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마이클 사노스키 감독의 빛나는 데뷔작, 니콜라스 케이지의 환상적 복귀작 '피그'
2022-02-25
글 : 송경원
시간이 위로가 될 때

니콜라스 케이지가 돌아왔다. 마이클 사노스키 감독의 데뷔작 <피그>는 지난해 전미비평가위원회 최우수데뷔작품상, 라스베이거스비평가협회 남우주연상, 심지어 전미비평가협회 동물연기상까지 각종 시상식에서 호평받으며 수상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오랜만에 돌아온 니콜라스 케이지의 묵직한 연기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반갑다. 트러플 돼지를 잃은 남자가 돼지를 찾아 떠나는 여정 속에 스며드는 복잡한 감정의 소용돌이는 니콜라스 케이지의 육체를 통해 생생하게 전달되며, 그가 여전히 스크린을 장악하는 배우라는 사실을 새삼 증명한다. 돼지를 잃은 남자가 마음을 잃은 사람들을 만나는 이야기, <피그>의 아름다운 위로를 전한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위로는 기다림이다. 상처가 아무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과 마주할 때 곤란함을 느낀다면 당신이 매우 상냥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라는 증거다. 상실의 공허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실은 아무것도 없다. 거대한 균열 앞에서 거의 모든 말이 무력해지고 마음에 닿지 못한 채 흩어지기 마련이다. 그럴 때 흔히 시간이 약이라고들 한다. 감히 ‘너를 이해한다’는 어설픈 말 대신 스스로 상실을 받아들이고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가만히 기다려주는, 상냥한 인내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대체로 맞는 말이다. 다만 ‘시간이 약’이라는 문장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생략되어 있다.

우선 시간의 흐름은 사람마다 공평하지 않다. 인생의 결정적인 조각을 잃어버릴 때 때론 시간이 정지하는 경우도 있다. 상처를 마주 보는 것조차 힘들어 거대한 껍질 속에 틀어박힌 사람 앞에선 아무리 기다려봤자 소용이 없다. 그럴 땐 마치 알을 깨고 나오는 새처럼 안과 밖에서 두드려야 한다. 안에서 미동이 없다면 바깥에서라도 두드려야 한다. 니콜라스 케이지 주연의 <피그>는 아내의 죽음 후 15년간 속세를 떠나 숲속에서 은둔 생활을 택한 남자의 멈춰버린 시계를 다시 돌린다. 한때 포틀랜드의 요식업계를 흔들었던 전설적인 셰프 로빈 펠트(니콜라스 케이지)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허무를 견디지 못하고 껍질 속에 숨었다. 숲속에서 트러플 돼지와 함께 버섯을 채취하는 로빈 펠트, 아니 롭의 삶은 일체의 변화를 거부한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리가 습격하여 돼지를 강탈하자 그는 돼지를 찾기 위해 드디어 무거운 걸음을 뗀다.

세개의 요리, 세 가지 사연, 그리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잔잔히 흐르는 강물에서 출발한 카메라는 울창한 나무 사이로 햇살이 커튼처럼 내리쬐는 고요한 숲속에 도착한다. 롭은 돼지와 함께 트러플을 채취하고 직접 만든 요리로 끼니를 때운다. 언뜻 평화로워 보이는 순간이지만 그것이 얇은 살얼음 같은 위장이란 게 얼마 지나지 않아 드러난다. 롭은 ‘로니’라고 적힌 테이프를 차마 재생하지 못하며, 무언가로부터 도망치고 있음을 암시한다. 잠시 뒤 롭의 사연을 미처 궁금해할 틈도 없이 누군가로부터 돼지를 강탈당하고, 롭은 자신의 트러플을 거래하는 푸드 바이어 아미르(알렉스 울프)를 데리고 범인들을 찾으러 도시로 나간다. <피그>는 잃어버린 돼지를 찾기 위한 롭의 짧은 여정을 따라간다. 그전에 롭에게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는 사실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롭의 고장난 시계가 돼지가 사라지면서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 그것이 영화를 움직이는 전부다. 다시 말해 시간의 물리적인 밀도 같은 건 의미 없다. 시간은 늘 상대적이고 롭에겐 15년간의 은둔 생활보다 단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일이 훨씬 의미 있다. 초반 숲속을 벗어날 때 롭의 녹슨 차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장면은 일련의 상황을 직설적으로 화면 위에 새긴다. <피그>는 정지한 채 녹슬어버린 시간에 다시 기름칠을 하는 과정에 대한 기록이다.

