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리뷰] 문화대혁명이 한창이던 1970년대 중국 간쑤성 '원 세컨드'
2022-01-26
글 : 박정원 (영화평론가)

문화대혁명이 한창이던 1970년대 중국 간쑤성, 고비사막의 매서운 모래바람 사이로 지저분한 행색의 사내 장주성(장역)이 바쁘게 발걸음을 옮긴다. 노동교화소에 수감되었던 그가 탈출을 감행하여 다다른 곳은 다름 아닌 마을에서 상영될 영화의 필름통 앞이다. 오래전 헤어진 딸이 영화 상영 전에 나오는 뉴스 릴에 짧게 등장한다는 것을 전해 들은 장주성은 딸을 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영화 상영만을 기다린다. 그에게 딸의 모습이 담겨 있는 필름은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하다. 그러나 그날 밤, 장주성만큼 누추한 행색의 더벅머리 소녀 류가녀(류하오춘)가 나타나 필름통 앞을 서성이다 이내 필름 한통을 훔쳐 달아난다. 남동생을 위해 전등 갓을 장식할 자투리 필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를 본 장주성이 류가녀를 쫓으며 두 사람의 추격전이 시작된다. 딸을 보기 위해 필름을 지켜야 하는 장주성과 남동생을 위해 필름을 훔쳐 달아나려는 류가녀는 거친 사막을 무대로 끈질긴 싸움을 이어나간다.

쫓고 쫓기는 치열한 추격전 끝에 두 사람은 잠깐의 휴전기를 가지듯 한 식당에서 머리를 맞대고 국수를 먹는다. 그런 두 사람 앞에 마을의 필름 관리를 담당하는 영사기사 ‘판 영화’(범위)가 등장하면서, 영화는 본격적으로 자신이 ‘영화에 대한 영화’임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마땅히 즐길 거리가 없던 시절, 목이 빠져라 영화 상영을 기다리던 마을 사람들과 그런 사람들을 위해 필름을 관리하는 영사기사의 남다른 직업적 자부심은 볼거리가 넘쳐나는 오늘날의 관객에겐 쉽사리 와닿지 않을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배달 과정에서의 사고로 먼지가 묻고 꼬여버려 엉망이 된 필름을 마을 사람들이 함께 세척하고 건조시켜 복원하는 장면만큼은 분명한 인상을 남긴다.

한편 뺏고 빼앗기는 난투극의 장소였던 사막 한가운데에서 장주성과 류가녀는 서로의 사연을 전해 듣는다. ‘필름에 대한 집착’으로 맞서 싸우던 두 사람이 처절한 과거와 비참한 처지라는 공통점으로 마침내 연결되는 순간이다. 이때 영화는 인물들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그들을 둘러싼 사막으로 잠시 시선을 돌린다. 무수한 모래 알갱이 위로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고요한 풍경은 이들의 곤궁한 삶을 말없이 어루만진다. 우여곡절 끝에 장주성은 스크린에 비친 ‘중화 뉴스 22호’ 속에서 딸의 모습을 발견하지만, <원 세컨드>라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딸이 등장하는 시간은 단 1초에 지나지 않는다. 그 1초를 위해 교화소로부터 탈출을 감행한 장주성에겐 모진 대가가 기다리고 있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장주성의 눈에 비친 딸의 모습은 찰나를 넘어선 영원으로 마음속에 새겨진다. 장이머우 감독은 “어렸을 때 보았던 영화들의 몇몇 장면은 아마 영원히 잊지 못할 거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설렘과 행복에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영화와 우리는 함께 자란다. 꿈은 평생 우리와 함께한다. 평생 기억에 남을 한편의 영화가 있고, 그 영화가 기억에 남는 것은 영화 그 자체뿐만 아니라 배우라는 별을 바라볼 때의 기대와 동경을 영화가 포착해내기 때문일 것이다”라는 제작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그렇게 <원 세컨드>는 셀룰로이드 필름의 촉각적인 감각과 자전적 경험에서 우러나온 향수 어린 시선을 바탕으로, 찰나의 순간을 영원의 기억으로 탈바꿈하는 영화적 힘을 바라본다.

2019년 제69회 베를린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었던 <원 세컨드>는 월드 프리미어 상영일 전날 돌연 출품이 취소된 바 있다. 당시 공식적인 입장은 ‘기술적인 문제’ 때문이었지만 현지 언론은 중국 정부의 개입 등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후 다시 공개되어 2021년 제46회 토론토국제영화제, 제69회 산세바스티안국제영화제,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등에서 상영되었다. 제15회 아시아 필름 어워즈에서 감독상, 신인배우상(류하오춘)을 수상했다.

CHECK POINT

새 얼굴, 류하오춘

더벅머리와 꼬질꼬질한 행색으로도 감춰지지 않는 반짝이는 눈빛을 지닌 신예의 등장이다. 3천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류가녀 역할에 발탁된 배우 류하오춘은 때로는 당돌한 필름 도둑으로, 때로는 하나뿐인 남동생을 살뜰히 챙기는 누나로 영화에서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입을 꾹 다문 채 눈물 흘릴 때 그 매력이 극대화된다.

고비사막

영화에서 주인공 이상으로 큰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은 영화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고비사막이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딸의 모습이 담긴 1초를 보기 위해 거친 모래바람을 뚫고 걸었던 장주성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다시 사막을 찾는다. 사막 한복판에서 장주성이 느끼는 복잡한 감정이 스크린 너머로 애절하게 전달된다.

<영웅아녀>

‘영화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바치는 헌사’라는 타이틀이 붙은 영화 <원 세컨드>에는 한국 관객으로서 다소 불편함을 느낄 수 있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극중 마을에서 상영되는 영화 <영웅아녀>(1964)가 한국전쟁을 철저히 중국의 시각에서 그린 대표적인 애국주의 선전 영화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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