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하우스 오브 구찌', 구치는 어떻게 구찌에서 사라졌을까
2022-02-02
글 : 이보라 (영화평론가)
구찌 아이러니

영화 속 어떤 틈새들을 생각하며 ‘구찌’가 걸린 아이러니의 덫은 무엇일까 곱씹어보았다.

<하우스 오브 구찌>에는 톰 포드가 등장한다. 당시 톰 포드는 구찌가 낡고 한물간 브랜드로 쇠락해갈 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아 반등의 기회를 마련하면서 스스로도 유능한 디자이너로 인정받았고, 영화에도 이에 관한 일화가 삽입된다. 사실 포드 개인에 관한 서사는 그다지 많이 할애되지 않아 그저 소소한 에피소드쯤으로 그치는 듯한 인상도 있지만, 그렇다고 그의 존재가 패션에 다문한 관객층을 위해 새겨진 이스터 에그 정도로만 기능하는 건 아닌 것 같다. 달리 말하자면 (관객 개개의 배경과 맥락에 따라 정보의 입지가 달라진다는 엄연한 사실 위에서) 파트리치아나 마우리치오, 알도, 파올로의 이름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조금 생소하다. 영화에서도 그렇지만 그들의 이름이 ‘이름’ 이상으로 받아들여질 때는 성(姓) 구치를 함께 언급할 때이며 심지어 그럴 때조차 그들의 존재감은 브랜드 구찌라는 네임밸류에 하염없이 귀속된다. 영화는 각 캐릭터를 개성 있게 연출하려 제각각 열심히 설명하지만 그 개성적 측면에 몰두한 탓에 도리어 인물들은 몰개성한 지경에 이르고, 관객에게 이들은 실제적으로 공명하기보다 극영화라는 픽션에 어울려 보이는 데 그친다.

구치들’ 사이에서 톰 포드가 기입되는 방식

그 와중에 눈에 띄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톰 포드다. 영화에서 당시의 그는 아직 20대 후반의 수줍은 청년에 불과해 보이지만, 현대 관객에게 <하우스 오브 구찌>에서 제일 유명한 이는 다름 아닌 톰 포드다. 그의 이름은 고유명사로서 분명한 오리지널리티를 지닌, 이름 이상의 무엇이다. 그가 구찌의 명품 브랜드로서의 명성을 탈환하도록 이끌었다는 사실은 <하우스 오브 구찌>를 이루는 여러 삽화 중에서도 (구치 가문의 아무개를 다 합쳐도 비근하지 않을 만큼) 가장 널리 알려진 정보이며, 그래서 그의 존재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에서 무엇보다도 ‘실화적인’ 감각을 제공하는 역할로 작용한다. 그렇다면 궁금해진다. 왜 톰 포드는 반짝이듯 등장해서는 돌연 사라져버릴까(그는 들뜬 표정으로 “엄마에게 전화해야겠어요”라고 말한 뒤 극에서 완전히 퇴장한다). 이 너무도 평이한, 그래서 예사로운 상업영화 이상의 가치는 달리 없는 <하우스 오브 구찌>에서 조금이나마 호기심의 기미가 있다면 바로 그 지점이다.

<하우스 오브 구찌>가 노정하는 사랑과 반목과 인정투쟁과 권력욕은 결국 구치 가문이 이 사달이 나기까지의 막후를 일러주기 위한 여정이다. 어떤 사달이냐,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자막이 일러주듯 구찌에 구치가 없어지기까지의 과정이다. 이는 자명하게도 톰 포드라는, 바깥의 ‘오리지널한’ 인재가 이곳을 쇄신했으니 이제 구찌 내부에는 구치가 없(어도 된)다는 전언으로, 그래서 톰 포드는 실화에 기반을 둔 이 서사에서 자연히 재현되어야 할 역할인 동시에 구치가 소거되어가는 과정을 탐닉하듯 전개하는 이 영화에서 필수적인 분기점으로 기능해야 했을 것이다. 톰 포드의 일시적인 (서사적) 개입은 와해된 ‘식구’를 드러내게 되고, 이 막간은 구치라는 거대 가문-자본-커뮤니티에 모종의 균열을 염두에 두도록 만든다. 톰 포드가 시종 자신의 분량을 챙기는 것보다 이렇듯 잠깐 틈입하다 마는 것은 이후 더욱 파국으로 치달을 구치의 귀추에 긴장을 불어넣게 된다. 영화가 톰 포드를 기입하는 방식은 그리하여 아주 잠깐이지만 응당 불가결한 요소로 자리한다.

