐온 관객의 기억을 소환한 다음 영화 속 세계의 기억을 지운다. ‘선배’ 피터 파커들(토비 매과이어, 앤드류 가필드)은 각자의 기억을 바탕으로 ‘후배’ 피터 파커가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고 원한에서 헤어나도록 돕는다. 기억 속 빌런들도 하나둘 불려나온다. 스파이더맨들은 이들을 죽이기보다 치료하는 길을 택한다. 평론가 피터 데브뤼헤는 <버라이어티>에 이렇게 썼다. “피터 파커의 공감력은 그간 서구 문명이 범죄와 처벌, 힘과 권한에 대해 알고 있다고 여겨왔던 모든 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10대 캐릭터 서사에 완벽히 들어맞는 듯 보인다.” 여러 측면에서 문명의 전환점으로 일컬어지는 2020년대, 마블의 작가들이 미래 세대에 전하는 소망으로도 보인다.
이제 스파이더맨들을 통해 미국 사회의 좀더 큰 그림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시리즈가 시작된 2001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기로 하자. 할리우드 슈퍼히어로들이 언제는 미국을 대변하지 않았겠냐마는, 2001년은 정말이지 특수한 해였으니까.
공격당한 미국의 딜레마
미국에서 엔터테인먼트 범주로 분류되는 콘텐츠 가운데 9·11 테러를 가장 발 빠르게 반영한 사례가 다름 아닌 마블 코믹스였다. 2001년 12월, 그러니까 테러 석달 뒤 마블은 <마블의 영웅들>이라는 9·11 특집을 출간한다. 여기서 캡틴 아메리카는 세계무역센터 건물 2개 동이 무너진 자리에 두발을 굳게 딛고는 기필코 ‘어벤지’(복수)하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결코 깨질 일 없는 그의 방패는 꽤나 손상된 상태다. 공격받을 일 없다고 여겼던 미국 본토 혹은 미국인들의 자존심처럼. 이듬해 2월에는 <스파이더맨> 특별판이 발간된다. “그때 영웅들은 왜 아무것도 하지 않았나요.” 생존자들의 원망 어린 물음에 스파이더맨이 고개 숙여 답한다. “우리도 생각지 못했어요. 말도 안되고 이해도 안되는 일이었으니까요.”
이제 영화가 답할 차례였다. 이후 테러와 전쟁을 소재 삼은 영화들이 쏟아져나온 바에 대해 우리는 익히 알고 있지만, 개별 작품들의 전개 양상에 대해서는 한국어로 된 논의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국내 유통되는 담론은 빈약한 실정이다. 미국 내에선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새너제이국립대학교 사회학 교수이자 다큐멘터리 제작자인 톰 폴라드는 저서 <할리우드 9/11: 슈퍼 히어로, 슈퍼 빌런, 슈퍼 재난>을 통해 ‘포스트 9·11 영화’의 핵심 경향으로서 할리우드 대작 수십편을 분석한다. “9·11 이후 변화한 영화들의 흐름은 1940~50년대 필름누아르의 그것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게 그의 전제다. 미국 영화사 교과서에 큰 챕터 하나가 추가돼야 한다는 뜻이다.
폴라드 교수가 우선 강조하는 지점은 9·11 이후 할리우드에서, 영웅은 물론 악당과 재난의 위력이 갈수록 강해지는 형세다. 한쪽의 폭력이 강할수록 이에 맞서는 쪽의 폭력도 덩달아 거대해진다. 재난을 끝내고자 감행한 보복은 꼬리를 물 뿐 그칠 줄을 모른다. 가만, 이건 아이언맨-토니 스타크의 고뇌가 아닌가. 실제로 미국이 보복 전쟁을 시작한 이래 아프간에서 철군하기까지 20년간 현지의 수많은 민간인은 물론이고 미군 수천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조 단위의 달러가 투입됐다. 결과는? 테러는 계속됐고 전쟁의 빌미였던 대량살상무기는 애초에 있지도 않았으며 미군 철수 뒤 탈레반이 장악한 아프간은 더없이 비참해졌다. 대체 미국은 20년간 뭘 한 건가? 상업적 이유에서든 작가적 고민에서든, 할리우드는 이 질문을 계속하고 있다.
