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는 기회다. 식상하기 이를 데 없는 문구가 여전히 반복되는 건 거기에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에는 몇 가지 전제 조건이 있다. 위기를 기회로 삼기 위해서는 현 상황을 냉정하고 정확하게 분석하는 재점검의 시간이 필요하다. 도약을 위한 성찰의 시기라고 해도 좋겠다.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는 지난 1월7일 9인 위원회를 열어 박기용 감독을 새 위원장으로 선임했다. 코로나19로 인해 영화산업에 전례 없는 위기가 닥쳤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영진위가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한 채 지지부진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건 누군가의 책임이라기보다는 전체적인 구조의 문제에 가깝다. 영진위의 출발은 이름 그대로 한국 영화산업의 진흥이었다. 한국 영화산업의 성장 이후 영진위는 혜택이 미치지 못한 영역에 대한 지원에 힘을 쏟았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극장을 중심으로 한 영화산업의 근간이 흔들리고 OTT 플랫폼이 급부상하는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건 ‘영화가 무엇인지’에 대한 개념의 재정립일지도 모르겠다. ‘무엇을’을 정확히 세우면 ‘어떻게’는 자연스럽게 따라오기 마련이다.
박기용 신임 위원장은 한국영화아카데미 3기 출신으로 1997년 <모텔 선인장>(1997)을 연출하여 평단과 관객의 주목을 받았다. 2001년부터 9년간 한국영화아카데미 원장을 역임한 그는 장편제작과정의 역량을 강화하며 국내외 영화제 수상을 통해 한국영화아카데미의 위상을 높인 바 있다. 박기용 위원장은 인터뷰 내내 근본과 깊이를 강조했다. 지금 시대에 영화가 무엇인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심도 깊게 논의한 뒤 비로소 제대로 된 방향과 방법을 세울 수 있다는 말이다. 늘 그렇지만 문제는 속도보다 방향이다. 영화와 드라마, 영상 콘텐츠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영화가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를 할 최적의 시기다. 박기용 위원장은 최근 재밌게 읽고 있는 책으로 (단국대학교 동료이기도 한) 이정하 교수가 집필한 <몽타주: 영화적 사유의 현재적 운동>을 추천했다. 행정 서류가 여전히 어렵고 낯설다는 그는 미학적인 논의를 접할 때마다 자신이 영화인이라는 사실을 자각한다고 말했다. 많은 영화인과의 만남을 위해 부산과 서울을 부지런히 오가는 와중에 책과 음악, 영화는 박기용 위원장의 휴식이 되어주고 있었다. (영화의) 근본으로 돌아가 현재를 성찰하는 것. 위기를 기회로 만들 결정적인 비결은 여기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 한창 어려운 시기에 중책을 맡았다.
= 영진위에서 역할을 맡아주면 좋겠다는 요청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필름 메이커로서의 정체성이 나 자신에게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고사해왔다. 하지만 지속된 요청을 마냥 외면할 수 없기도 하고, 더 늦어지기 전에 내게 주어진 마지막 소명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에 지지난해부터 영진위 위원을 맡아 참여하게 됐다. 개인적으로는 한국영화아카데미 원장이나 단국대학교 교수직도 마찬가지였다. 짧게 2년만 하고 현장으로 돌아가겠다고 시작한 일들이 어느새 10년을 훌쩍 넘겨버렸다. 지난해에 크고 작은 내홍이 있었던지라 영진위 위원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이참에 그만두자는 생각이 없진 않았지만 기왕에 발을 들인 일을 제대로 마무리 짓고 나와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꼈다. 물론 주변에서는 다들 말렸다. 지금처럼 어려운 시기에 어떻게 감당하려 하느냐는 걱정의 말도 많이 들었다.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는 책임을 질 필요가 있다. 내게 주어진 역할과 소명을 외면하지 않겠다.
- 임기는 3년이지만 위원이었던 임기가 적용되어 2024년 3월까지 2년간 영진위를 이끌게 되었다. 다소 짧게 느껴지는데 연임은 염두에 두고 있나.
= 그렇지 않다. 1월 초 취임 후 한달 반 정도 지났는데 아직은 업무 파악을 중심으로 변화된 환경에 적응 중이다. 단국대학교에 2년만 시간을 달라고 양해를 구한 후 위원장을 맡은 만큼 임기를 마치는 대로 다시 학교로 돌아갈 것이다. 정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마무리는 학교에서 하고 싶다. 보통 위원장을 맡으면 5년 단위 중장기 계획을 세운다. 이번에도 담당 부서와 논의 중인데 이렇게 급변하는 시대에 5년 단위의 계획이 적절한지에 대한 의문이 있다. 임기에 맞게 3년 중기 계획을 수립하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다. 현재로서는 영화, 그리고 영진위의 정체성 재정립을 최우선 과제로 잡고 있다.
