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블 코믹스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이 회사의 제작 방식이 굉장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작품의 주인이 작가가 아닌 회사라고? 작품을 그리고 있는 작가를 해고하고 다른 사람에게 작품을 줄 수도 있다고? 심지어 실제로 그런 일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니. 이건 너무 착취 아닌가.
당연하게도 <드래곤볼>은 도리야마 아키라의 것이고, <레드 문>은 황미나의 것이다. 그럼 <스파이더맨>은? 대체 몇명의 글 작가와 그림 작가가 달라붙어 이 만화를 제작해왔는지 헤아리기도 힘들다. 평행 우주에 스핀오프에 616-지구는 뭐고 얼티밋 유니버스는 또 뭔지 시리즈가 하도 많아 솔직히 지금도 잘 이해를 못하고 있다. <드래곤볼>은 이러나저러나 1권부터 마지막 권까지 쭈욱 읽으면 그만인데, <스파이더맨>은 뭐부터 사서 읽어야 하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이 불쌍한 거미 인간 이야기는 60년 가까운 기간 동안 무수한 작가들의 손을 거치며 더 빼먹을 뼛가루 하나 없을 정도로 달여지고 또 달여졌다. 자극적인 스토리를 수습할 수 없을 지경까지 끼얹은 다음 불쑥 스파이더맨을 다른 인물로 교체해버리거나, 뜬금없이 악마가 등장해 쓱싹 편리하게 모든 문제를 리셋해버리는 식의 무책임한 짓도 여러 번 반복됐다. 그걸로도 모자라 온갖 버전의 평행 우주 스파이더맨까지 양산되고 있다. 조금 과장을 보태서 등장인물들이 죄다 한번씩 방사능 거미에 물려보는 것 같다. 이러다 메이 숙모가 거미 인간이 되는 코믹북도 나오는 건 아닌지(설마, 이미 있는 건 아니겠지?).
영화판으로 넘어오면 상황은 더 복잡해진다. 마블이 스파이더맨을 ‘영구히’ 팔았다고? 스파이더맨의 주인이 소니라고? 여기까진 이해할 수 있다. 영화만 잘 만들어주면 되니까. 그런데 소니의 행보도 짜증나긴 마찬가지다. <스파이더맨> 영화를 3편까지 잘 만들어놓곤 갑자기 돌변해서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이라는 제목으로 리부트하더니, 이건 뭐 제대로 요리하지도 않고선 갑자기 옆집에서 더 맛있게 만들어드릴 테니 여기선 그만 잡수시라며 나를 식당에서 내쫓는 것이다. 아니, 대체 왜? 나는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맛있었단 말이야!아, 내 머리는 이제 한계다. 자본주의 따윈 꺼져버리라지. 사실 나는 스포츠 선수를 구단이 사고팔 수 있다는 개념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현대 프로 스포츠는 노예제를 용인하는 것인가?
음, 솔직히 좀 과장해서 이야기했다. 한참 비꼬며 공격했지만 이 방식이 완전 잘못됐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기업형 제작 방식의 장점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작가 한두 사람이 작품을 끌고 왔다면 스파이더맨이 60년 가까이 인기를 구가하는 장수 캐릭터가 되진 못했을 것이다. 오랜 연재 기간을 거치며 작가 개인의 피로도나 튀는 개성이 작품을 서서히 망가뜨려가는, 심지어 연재가 중단되어버리는 사례를 우리는 무수히 보아왔다. 여러 작품이 크로스오버하며 거대한 유니버스를 이루는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같은 초대형 이벤트 역시 기업이 모든 캐릭터의 판권을 소유했기에 선보일 수 있는 특별한 예술일 것이다.