영화는 롭이 과거 포틀랜드를 주름잡던 요리사였다는 사실을 한참 뒤에 알려준다. 그전까지 롭을 둘러싼 분위기는 마치 <존 윅>(2014)처럼 암살자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베일에 싸여 있다. 후줄근해 보이는 아저씨가 도시의 지하 격투장을 운영하는 사람과 연이 닿고, 거침없이 단서를 추적해나가는 모습은 이 영화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의아하게 만든다.

하지만 엉뚱한 길로 들어서지 않도록 잡아주는 것이 롭의 과거이자 정체성이기도 한 요리다. <피그>는 세개의 챕터로 이뤄져 있다. 첫 번째 챕터는 ‘시골식 버섯타르트’. 갓 채취한 버섯으로 직접 만들어 먹는 이 요리는 롭의 소박하고 단조로운 일상을 상징한다. 두 번째 요리는 ‘엄마표 프렌치토스트와 해체주의 가리비 요리’다. 챕터 제목만 듣고 의아할 수 있겠지만 조금만 따라가다보면 이내 감이 잡힌다. 요리에는 각 인물들의 사연이 깃들어 있고 롭은 이 요리들을 통해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의 기억을 환기시킨다. 음식만큼 삶의 단면들을 녹여내기 적절한 대상도 드물다. 살기 위해 매일 먹는 것들 속에 일상이 녹아들고 소중한 기억들이 깨알같이 박힐 수 있다. 롭은 천생 요리사다. 남루한 숙소에서 뒹굴며 트러플 채취를 해도, 흠씬 두들겨 맞아도 영혼에 새겨진 진실을 가릴 수 없다.

<피그>에서 트러플 돼지를 찾아가는 경로는 일종의 맥거핀에 가깝다. 아니면 정지된 인물을 움직이기 위한 최소한의 미끼라고 해도 좋겠다. 이 여정의 노트 위에 빼곡히 적히는 건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의 삶이다. 롭은 자신이 요리를 접대한 사람들의 순간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 세상을 떠나 껍질 속에 틀어박혔던 남자는 요리를 보자마자 그 순간들을 하나씩 기억해낸다. 어쩌면 롭이 그동안 정지된 시간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가능한 기적인지도 모르겠다. 롭은 사람들을 마주할 때마다 원하지 않아도 요리를 떠올리고 각자가 잃어버린 것들의 무게를 새삼 일깨운다. 그것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이기에 건넬 수 있는, 작은 위로다. 꿈을 좇는다는 이유로, 바쁘다는 핑계로 우리가 길 위에 흘려버린 것들. 영화는 롭이 돼지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과 요리를 매칭시켜 삶의 소중한 가치들을 새삼 일깨운다.

상실과 슬픔의 페이지를 넘기는 법

사람들이 하는 착각이 하나 있다. 위로는 일방적으로 건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거울과도 같다. 위로의 자리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한다. 롭의 의도와 무관하게 요리를 통해 기억을 되살리는 일련의 행위는 롭의 삶에도 변화를 안긴다. 상처를 외면하고 시간을 얼려버렸던 남자는 결국 요리와 인생을 매칭시키는 과정에서 비로소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사실 여기에 거창한 위로나 대단한 성찰 같은 건 없다. 이미 우리가 힐링 서적에서 무수히 접한, 마음의 위안을 전한다는 수많은 이야기 속에서 반복해온 또 하나의 위로가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이 진부한 상실과 회복의 드라마가 심금을 울리는 건 이 영화가 설명하지 않고 기다릴 줄 알기 때문이다. 정확히 <피그>의 카메라는 인물의 슬픔이 화면 전반에 번질 때까지 차분히 기다린다.

