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규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스티븐 스필버그가 덧붙인 ‘지하’는 이상한 방식으로 영화에 개입하는 장소다. 그 장소의 면모를 고민해봤다.
도심 곳곳의 격자형 도로와 건물들을 정적인 부감으로 보여주는 1961년 원작 영화의 도입부와 달리, 스티븐 스필버그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잔해로 가득한 공사장의 바닥을 비추면서 스크린을 연다. 지면에서 출발한 카메라는 공중에 떠올라 링컨 센터를 짓고 있는 뉴욕의 건설 현장으로 진입한다. 유려한 원테이크로 공간의 전경을 담아내던 화면은 천천히 하강하며 또 다른 바닥에 도달하고, 바닥의 철문이 열리자 어린 노동자의 몸이 지하로부터 걸어나온다. 뮤지컬영화 특유의 춤추고 노래하는 신체의 감각적 자극이 시작되기도 전에 당도한 이 매혹적인 오프닝은 스필버그가 설정한 한 가지 전제를 환기한다. 여기에는 춤과 음악의 표현이 펼쳐지기 이전에 인물들의 신체가 발을 디디고 선 지반, 그리고 그 밑바닥의 지하(underground)가 있다. 스필버그가 선택한 첫 번째 뮤지컬 영화의 무대가 되는 그곳은 서로 다른 혈통과 인종과 집단이 뒤섞여 공통의 구역을 점유하고 있는, 미국이라는 물질적이고 구체적인 이름의 영화적 시공간이다.
지하로부터
공사장 바닥의 철문을 열고 구멍으로부터 걸어나오는 남자의 모습에서 시작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지면과 지하 공간의 모티브를 집요하게 주시하는 것은 이 영화가 집을 잃은 자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과 깊이 관련을 맺는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운명적인 사랑과 집단 간의 적대라는 격렬한 감정에 사로잡힌 개별 인물들의 사연 아래서 그들을 공통적으로 붙드는 퇴거의 불안을 심어둔다. 재개발과 철거로 인해 머물 수 있는 구역이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거리에는 강제이주와 추방에 반대하는 이민자들의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백인들로 이루어진 제트파와 푸에르토리코인들 집단인 샤크파를 막론하고 이러한 불안은 그들이 서 있는 지반을 잠식한다. 이러한 퇴거의 불안은 물리적인 구분에 구애받지 않고 전이되기에 표면적인 드라마의 갈등과 더불어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규칙으로 화면에 공존하고 있다.
스필버그의 영화가 호기심과 불안을 동반한 채로 집을 나서는 주인공의 여정으로 펼쳐지곤 한다면,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그 출발점에서부터 여정을 가능케 하는 집이 부재한 상태에 놓여 있다. 제트파의 리더인 리프(마이크 파이스트)는 가석방으로 감옥에서 출소한 토니(안셀 엘고트)가 머무는 발렌티나의 가게 지하실을 두고 “여전히 감옥에 있는 것 같다”고 비아냥거리는데, 그가 들먹이는 조롱 섞인 비유는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 비유는 토니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다. 첫 장면에서처럼, 거주할 장소를 잃고 개발지구에서 쫓겨난 자들은 모두 지하에 임시적으로 갇혀 있다. 일상적 공간을 춤과 노래의 무대로 전환하는 고전기 뮤지컬영화의 형식은 그런 추방된 자들을 거리로 불러들이고 무차별적인 자유를 허용하는 영화적 형식으로 기능한다. 거주지가 사라진 이들을 스크린에 전시하는 한낮의 무대로서의 뮤지컬이 이곳에 있다. 이는 춤과 노래, 집단적 공동체의 얼굴과 몸짓을 환대하는 미국영화의 오랜 이상과 또한 연결된다.
