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런트 라인]
'킹메이커'를 보며 지금의 한국 민주주의를 생각하다
2022-02-23
글 : 송형국 (영화평론가)
대권보다 시민권

[송형국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영화란 현실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완성되는 것임을 뚜렷이 보여준 사례라고 보았다.

<킹메이커>에는 좀처럼 떼어내기 어려운 두 가지가 들러붙어 있다. 첫째, 대선 국면이라는 개봉 시기 탓에 어쩔 수 없이 작품에 얹히는 관객의 심상. 둘째, 인물 설정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화면에 붙여놓은 기호로서의 빛과 그림자. 전자는 제작진의 본의와 다르게 빚어진 사회적 현상이고 후자는 감독이 공들여 의도한 것이지만, 공히 영화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이 글은 전자에 대한 긴 감상과 후자에 대한 짧은 언급이자, 영화 비평이라기보다 사회 비평에 가까운 소견이다.

역대 유례를 찾기 힘든 ‘비호감 대선’의 와중에 <킹메이커>를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 영화가 애초 계획대로 2020년에 개봉했다면 어땠을까. 2010년대 종반부에 시나리오가 쓰였고 2년 전 촬영을 마친 이후로도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수차례 개봉이 미뤄진 끝에, <킹메이커>는 ‘영화를 영화 자체로만 보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형국에 놓였다. 인터넷상에는 현재 대선 후보들의 TV 토론 태도와 50여년 전 정치인들의 격을 비교하는 반응이 잇따르고 ‘저때는 그래도 대의명분이란 게 있었다’는 취지의 관람 후기가 이어지고 있다. 대선 정국에 모종의 의도를 지닌 작품이라는, 근거 없는 오해를 드러내는 네티즌도 적잖이 눈에 띈다.

그래서 오랜 유예 끝에 개봉한 <킹메이커>는 영화가 재현(presentation)하는 것과 관객이 떠올리는 표상(re-presentation) 사이에서 얼마나 많은 것들이 달라붙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 사례가 될 참이다. 예컨대 이 영화가 이른바 조국 사태로 사회 갈등이 고조된 시점에 개봉했을 경우 관객의 표상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상상해보면, 영화란 영화 자체로 존재할 수 없으며 현실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꿈틀대는 유기체라는 속성을 새삼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이 맥락에서 우리는 다음의 극중 대화를 꼼꼼히 돌아볼 필요가 있다. <킹메이커>의 감정적 하이라이트인 김운범(설경구)과 서창대(이선균)의 결별 장면. 두 사람의 가치관이 맞붙는다.

저들이 틀리다고 우리가 옳은 게 아니다

“이 자리에 나를 앉힌 건 자네도 나도 아니여. 국민이지.” (김운범) “국민들이라고요? 그게 대체 누군데요? 걔네는 그냥 구슬리면 믿고 말하면 듣고 시키면 하는 존재입니다!”(서창대)

서창대의 말은 “민중은 개·돼지”라는 한 고위 공직자의 실제 망언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지만, 우리에겐 다소 다르게 다가온다. 이 지점까지 러닝타임의 3분의 2 이상을 서창대와 함께 달려온 다수의 관객이라면 대부분 그럴 것이다. 극중 절대다수의 에피소드들은 실제 기록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서창대의 선거 전략은 알고 보면 치졸한 것이었지만 줄곧 먹혀들었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은근한 마음으로 주 인공의 성공을 기대하지만, 개·돼지가 아닌 우리는 정색하고 다시 물어야 한다. 우리는 그냥 구슬리면 믿고 말하면 듣고 시키면 하는 존재인가. 김운범이 반박한다.