“9·11 이후 미국은 비밀 요원이 테러 용의자를 납치하고 고문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은밀한 사찰 아래에 두는 감시 사회로 변모했다. 많은 영화들은 폭력적이고 편집증적으로 변했다. 이러한 변화는 테러 자체뿐 아니라 그에 따른 전쟁, 애국법 제정, 국토안보부 설치, 국가 전체의 보안 조치 강화 등 일련의 관련 사안들에 대한 반응이었다.” (톰 폴라드, 앞의 책) 이 말에서 우리는 여러 편의 할리우드영화를 떠올리게 된다. 그 반경은 <본> 시리즈와 같은 첩보 장르에서 <주토피아>와 같은 디즈니 애니메이션까지 광범위하다. 슈퍼히어로 영화들이 그 중심에 위치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20세기 할리우드의 슈퍼히어로들은 미국을 대신해 나치와 싸우고 구소련을 물리쳤다. 당시 영웅들의 고뇌는 출생의 비밀, 연인을 지켜야 하는 문제 등 상대적으로 개인적인 것이었다. 21세기 대테러 전쟁에 참전한 슈퍼히어로들의 그것은 폭력을 통한 복수가 어디까지 정당한가와 같은 ‘공격당한 미국의 딜레마’로 수렴해간다. 이에 대해 <노 웨이 홈>이 내린 결론은 마블이 내놓은 2021년판 해답이다. 가짜뉴스를 지우고 악은 치료하기. 슈퍼히어로에게 흔한 정체성 고민 역시 자국의 힘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정의로운 일인지에 대한 미국인들의 걱정과 연관이 깊어진다.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보편적 명대사가 한결 구체적인 메시지로 다가오는 건 그래서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이와 관련한 논의의 허브에 아이언맨이 있다. 마블이 스파이더맨과 유사 부자 관계를 만든 다음 그 정신을 계승하도록 해둔 캐릭터다. 애초에 <아이언맨>(2008)에서 토니 스타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각성하게 한 것은 자신의 회사에서 만든 무기가 중동의 악당들에 의해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 설정이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의 출발점이라는 점 또한 유의미하게 기록해둬야겠다. 아이언맨이 1편과 2편에서 맞서는 악당들은 군수산업을 지속하려는 자들이다. 폭력은 돌고 돌 뿐 누군가 멈추지 않는 한 끝나지 않더라는 본질적 속성을 두눈으로 확인한 토니 스타크는, <어벤져스: 엔드게임>(2019)에서 안녕을 고하는 순간까지 같은 고뇌를 안고 살아간다. 이 지긋지긋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 목숨을 내걸기도 한다(<어벤져스>(2012)에선 핵미사일을 안은 채 지구 밖으로 날아간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2016)에서 ‘소코비아 사태’ 당시 아들을 잃은 한 여성의 원망을 듣는 이도 토니다. “우릴 위해 싸운다고? 당신 자신을 위해 싸우는 거겠지. 내 아들의 복수(어벤지)는 누가 해주는데?”
빌런은 현실을 반영한다
숱한 할리우드 영웅들이 미국 자체를 상징해왔지만, 중동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출구를 찾지 못하던 2010년대 중반, 이처럼 미국 입장에서 뼈아픈 대사가 등장하는 것은 쉽게 지나쳐지지 않는다. 뼛속까지 애국심 넘치는 군 출신의 캡틴 아메리카-스티브가 아이언맨-토니와 줄곧 의견 충돌을 일으키는 구성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이들의 갈등을 인류 보편적인 ‘강경파 대 온건파’의 대립으로만 보기엔, 미국 사회의 특수한 딜레마를 콕 집고 있다. <노 웨이 홈>에서 자유의 여신상에 설치 중인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가 떨어져내리는 설정이 이후 마블의 후속작들에서 어떤 고민 거리로 활용될지 관전 포인트로 남은 것도 지켜볼 대목이다.
이 흐름에 앞서 2000년대 후반 미국이 처한 상황을 살필 필요가 있다. 부시 대통령 재선 이후 최소한의 상식마저 저버린 듯한 미국 정부의 중동 정책은 다수 시민들의 근심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2007년엔 <본 얼티메이텀>과 <스파이더맨3>가 나왔고 이듬해 마블에선 <아이언맨>과 <인크레더블 헐크>가, 그리고 <다크 나이트>와 <핸콕>이 잇따라 개봉했다. <인크레더블 헐크>의 딜레마는 통제 불능의 야누스적인 괴력 자체다. <본 얼티메이텀>의 CIA는 “국익을 위해 어떤 일이든 다 하는 감시 프로그램”인 블랙 브라이어를 가동시키고, <다크 나이트>에선 배트맨(크리스찬 베일) 본인이 “고담시의 모든 휴대폰을 도청장치로 만들어” 고주파 감시 장치를 운용한다. 조커(히스 레저)가 거꾸로 매달려 배트맨과 데칼코마니처럼 마주 보고는 “너와 나는 평생 같이할 운명”이라고 말하는 장면은, 앞서 언급한 어벤져스 멤버들의 딜레마와 다르지 않다.
이 맥락에서 가장 시의성 있어 보이는 대목이 2008년 <핸콕> <스파이더맨3> <아이언맨> 등에서 잇따라 ‘망가진’ 슈퍼히어로들의 면모다. <핸콕>의 슈퍼 영웅(윌 스미스)은 미국의 상징인 독수리 문양과 함께 술주정뱅이로 등장해서는 자신의 힘을 마구 휘둘러 시민들의 공분을 산다. <스파이더맨3>의 피터 파커(토비 매과이어)는 한때 친구에게 연인을 빼앗겼다는 원한 감정에 휩싸여 동네 깡패처럼 군다. <아이언맨>의 도입부에서 무기를 팔러 다니는 토니 스타크는 난봉꾼에 가까웠다. 미국인들은 이들 장면에서 뭔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지구촌 동네방네에 군사력을 휘두르고 다니다 국제 깡패라는 비난을 들으며 명분도 실리도 잃어가던 자국 정부의 모습이 안타깝기 짝이 없던 차였다.