스필버그는 지면에 결부된 특정한 역사성을 환기한다. 영화의 초반부, 인종주의자인 슈랭크 경관은 샤크파와 분쟁을 일으키는 제트파 일원들을 세워놓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곳에서 자란 백인들은 모두 여길 떠났어. 너희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여길 못 떠나고 너흴 낳았지. 너흰 삼류인생을 사는 마지막 세대일 거다”. 그런가 하면 샤크파와의 패싸움을 앞두고 권총을 사는 리프에게 총기판매상 사내는 의미심장한 말을 건넨다. “널 보면 네 아버지가 떠올라.” 변형 중인 국가의 풍경에는 상속되는 가족의 기록이 숨겨져 있다. 그들은 무너진 세계의 끝자락에 선 자들이다. 이 영화에서는 토니와 리프는 물론 다른 제트파 일원들의 가족관계가 직접적으로 묘사되는 법이 없으므로(법적 공간의 질서를 위반하고 경찰서 내부를 소란스러운 유희의 난장판으로 전환하는 넘버인 <Gee, Officer Krupke!>의 가사에서 일부 암시적으로 들려올 뿐이다) 이런 대사들은 서사에 기여하지 않는 불확정적인 얼룩으로 남는다. 그러나 한편으로 드라마와 무관한 말의 지위로 인해 그 얼룩은 서사의 한 부분으로 활용되거나 기각되지 않고 영화의 표면에 끝까지 잔존한다. 말하자면, 인물들이 밟고 서는 도시의 바닥은 역사적 기억의 단면이 된다. 이러한 대사들이 가리키는 함의는 유년기에 매혹된 영화를 60년의 시간이 지나 리메이크하기로 결심하고 그 작품의 엔딩 크레딧에 ‘아버지에게 바친다(For Dad)’는 문구를 새겨넣은 스필버그 자신이 무엇보다 의식한 각색의 결과일 것이다.
영화에 드러나는 이들의 욕망과 시선은 그들의 것만이 아니다. 이 땅에서 자라고 도시의 건물들을 짓고 월세방에서 아이를 기르며 살아온 그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로부터, 일일이 이름을 거론할 수 없는 수많은 앞선 세대로부터 유래한 공조의 결과물이다. 여전히 스필버그의 영화에서 가족은 벗어날 수 없는 강박적인 구속으로 암시된다. 뮤지컬의 형식 아래서 제트파의 일원들은 도시를 무대로 누구보다도 자유롭게 거리를 횡단하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지만, 역설적으로 그들은 보이지 않는 아버지들의 자장에 묶여 있다. 이를 통해 단순한 뮤지컬 시퀀스의 무대로 기능하던 뉴욕의 시가지와 빈민가는 두 가지 구체적인 맥락을 획득한다. 하나는 언급한 것처럼 그곳이 앞선 이들의 흔적이 새겨진 땅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의 흔적이 지금 우리의 폭력으로 분출되고 있다는 것이다. 토니는 마리아에게 고백한다. 한 사람을 죽일 뻔했고, 그것 때문에 감옥에 갇혀 있었다고. 춤과 음악의 역동적인 표현에 가려져 있지만, 그는 언제든 폭력에 가담하고 지하로 되돌아가야 한다. 이것이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지면 위에서 벌어지는 지하와 무대 사이의 형식적 긴장이다. 뮤지컬영화의 양식적 장치들이 눈과 귀를 가리지 않는다면, 폭력의 기제가 그곳에 틈입하고 만다.
미국영화라는 추(醜)
스필버그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할리우드의 위대한 신화를 빌려오면서 그 신화의 배면에 감도는 공동체의 위기와 도덕적 타락을 부인하지 않는다. 부인하지 않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오늘날의 미국을 건축한 동력의 일부라는 명제를 받아들여 신화를 재구성한다. 감탄스러울 만큼 아름다운 몸짓의 기록 한편에는 추한 행적들이 있다. 흥미롭게도, 아름다운 몸짓의 주체와 저열하고 추한 행위의 주체는 다르지 않다. 마리아의 뺨을 매만지던 토니의 애틋한 손은 베르나르도를 살해하는 살인자의 피묻은 손으로 언제든 교환될 수 있다. 영화의 후반부에 아니타가 던지는 힐난의 표현을 빌리자면 스필버그는 미국, 그중에서도 뉴욕이라는 이 매혹적인 영화의 장소가 “짐승들이 득실대는 추악한 도시”임을 자각한다. 그러한 자각이 놀라운 각성은 아니다. 주목할 것은 스필버그가 필름누아르나 갱스터 영화처럼 도시를 장악한 어둠을 영화 자체의 모호한 어둠으로 수용하는 대신, 그와 정반대로 어느 장르보다 체계화된 양식으로 빛나는 뮤지컬영화의 영토에서 그 어둠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들의 더러운 손과 발에서 뮤지컬영화의 아름다운 몸짓이 산출된다. 스필버그는 로버트 와이즈의 원작 영화는 물론이고 그 자신이 21세기에 만든 어느 영화와 비교하더라도 손에 꼽을 만한 역동적인 리듬과 움직임의 활력으로 스크린을 밝게 물들이면서, 그 이야기에 내재된 그림자를 응시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그토록 선명한 밝음으로 인해 우리는 비로소 지하에 새겨진 어둠을 마주할 수 있는 걸지도 모른다.