“그럼 4·19 때 자유당 무너뜨린 건 누구여. 3·1운동 때 목숨 걸어가믄서 만세운동했던 것은 누구고.”(김운범) “그래서 세상이 바뀌었습니까? 독재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고요, 친일했던 새끼들은 아직 떵떵거리면서 잘 살고 있습니다. 저들이 그럴 수 있는 게 그 잘난 국민들 때문이라고요!”(서창대)

서창대의 재반박에서 틀린 곳을 찾기 어렵다. 더욱이 이 말은 적잖이 현재적이다. 설사 금권 선거가 판을 쳐도 그들에게 권력을 부여하는 건 국민들의 한표다. 독재자의 딸이라는 배경 말고는 이렇다 할 정치적 업적 하나 없는 사람을 대통령 자리에 앉힌 것도 국민들의 한표다. 그렇다면 차디찬 광화문 광장에 모여 촛불을 든 끝에 합법적이고 평화적으로 대통령을 끌어내린 건 누구인가. 그래서 세상이 바뀌었나. 그 잘난 국민들은 어디에 있는가. 김운범이 다시 묻는다.

“그라믄 우린 저들이랑 뭐가 다르당가.”(김운범) “저들은 틀렸고 우리는 옳으니까요. 그게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까지 싸운 거 아닙니까.”(서창대)

이번엔 서창대가 틀렸다. 이어지는 김운범의 답은, 이 영화가 2019~20년 즈음에 개봉하는 편이 좀더 시의적절했을 것이란 생각도 들게 한다. 당시 한국 민주주의가 참담하게 후퇴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은 그저 이기기만을 위한 싸움이여. 아무런 대의도 없이 네 편 내 편 진영만 남은 싸움. 저들이 틀렸다고 해서 우리가 다 옳은 것은 아니여. 자네 같은 생각으로 수단이 목적을 삼켜불면, 나라 팔아먹는 것도 독재하는 것마냥 합리화시킬 수 있는 것이네. 자네는 준비가 안된 것이 아니고, 정치를 하면 안되는 사람이었네. 절대로.”

저들의 틀림이 우리의 옳음을 보장하지 않는다. 서창대는 집권 세력의 금권 선거에 맞서 신분 사칭과 거짓 선동을 일삼았다. ‘목적이 옳으면 수단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라는 딜레마는 이 영화의 문을 여는 손잡이에 불과하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좀더 깊은 고민거리와 만난다. 우리는 지난 몇해 사이 숱한 ‘내로남불’을 목도했고 그 와중에 누군가는 시대의 구원자인 양 추앙받았다. 핵심은 그를 그 자리에 앉힌 건 누구도 아닌 시민들이라는 점이다. 그 작동원리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배우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아버지이기도 한 영국의 계관시인 세실 데이 루이스는 파시즘과 싸워온 당대 풍경을 바라보다 이렇게 말했다. “정직한 꿈을 꾸며 살았던 우리가 나쁜 사람들을 더 나쁜 사람들과 비교해 옹호하는 것이 이 시대의 논리다.”

현대 민주주의에서 메시아란 있을 수 없다. 한두명의 인물에 좌지우지되는 사회라면 이미 민주사회가 아니다. 그럼에도 박정희 부부의 사진을 대들보에 걸어놓고 온 마음을 의탁하며 살아가는 누군가의 신념 체계는, 오늘날 SNS 계정 프로필난에 자신이 열렬히 지지하는 유력 인사의 얼굴로 대체돼 21세기형 정치 양극화를 낳고 있다. 2020년을 전후해 전개된 한국의 정치 양극화는 영화 속 1960~70년대의 그것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 자발적인 팬덤에 의해 구성되고 있다. 갈등의 떡고물을 먹고사는 어떤 정치인은 이를 즐기기라도 하듯 분열을 부추기면서, 이를 정의라고 착각한다.

혐오만 남은 정치 양극화

양극화는 다원화의 반대말이다. 다원화는 민주주의의 전제다. 정치 양극화 사회는 대화와 토론이 있어야 할 자리를 비방과 혐오로 채운다. 양극단의 경계에서 민주주의를 숙고해보려는 노력은 어느 쪽에도 발붙이기 어렵고 그런 시도는 매국적 행위로 매도되기 십상이다. 양극만 남은 사회에서 어떤 자칭 진보주의자는 여성을 차별하고 어떤 자칭 페미니스트는 난민을 혐오한다. “다원주의 없는 시민사회는 그 정의상 시민사회가 아니다. 이러한 조건에서는 시대와 사회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이념, 가치, 사상이 창출되기 어렵고, 또한 언론의 자유, 이견, 비판이 허용되기 어렵다. 동시에 사회의 다양한 기능/직능 이익들과 사회적 계층 구조의 차이를 결집하여 대표할 수 있는 정치적 대표의 체계와 아울러 정당 체계를 건강하게 발전시킬 수 있는 토대는 취약해지거나, 소멸된다.” (최장집, <한국정치연구> 제29집)