원한 감정이라는 키워드로 <아이언맨>과 <스파이더맨> 시리즈들의 여러 빌런들을 조망해도 맥락은 이어진다. <스파이더맨3>의 사진사 에디(토퍼 그레이스)가 베놈에 동화되는 과정이나, <아이언맨3>(2013)의 빌런 킬리언(가이 피어스)이 흑화한 것은 모멸감에서 비롯한 원한 감정이 출발점이었다. <파 프롬 홈>의 미스테리오에 동조하는 가짜뉴스 제작팀 멤버들은 토니 또는 토니의 회사로부터 멸시당한 기억을 품고 있는 이들이다. 즉 이들 시리즈의 여러 대목들은, 빌런의 악함만큼이나 원인 제공 측면에 주목하고 있다. 서방의 많은 지식인들이 자신들의 나라가 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길래 이토록 테러가 끊이지 않는지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꺼내놓던 시기였다.
앞서 2004년 <스파이더맨2> 당시만 해도 미국 대중의 심정이 이렇진 않았다. 질주하는 전철을 멈춰 세우려다 실신한 스파이더맨을 승객들이 도와주는 장면에서, 시민들은 9·11 당시 영웅으로 활약한 구조대원의 사진 한장을 떠올렸다. 평론가 샘 애덤스는 일간지 <슬레이트>에 ‘<스파이더맨2>가 9·11 이후 우리의 슬픔을 표현한 방법’이라는 제목의 기고를 통해 “이 장면은 뉴욕시의 평범한 영웅들에 대한 가장 큰 찬사”라고 쓰기도 했다. 이랬던 2004년의 정서가 2008년에 이르러 자기 분열적 영웅을 안쓰럽게 바라보는 심정으로 옮겨간 것이다. <스파이더맨3>의 빌런이 모래 폭풍을 일으키는 ‘샌드맨’으로 설정된 것은 미군이 중동 사막 지형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던 시기에 나온 것이어서 적잖이 직설적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스파이더맨이 샌드맨을 ‘용서’한다는 결말은, 2000년대 후반 당시 국제사회에서 미국이 취하는 태도에 대한 작가적 희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
순환 우주가 전하는 구원의 메시지
해석은 자유지만, 만약 대형 여객선이 바다에 침몰하고 수많은 고등학생들이 구조해달라고 외치는 장면이 영화에 나온다면 한국인들은 어떤 기억을 떠올릴까. <어벤져스>의 뉴욕 시가지 전투 장면에서 어떤 관객에게는 주인공들의 액션만 눈에 들어올지 모른다. 그 와중에 수십개 숏에 걸쳐 반복 투영되는 뉴욕 시민들의 대피 이미지를 보는 미국인들은 2001년 9월11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피터 파커는 토니 스타크로부터 첨단장비만 물려받은 게 아니다. 뉴욕을 근거지로 동시대 가장 시의적절한 테마를 불러옴으로써 미국 시민들의 근심 어린 기억을 현란한 도심 액션에 담는 것이다.
“영웅들은 이전보다 더 강력하지만 더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 우리 (미국인) 자신을 나타낸다. 모든 사람은 때때로 자신의 상상 속 슈퍼히어로 역할을 하며, 오늘날 영화의 빌런은 우리의 가장 깊은 두려움과 가장 끈질긴 편집증을 나타낸다. 9·11 이후 영화에서 영웅은 종종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다. 이 결함 많은 영웅은 관객 자신의 상상 속 영웅에게 영향을 줘 더 현실적이면서도 더 괴로워하게 된다. 9·11 이후의 영화들에서 관객은 한 만화 캐릭터가 말한 ‘우리는 적을 만났고, 그는 우리다’라는 유명한 대사를 떠올린다.” (톰 폴라드, 앞의 책)톰 홀랜드의 피터는 2001년 토비 매과이어의 피터가 살던 곳과 같은, 월세를 독촉받는 낡은 자취방에서 성인으로 새 출발하는 것으로 <노 웨이 홈>을 마무리한다. 그렇게 관객의 기억과 극중 등장인물의 기억이 돌고 돌며 시리즈는 선순환한다. 악당은 치료되고 우리는 치유된다. ‘우리는 적을 만났고, 그는 우리’라는 말을 돌이켜볼 때, 치료 대상은 ‘또 한번의 기회’(second chance)를 빼앗는 처절한 자본주의일 수 있고, 경험에서 온 경고를 무시한 채 생태계 훼손을 계속하다 팬데믹을 맞은 인류일 수도 있을 것이며, 트럼프 시대를 지나 미국 역사상 가장 길고도 성과 없는 전쟁을 이제야 끝낸 미국인들의 응어리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언제나 한발 늦게 깨닫고 재난을 반복하는 역사를 돌아보며, 우리는 영화 속 순환 우주가 인류에 전하는 구원적 메시지를 한층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