영화의 후반부, 두 집단의 리더인 리프와 베르나르도가 예기치 않게 죽는 사고가 발생하고 발렌티나의 가게에 제트파가 모인다. 스필버그는 살인 사건이 벌어진 직후에 제트파 일원들이 불안한 마음을 다잡고 공동체성을 재확인하는 원작의 집단 군무 장면을 삭제하고 가게에 모인 이들의 표정을, 절망적으로 가라앉은 공기를 포착한다.
그들의 무표정이 함의하는 의미를 반사하는 것은 스필버그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에서 트랜스젠더 남성 캐릭터로 각색된 애니바디스의 얼굴이다. 제트파 내부의 외부자처럼 여겨지던 그는 여느 때처럼 알 수 없는 곳에서 불쑥 나타나 절망에 빠진 제트파 일원들에게 토니를 찾아보자고 독려한 뒤, 제트파의 한 멤버에게 처음으로 “친구”라는 말을 듣고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상황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문을 열고 나가는 애니바디스의 눈앞에 아니타가 나타나자 그는 미소를 거두고 굳어진 표정으로 멈춰 서서 이곳을 떠나라고 속삭인다. 옅은 미소에서 굳은 무표정으로 이행하는 순간적인 표정 변화는 애니바디스 자신이 속해 있는 제트파라는 공동체의 성질을 관류한다. 트랜스젠더 동료를 우애로 승인하는 집단은, 그러나 유색인종 여성을 거리낌없이 적대할 만큼의 천진한 폭력성을 분출하리라는 것을 애니바디스는 간파하고 있다. 스필버그는 문 앞에 멈춰 선 애니바디스가 마주하는 잠깐의 망설임과 혼란을 놓치지 않는다. 그 딜레마는 어쩌면 자신이 사랑한 60년 전의 이야기를 다시 만들면서 연출자 스스로 느낀 감정과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감탄스러운 대목은 제트파와 샤크파가 체육관에 한데 모여 춤을 추고 마리아와 토니가 처음으로 맞닥뜨리는 무도회 시퀀스이다. 완벽하게 조율된 실내 공간에서의 인물들의 동선과 절묘하게 이뤄지는 시퀀스 내의 시점 전환, 그리고 마리아와 토니가 서로를 마주 보고 무대 뒤편으로 걸어가기까지 감정의 진폭과 결부되는 걸음의 속도가 음악적 리듬에 맞춰 놀라운 시청각적 합주로 그려지는 구간이다. 이 시퀀스와 유사한 요소를 공유하지만, 정반대의 결과를 만드는 장면이 아니타가 가게에 들어서면서 주어진다. 제트파의 남자들은 노래를 틀고 춤을 추면서 아니타를 추행하기 시작한다. 아름다운 합주의 순간이 추악한 집단 강간으로, 춤과 노래의 유혹이 폭력과 공포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소란을 듣고 지하실에서 나온 발렌티나가 상황을 제지하면서 말한다. “나는 너희들을 어릴 때부터 봐왔어. 너희의 이름과 얼굴을 모두 알고 있지. 그런 놈들이 이제는 강간범이 되었구나.” 카메라는 고개를 숙이고 침묵하는 제트파 일원들의 얼굴에 숏을 할당해 지켜본다. 스필버그는 그들의 수치를 빼놓지 않고 비추면서, 강간범이 되어버린 이들의 얼굴이 곧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지탱해온 얼굴임을 외면하지 않는다.
Underworld U.S.A.