<킹메이커>에서는 김운범과 결별한 서창대의 막후 전략으로 우리 국민들 사이에 영호남 갈등이 촉발된다(허구로 가미된 대목이지만 시기적으로는 역사적 사실에 가깝다). 정책으로 승부하면 지게 생겼다는 판단에 따라 집권 세력이 여론 양극화를 조장했다. 영남에선 ‘호남 출신들이 우리 자리를 죄다 빼앗아갈 것’이라며 불안을 부추겼고 호남에선 반대로 부추겼다. 이 양상은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을 지지하는 세력의 그것과 유사한 속성을 지닌다. 이들의 열광적인 배타주의는, 미국 주류 세력의 자리를 잃어가는 백인 남성과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라는 정체성이 비뚤어진 방식으로 만난 결과였다. 적지 않은 백인 남성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지위에 불안을 느끼자 이민족 차별과 중국 혐오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들의 불안은 ‘중남미 출신과 중국이 우리 자리를 죄다 빼앗아갈 것’이라는 트럼프의 혐오 추동에 화답했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불안으로 인한 자발적 배타주의는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최근에는 집단 극화된 열성 팬덤이 인터넷 부족주의로 무장한 다음, 특정 인물의 지지 여부에 따라 참과 거짓을 가르고 있다. 불안한 이들은 쉽사리 강자에게 자신을 의탁하고 욕망을 투영한다. “불안한 인간은 온갖 부류의 독재자들에게 자신의 자유를 넘겨주거나, 스스로 기계의 작은 톱니가 되어 호의호식하며, 자유로운 인간이 아니라 자동인형 같은 인간이 되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힌다.”(에리히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영화의 에필로그 앞, 즉 사실상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림자’ 서창대는 말 그대로 그림자가 되어 아스팔트 바닥에 스민다. 제2, 제3의 서창대는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까. 나는 서창대가 2022년의 선거판에서 암약했다면 그의 전략은 여전히 먹혀들지도 모르겠다는, 못된 염려를 하고 있다. 현재 우리는 그 종류도 다채로운 ‘갈라치기’ 전략을 목도하지만 막후에 있는 누군가는 지금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을 것이다. 정치인들은 의도적으로 짤막한 막말을 내뱉고, 반대편 극단에 있는 시민들이 힘차게 비난을 쏟아내면 갈등에 부화뇌동하는 언론에 의해 확대 재생산되면서 양극단의 결집만 남는다. 극렬한 팬덤은 반대편을 똘똘 뭉치게 만드는 한편 확신이 적은 중간층의 유입을 차단함으로써 세력을 키우기는커녕 스스로를 쪼그라들게 한다. 다름 아닌 서창대의 갈등 전략이 성공한 원리다.

영화의 끝이 1988년인 이유

에필로그로 가보자. 무려 김운범의 대선 패배 직후인 1988년이다. 이 영화의 끝이 1987년 민주화운동의 한복판도, 1997년 대선 승리의 한 장면도 아니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럴 리는 없지만, 87년 또는 97년의 서창대가 군중 속에서 (극중 종종 연출된 장면처럼) 멀리서나마 김운범의 활약을 지켜보며 미소 짓는 결말은 충분히 가능하다. 김운범에 대한 미안함과 연민, 존경심이 남아 있을 서창대로서는 매력은 없지만 제법 설득되는 결말이다. 하지만 변성현 감독이 말하려는 건 그런 게 아니다. 예컨대 <1987>(감독 장준환)은 어느 대목에서 영화를 끝맺었는가. <1987>은 왜 ‘그 이후’를 보여주지 않는가. <킹메이커>는 왜 ‘1987 이후’를 콕 집어 보여주는가. 1980년생 신진 감독의 세계관이 한국의 근현대사를 스크린에 담는 방식은 우리 영화사에 유의미하게 기록해둘 대목이다.