- 임기 중에 목표가 있다면.
= 9인의 위원들과 3년 중기 계획 수립을 논의 중이다. 가장 중요한 건 정체성 확립이다. 좁게는 영진위의 역할과 존재 의의는 무엇인가, 근본적으로는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개념의 기반을 다지는 게 필요하다.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 중인 분들을 위원으로 모신 만큼 9인 위원들의 생각이 모두 다르다. 억지로 통일시킬 수는 없겠지만 모두가 동의하는 방향성을 잡기 위해 의견을 수렴하고 있다. 구체적인 사업 계획과 예산안은 그 이후에 단계적으로 세워나갈 예정이다.
조직의 혁신, 재원의 다각화를 통해 안정감 있는 영진위로
- 극장산업이 위축되고 OTT 분야가 급속도로 팽창하는 시대인 만큼 정체성은 중요하다. 예를 들면 한국콘텐츠진흥원과 관련 분야가 겹치는 일도 빈번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자연스럽게 영진위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고,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와 같은 역할론에 대한 질문들이 이어진다.
= 맞다. 때문에 영화의 정체성을 재정립하는 게 우선돼야 한다고 말씀드린 거다. 대전환의 시대 한가운데에서 영진위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해야 할 때다. 나는 영화를 중심으로 개념을 심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OTT 시리즈는 물론이고 웹툰, 게임 등 다양한 K콘텐츠들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지만 그 중심에는 결국 영화가 있다고 믿는다. 그러니까 영화의 개념을 주변부로 확장하는 것보다는 영화를 더 단단하게 심화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OTT가 대세라고 해서 무작정 그쪽으로 발을 뻗는 게 과연 효과적인지 의문이다. 영화산업의 발전이 K콘텐츠 발전의 엔진이라는 걸 알리는 게 첫 번째다. 이를 위해 우선 조직 혁신과 안정화, 재원의 다각화를 통해 경영을 정상화하는 게 필요하다. 재정립된 영진위는 선순환 구조가 작동하는 건강한 영화 생태계 조성의 중심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조직의 혁신, 그리고 재원의 확보 모두 중요한 의제다. 우선 조직의 정상화에 대해 질문하겠다. 김정석 전 사무국장의 운영방식과 도덕성 논란으로 영화인들과 갈등이 많았다. 이번에 신임 사무국장에 서영관씨가 임명되었는데.
= 상식적으로 운영되는 조직을 목표로 하고 있다. 말씀하신 바와 같이 지난 시기 사무국장을 비롯해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던 게 사실이다. 비단 김정석 전 사무국장뿐만 아니라 더 거슬러 올라가도 꾸준히 이어져온 문제다. 신임 사무국장에 대해 내부 발탁, 외부 영입 등 여러 안을 놓고 고민이 있었다. 서영관 사무국장은 주변의 추천을 받아 위원회의 추인을 거친 후 선임되었다. 영화 투자쪽에서 시작하여 영상물등급위원회에서 3년간 사무국장을 한 분이다. 영진위와 협업을 많이 했고 업무 내용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다는 것도 강점이다.
- 이번에 새로 구성된 블랙리스트 피해회복 및 재발방지를 위한 특별위원회(이하 블랙리스트 특별위원회)는 어떻게 운영되고 있나.
= 블랙리스트 특별위원회는 내가 위원장으로 취임하기 전인 지난해 말부터 재구성됐다. 지난 3년간 블랙리스트 특별위원회의 활동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의견이 많았다. 회의에 참석해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구성원들의 의견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동안 무엇을 했길래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지 따지는 건 이 시점에서 그다지 의미 있는 일은 아니다. 솔직히 내부 직원들이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그동안 건드리기 어려웠던 게 사실이다. 조직 전체가 관계자인 동시에 피해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외면하지 말고 정면으로 바라봐야 한다. 무겁고 어려운 문제일수록 고개를 돌리지 않는 용기가 필요하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과거와 현재를 제대로 보는 작업부터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도 잊어선 안된다. 철저한 자기반성으로부터 다시 시작하려고 한다.
- 영화인과의 소통은 늘 강조되곤 했지만 정작 실행이 원활하지 않았다. 이를 해결할 구체적인 해법이 있나.