더욱이 마블은 수십년간 쌓아온 기업형 제작 방식의 노하우를 백분 활용하면서도 기존 작품들의 꼬인 실타래에 얽매일 필요가 없는 새 스케치북을 마련했다. 바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라는 완벽한 백지를 말이다. <어벤져스>로 첫 팀업 무비를 성공적으로 선보인 마블은 프로레슬링 연출하듯 공격적으로 캐릭터들을 소개하며 영화 버전 유니버스를 본격적으로 확대해왔다. 그리고 10년간의 서사에 마침표를 찍을 캐릭터로 이번에도 역시나 스파이더맨을 꺼내들었다. 내막은 모르지만 소니에 비싼 대가를 치르고 잠시 빌려온 모양이다.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중단에 대한 배신감을 쉭쉭 코로 뿜으며 극장에서 마주하게 된 세 번째 스파이더맨 영화, <스파이더맨: 홈커밍>은 솔직히 재밌었다. 앞선 두 버전과 비교해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세 버전의 영화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스파이더맨 캐릭터를 해석했고, 어느 쪽이 정답이라 말할 것 없이 셋 모두 유니크한 매력을 뽐낸다. 토비 맥과이어의 피터 파커가 어수룩한 매력으로 충만하다면, 앤드류 가필드의 피터는 능글맞은 매력이 있다. 게다가 엠마 스톤과의 케미는 또 어떻고! 이들 커플의 눈빛만으로도 영화의 모든 개연성이 설득될 정도다.
반면 톰 홀랜드의 피터 파커는 소년의 매력을 지녔다. <스파이더맨: 홈커밍>은 스파이더맨의 아이덴티티 중 하나인 미성숙한 소년의 이미지에 집중한다. 이 영화의 빌런 벌쳐는 요상한 실험에 실패하거나 수상쩍은 기계장치에 추락한 슈퍼 악당이 아니다. 현실적인 이유로 적당한 수준의 악당 짓을 벌이며 먹고사는 인물일 따름이다. 해리 대신 투입된 네드는 상대적으로 덜 부담스러운 친구고, 일상 파트의 악역 플래시 역시 찌질하고 귀여워졌다. 메이 숙모의 역할도 커졌다. 이런 영리한 조정 덕분에 피터의 일상을 보다 평범하고 디테일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됐다.
후속편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에서 이 장점은 더욱 빛을 발한다. 피터, 네드, MJ 3인방의 티격태격하는 장면들은 바라보기만 해도 그저 흐뭇하다. 영웅으로서가 아닌 일상을 살아가는 10대로서의 고민과 성장. 앞선 영화들에선 찾아보기 힘들었던 새로운 재미다. 게다가 MCU에 소속된 덕분에 어벤져스 어른들의 도움도 조금은 기대해볼 수 있다. 그들과 함께 보라 외계인과 싸우기도 한다. 기특하게도 피터는 착실한 성장 과정을 밟아나간다. 그런 의미에서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인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은 조금 엇나간 완결편이다. 마블이 제 버릇 못 버리고 다시금 유니버스 놀이에 집착한 문제적 결과물이기도 하다. 더욱이 여러 복잡한 어른의 사정과 기업간 계약 조건이 스토리를 방해한 듯한 흔적도 엿보인다.
전작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의 결말은 스파이더맨 이야기의 가장 중대한 고비가 시작됨을 암시했다. 그 길고 지루한 고난을 이겨내고 선을 행하는 것이 스파이더맨 캐릭터의 가장 빛나는 가치일 터였다. 하지만 실제 뚜껑을 열어본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에서 피터가 겪는 고통과 고민은 원작보다 한없이 가볍고 단순하다. 왜냐하면 피터를 대신해 아파해줄 어른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그들이 서로의 빈곳을 채우며 친히 나서 장애물들을 치워주기 때문에 피터가 스스로 짊어지고 완수했어야 할 성장의 서사는 반쪽짜리로 전락하고 만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이미 한번 써먹은 암울한 분위기를 피하려던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이유야 어쨌든 MCU라는 유니버스가 방해물이 된 모양새다.
외적 완결성을 위해 내적 완결성을 많이 희생한 영화다. 모두를 치유하기 위해 일부러 상처를 피해간 영화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스포일러를 최대한 피해 설명하자면,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은 앞선 두 버전의 영화를 평행 우주로 설정함으로써 단지 3부작의 완결뿐 아니라 모든 스파이더맨 영화를 마무리짓는 데 성공했다. 스파이더맨의 팬이라면 누구나 만족할 수밖에 없는 치트키를 꺼내든 셈이다. 그렇기에 장면 장면이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유니크하다. 근데 이런 기획 두번은 안 했으면 좋겠다. 또 해서 먹힐 리도 없고.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의 성공으로 여러 스파이더맨 영화가 또 제작된다는 루머가 들려온다. 이제 그만 거미에게 자유를 주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