스필버그가 선택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결말은 원작 영화의 장면 구성과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 토니가 마리아를 품에 안은 채로 총에 맞는 원작의 화면이 멜로드라마적 정서를 심화한다면, 리메이크의 엔딩은 거리를 두고 있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 다가가는 순간에 총이 발사된다. 토니는 총에 맞은 채로 비틀거리며 밤거리를 걷는다. 이 최후의 몸짓은 원작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보다는 그와 같은 해에 만들어진 새무얼 풀러의 <미국의 암흑가(Underworld U.S.A.)>의 마지막을 떠올리게 한다.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범죄로 얼룩진 암흑가에 뛰어든 남자는 결국 총알에 맞고 비틀거리다 거리의 쓰레기통 앞에 쓰러진다. 폭력적인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다짐하던 토니는 끝내 총에 맞고 거리에서 쓰러진다. 총알이 박힌 몸으로 더러운 거리를 비틀거리는 그들은 미국이라는 지하 세계(Underworld), 미국이라는 오염된 땅을 배회하는 자들이다. 당연하게도, 비틀거리는 토니의 몸짓은 뮤지컬영화가 표현하는 가볍고 역동적인 몸짓이 아니다. 중력을 벗어나 하늘을 날 것만 같은 몸과 총에 맞아 힘겹게 걸음을 내딛는 몸. 전자는 사라지고 후자가 남는다. 이제 무대는 끝났고, 지면에 깔린 어둠은 뮤지컬의 밝은 속성을 집어삼킨다.
제트파 일원들이 숨을 거둔 토니의 시체를 들어올린다. 남겨진 자들의 제스처로 숭고한 종교적 이미지를 구성하는 이 장면은 미국의 원리를 관통하려는 열망에 가닿는다. 스필버그는 그 이미지에서 분열된 미국(인)의 이중적 표상을 발견한다. 리프의 말을 빌리면 토니는 “웨스트 사이드의 전설”이다. 전설의 죽음이 숭고한 이미지로 그려지는 이 순간은 하지만 폭력과 강간을 일삼던 자들의 더러운 손이 살인자의 몸을 들어올리는 오욕의 순간이기도 하다. 표면적으로는 사랑의 열망이 전설로 추어올려지는 영원불멸의 결말이 그려지는 것이지만, 이미지의 층위에서 본다면 이는 폭력에 잠식된 자들이 지하의 어둠으로 되돌아가는 수순에 다름 아니다. 전설을 완수하는 저 손은 우리를 붕괴시키는 또 다른 손이다.
공중에 떠오른 시선이 바닥으로 하강하던 첫 장면의 카메라워크에 조응하듯 마지막 장면에서 카메라는 지면으로부터 천천히 멀어지면서 한밤의 거리를 내려다본다. 토니와 마리아가 사랑의 노래를 부르던 발코니를 연상케 하는 계단의 격자형 틀이 프레임에 나타나고 거리의 남겨진 이들을 시각적으로 가둔다. 뮤지컬의 무대가 사라진다면, 거리에 남은 자들의 몸이 아름다운 신체로 자리잡을 수 있는 공간의 형식도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프레임 바깥으로 사라지는 마지막 장면에서 그들은 도입부 바닥의 철문이 열리기 직전에서처럼, 혹은 리프가 토니에게 “감옥에 있는 것 같다”고 말했던 것처럼 또 다시 철창의 틀에 갇혀 있다.
고전기 뮤지컬영화의 마술적인 동작과 감정의 활력을 동시대의 스크린에 재현해내려는 열망으로 가득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스필버그의 걸작이라고 말할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스필버그가 2010년대에 이르러 만든 영화 가운데 가장 순수하고 근원적인 영화의 매혹에 몰두하는 작업이면서, 동시에 영화가 구축해온 ‘순수한’ 매혹이 얼마나 미심쩍고 추한 것들로 이루어졌는지 되돌아보는 성찰의 영화이기도 하다. 스필버그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에는 영화에 담기지 않은 것, 눈에 보이지 않은 것들과의 긴장이 덧붙여져 있다. 과도한 해석일지 모르나, 이런 역설적인 몰두와 성찰의 이중주는 영화가 사라진 세계에서 영화가 아닌 것들과의 결합을 통해 영화적 몰입의 방법을 검토하던 <레디 플레이어 원>과 더불어 스필버그가 영화 내부와 바깥의 경계면에서 영화의 윤곽을 다시 모색하려는 의식적 영화 만들기의 한 사례라고 가정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