진부해진 스타일

그런데 이 영화를 말하면서 본편의 시작과 끝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다. 수미상응을 이루는 이 장면은 중년의 마우리치오(애덤 드라이버)가 살해되기 직전, 카페에서 잠깐의 휴식을 취하고 여유롭게 자전거를 타는 모습을 그린다. 그리고 건물에 들어설 때 누군가 뒤에서 그의 이름을 부른다. 영화를 다 본 후의 사후적 서술이므로 ‘살해되기 직전’이라고 정리했지만, 처음 관람할 때 파트리치아 레지아니(레이디 가가)의 보이스 오버와 함께 제시되는 이 장면은 구찌라는 명망 높은 브랜드와 그에 대한 대중의 열망을 요약하는 적당한 도입쯤으로 인식된다. 그리고 다시, 두 시간 반이 넘어 이 장면이 등장할 때 그제야 우리는 이것이 그의 죽기 직전 모습임을 알게 된다.

고백하자면 처음 본편의 오프닝 속 마우리치오를 보며 딱히 중년의 남성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극중 이 시점에서 그는 대략 40대 중반이다). 근사한 시계, 클래식한 뿔테 안경을 쓴 채 다리를 꼬고 커피를 마시는 마우리치오, 더욱이 생생히 자전거를 타는 그의 모습에는 소위 통용되는 중년이라는 연상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어딘가 섹슈얼하고 나르시시즘적인 면모가 가미되어 있다(이는 배우 애덤 드라이버의 매력과 밀착된 듯 보이면서도, 그가 그간 잘 맡지 않았던 부류의 캐릭터라는 점에서 미묘한 접합과 괴리의 화학작용이 일어난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이 짧은 신 안에서도 숏을 쪼개 시계와 슈트의 소매 등을 일일이 제시하므로, 여기서 그는 우리의 응시를 ‘받는’ 대상으로서 적합해 보인다(또한 그는 내내 보호라는 명목으로 집사에 의해 일상을 감시당한다).

이 장면에서 관객에게 발각되는 것은 마우리치오의 연령 따위와 같은, 그를 이루는 모종의 세밀한 내적 항목들이 아니라 차라리 인물의 가장 바깥 층위를 이루는 전체로서 통합된 ‘스타일’은 아닐까.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에 한번 더 등장할 때 (비슷한 형식의 영화들이 대개 그렇듯) 이는 우리에게 맨 처음 보인 것이 어떻게 달리 보이느냐의 문제를 마주하게 만든다.

세련되고 도회적인 신사로 보였던 마우리치오가 결말에 다시 등장할 때는 자신이 곧 권총에 맞아 비루하게 죽을 거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가엽고 무능한 사내로 보인다(이쯤에서 영화는 로돌포와 알도, 파올로와 마우리치오로 이어지는 ‘고개 숙인 남성’을 재현하는 데 강박적으로 골몰한다). 영화는 구치의 수십년간을 경유하는 러닝타임 내내 그 ‘스타일’이 흡수하지 못하는 허접한 가문의 내막을 열거한다. 그럼으로써 그가 ‘다시’ 보일 때 그는 근사한 것에서 영락없이 진부한 것으로 전락한다. 게다가 그 스타일이란 허망하게도 언제든 복제 가능한 것이다. 극중 파트리치아는 가정부가 그의 형편으로는 절대 사기 힘든 구찌 가방을 가져온 걸 보고 놀라 어디서 샀냐고 묻는다. 알고 보니 그건 헛가게에 널리고 널린 모조품이다. 파트리치아는 자신들의 고귀한 예술이 한낱 시장 바닥에 유통될 뿐만 아니라 감쪽같이 모사된다는 사실에 치를 떨며 분노하는데, 알도(알 파치노)는 이는 대중에게 ‘환상’을 심어주기 위한 전략의 일환과 다를 바 없다며 그 사태를 문제 삼지 않는다. 스스로 복제를 허용한 구찌는 바깥의 새로운 ‘오리지널리티’에 의해 다시금 명망을 회복하지만 내부의 식구들은 허물어지는 역설에 빠진다. 그리하여 관객 눈앞에 펼쳐진 그 스타일이란 종장에 이르러 얼마나 호들갑스럽고 더없이 무상한 것인지를 상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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