상영시간의 대부분에서 서창대는 김운범과 같은 방향을 보고 있다. 결별 장면에서조차 두 사람은 정면으로 마주 보지 않는다. 둘이 한 화면 안에 들어올 때 종종 김운범이 앞쪽에 클로즈업으로 잡혀 있으면 저 깊이 뒤쪽에 조그맣게 서창대가 서 있다. 감독의 전작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이하 <불한당>)에서도 종종 보이는 이 구도는 두 남자의 마음이 서로에게 가닿을 듯 말 듯한 심리를 효과적으로 담는다(<불한당>에서 고집스럽게 사용한, ‘근경 후 원경’ 배치를 통해 인물들 사이의 관계를 조망하는 편집은 이번엔 애써 자제한 것으로 보인다. <불한당>의 형식과 가장 대조되는 대목으로, 조망보다는 이입에 우선순위를 두고 가까운 위치에 선 카메라가 인물 또는 그림자를 눈에 띄게 보여주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 영화의 조명과 그림자 표현에 대해서는 대중영화로서 충분히 쉽게 묘사됐거니와 세간에 넉넉한 언급이 오간 만큼 더 말을 얹을 필요는 없어 보이지만, 상징 기호로서 지나치게 작품에 접착돼 있는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두 인물이 토론을 벌일 때도 이들은 나란히 앉아 대화하곤 한다. 에필로그에 이르러서야 둘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는다. 마지막 숏은 김운범의 빈자리를 서창대가 바라보는 측면 숏이다. 이 장면이 1987년 민주화의 커다란 성취 직후에 온 참담한 패배, 즉 직선제를 쟁취해 치른 대선에서 직선제를 항복한 자에게 대권을 내준 결과임을 떠올리면 섬뜩해지기까지 한다.

제2의 서창대는 지금 김운범이라는 대의가 사라진 자리를 응시하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촛불’이라는 커다란 성취 직후 우리는 우리의 민주주의를 어디로 내보낸 걸까. 저 빈자리에 우리는 누구를, 혹은 어떤 가치를 앉힐 것인가.

그로부터 35년, 애써 얻어낸 민주주의는 심지어 낭비되고 있는 듯 보인다. 이 낭비의 동력은 불안이며 이를 과잉 유통하는 것은 SNS 알고리즘이다. 경제에서도 낭비는 불안에서 나온다. 일찍이 소스타인 베블런이 <유한계급론>을 통해 짚었듯 경제 양극화 사회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해 과시적 소비에 몰두한다. 남들이 욕망하는 포르셰나 샤넬은 그래서 터무니없는 값에도 잘만 팔린다. 정치 양극화 사회에서는 불안한 이들이 자신의 정의를 강변함으로써 정체성을 확인하려 한다. 그들은 오늘도 누군가 의도를 갖고 자체 제작한 카드 뉴스를 진실이라 믿고 퍼나르며 사실과 멀어진다. ‘같은 편’에서 선망하는 인물에 자신을 의탁함으로써 자본종속국가에서 정치가 세상을 구원할 것으로 오판한다.

불안한 자아는 같은 편끼리의 응축 안에서만 가까스로 숨을 쉰다. “오늘날 ‘같은 것의 테러’는 모든 삶의 영역으로 확산한다. 정보와 데이터를 쌓으면서도 어떤 지식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체험과 흥분을 애타게 추구하면서도 언제나 같은 상태로 남아 있다. 친구와 팔로워를 쌓으면서도 어떤 타자도 만나지 못한다.” (한병철, <타자의 추방>) 구태 정치 전략가 서창대는 타자를 분리하고 추방하는 방식으로 국민을 분열시켰다. 그는 “이겨야 대의를 이룬다”라고 주장했지만 이긴 이후 대의를 설계할 수 없다면 “정치를 하면 안되는 사람”일 뿐이다. 이것이 <킹메이커>가 1987년 이후 새로운 세상을 설계하지 못한 빈자리를 보여준 뜻이라고 나는 보았다. 대권이 누구에게 가느냐보다, 한 사람의 대통령과 그 권력이 국민의 절반을 불행하게 만들지 못하도록 하는 힘 있는 시민권이 더 중하다는 뜻이다. 곧 대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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