<피그>는 전반적으로 불친절하다. 인물의 감정을 정확히 묘사하지 않고 사연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주변의 사물, 둘러싼 공기, 한숨을 몰아쉬는 시간을 통해 감정의 정황을 전한다. 덜 구체적이고 모호할수록 더욱 큰 공명을 불러일으키는 일련의 과정은 작은 물결에서 큰 파도로 확장되는 롭의 행보를 고스란히 닮았다. 그리고 퍼져나간 파도는 다시 돌아오기 마련이다. 마이클 사노스키 감독은 트러플 돼지를 훔쳐가는 걸 막기 위해 밤새 보초를 선다는 이야기에 영감을 받아 <피그>의 시나리오를 썼다. 그렇게 재미난 에피소드에서 출발한 아이디어는 사람에 대한 탁월한 관찰이 더해져 끝내 슬픔의 얼굴을 포착한다. 감독은 이번 영화를 통해 “상실감과 슬픔이 자연스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이 익숙하면서도 범상치 않은 영화의 성취는 여기서 비롯된다. <피그>는 인물을 억지로 일으켜 세우고 위로의 꽃다발을 안기는 대신 온몸으로 슬픔을, 잃어버린 것들을 마주하는 시간을 바라보는 영화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상실의 크기를 체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영화 말미, 롭은 트러플 돼지의 행방을 알고 나서 한 가지 상상을 해본다. “만약 내가 그 아이를 찾으러 나서지 않았다면 내 머릿속에서는 그 아이가 아직 살아 있을거란 거야.” 아미르는 답한다. “그래도 죽은 거예요.” 맞다. 진실은 변하지 않는다. 잃어버린 것은 잃어버린 것이다. 다만 그걸 받아들이기까지 필요한 시간은 각자 다르다. 슬픔을 떠나보내기 위해서는 먼저 슬픔을 마주 봐야 한다는, 당연하지만 잔혹한 진실. 롭이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를 받아들이기까지 필요했던 시간은 15년이었을까, 아니면 돼지를 잃어버린 며칠간이었을까. 모르겠다. 알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 롭의 시계는 이제 다시 흘러가리라는 사실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위로는 주어지는 결과가 아니라 오직 과정으로 성립한다. 어떤 짓을 해도 사태는 해결되지 않고, 상처가 회복되는 기적 같은 건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잃어버린 것을 되돌리는 건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그 무력함을 알고 있음에도 끝내 외면하지 못하는 따뜻한 마음들이 모여, 마치 거대한 상처와도 같은 이 세상이 유지된다. 세상을 등졌던 롭조차 그랬던 것처럼.

니콜라스 케이지에 의한, 니콜라스 케이지를 위한

상실이란 단어를 배우의 육체로 다시 빚으면 아마도 니콜라스 케이지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을까. 상실과 허무의 얼굴을 제대로 표현했던 <라스베가스를 떠나며>(1995)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니콜라스 케이지는 오랜 방황을 거친 후 다시금 초심으로 돌아가 <피그>에서 그 재능을 꽃피운다. “감독 마이클 사노스키에게는 최고의 데뷔작, 배우 니콜라스 케이지에게는 환상적인 복귀작”(<데일리 텔레그래프>)이라는 평은 <피그>의 성취를 정확히 설명하고 있다. 니콜라스 케이지는 감독의 데뷔작인 이 작품에 출연을 결정한 건 “상실에 대한 명상 같은 영화”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2000년대 화려한 비상과 추락을 반복한 자신의 굴곡진 커리어와 <피그> 속 사내의 모습이 겹치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마이클 사노스키 감독은 여기에 포틀랜드의 대자연과 소박한 도시의 풍경, 그리고 영혼을 들여다보는 요리를 버무려 절묘한 드라마로 조리해냈다.

또 하나의 주인공, 트러플 돼지 브랜디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 성공을 꿈꾸는 푸드 바이어 아미르, 포틀랜드 지하 파이트클럽의 호스트 에드거, 한때 롭 밑에서 일을 배운 포틀랜드 최고 레스토랑의 수석 셰프 데이비드 등 롭을 둘러싼 인물들은 여럿 있지만 영화 속 최고의 파트너는 아무래도 트러플 돼지다. 초반에만 잠깐 나오고 실종됨에도 불구하고 그녀(영화 내내 그녀라고 불린다)의 존재감은 영화 전반을 지배한다. 브랜디라고 불리는 이 돼지는 CG가 아니다. 마이클 사노스키 감독은 실제 포틀랜드 농장에서 발견한 돼지를 캐스팅했고, 그녀는 다정한 성격과 사랑스러움으로 촬영장의 인기 스타가 됐다. 니콜라스 케이지는 “브랜디는 돈을 받은 만큼 일할 줄 아는 프로 배우”였다고 파트너를 회상한다. 안타깝게도 브랜디는 촬영이 끝나고 한참 뒤 턱 염증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지만 북미비평가협회는 이 명배우에게 동물연기상을 선사하며 그녀의 활약을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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