= 다양한 방면으로 소통 창구를 늘려갈 것이다. 우선 공정환경조성센터의 역할을 강화해나갈 방침이다. 시장 상황과 업계 환경이 워낙에 급변하고 있는 만큼 지속적이고 원활한 의견 수렴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다. 사실 양가적인 부분이 있는데, 소통을 통해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고 반영하는 게 중요하다. 동시에 급변하는 상황에서 빠른 판단과 추진력도 요구되는 게 현실이다. 결국 관건은 그 사이에서 균형을 맞춰나가는 일이다. 시간이 없다고 독단적으로 하는 것도 안되고, 탁상공론으로 실행이 미뤄지는 것도 곤란하다.
- 재원의 다각화 부분도 난제다. 이를 확보하기 위해선 적지 않은 진통이 예상되는데 복안이 있는지.
= 재원 다각화는 사실 몇년 전부터 얘기가 있었던 부분이다. 영진위의 존립 근거와도 연결되는 중차대한 문제다. 꾸준히 내부적인 논의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에 비해 그동안 준비된 것이 별로 없어서 사실은 지금부터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단계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극장 영업이 어려워지고 영화발전기금이 줄어든 게 직접적인 원인이다. 이건 산업의 변화 혹은 위축과 연결된 문제라 당장 늘어나리라 보기 어렵다. 그런 만큼 빨리 다른 경로로 재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게 중요해졌다. 위기는 기회이기도 하다. 지금이야말로 그동안 말만 하고 실행하지 못했던 것들을 추진해야 한다. 일단 안정적인 국고의 지원이 절실하다.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와 협의 중이다. 어제 있었던 문체부 간담회에서도 같은 이야기가 나왔다. 영화발전기금에만 의지하는 건 불안정성이 너무 크다. 제3의 재원이 필요하다. OTT 플랫폼의 지원, 방송발전기금 등 여러 경로를 모색하고 있는 단계다. 탁상공론에 그치지 않고 최대한 빨리 실행할 수 있는 계획들을 마련 중이다.
육성, 지원을 넘어 정책의 길잡이가 되기 위하여
- 결국 영진위의 존립 근거, 역할의 변화와도 이어지는 문제다. 초창기 영진위가 말 그대로 영화산업 육성에 초점을 맞췄다면 2000년대 중반부터는 다양성영화를 비롯한 소외된 분야의 지원에 방점을 찍었다. 지금은 또 한번의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 동의한다. 문체부를 비롯한 각 기관 및 단체에 영진위의 필요성을 인식시킬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 그것은 처음에 이야기한 영화의 개념을 공고히 하는 작업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가령 OTT가 대세라고 해서 당장 거기에서 무언가를 얻어내려는 태도로 접근하는 건 경계해야 한다. 그동안 영화산업을 지탱해온 극장 관계자들 입장에서 보면 불편한 일이다.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을 받아들이되 중심에는 항상 영화가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오징어 게임> <지옥> 등 지금 성과를 보이는 OTT 시리즈들도 결국 영화감독, 영화 스탭들이 참여해 일궈낸 결과다. 그동안 꾸준히 해왔던 작업들이 연장, 확장되는 것인 만큼 영화라는 뿌리의 중요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뿌리가 단단해야 풍성한 가지들이 뻗어나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영진위는 그 어느 때보다 정책적인 역량의 확립이 절실하다. 개념을 심화하고, 중심을 잡고, 영화의 가치에 대한 깃발을 세워나갈 것이다.
- 영화산업 정책의 컨트롤타워라고 할 수 있을까.
= ‘컨트롤’이라고 하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면서 조종한다는 어감이 있어서 적절하지 않을 것 같고. 차라리 격랑 속에 중심을 잡고 길을 안내하는 내비게이터, 또는 패스파인더에 가까운 역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지금부터 가는 길은 아무도 가보지 못한 길이고 모두에게 도전이다. 그럴 때일수록 근본과 기본으로 돌아가는 게 중요하다고 믿는다.
- 현황을 정리해보자. ‘2021년 한국 영화산업 결산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2021년 한국 영화산업의 시장 규모는 1조239억원으로 2년째 감소 중이다. 구체적으로 들어가보면 한국영화 점유율 50% 선이 깨지고, 해외영화의 매출 비중은 70%가 넘었다. 뿐만 아니라 지난해 개봉한 한국 상업영화의 추정수익률은 –47.3%가 예상되고 있는데, 이는 2001년 영진위 조사 이래 역대 최저치다.
= 위기라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이번에 정확한 수치를 확인하면서 새삼 놀랐다. 코로나 직후인 2020년에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가 지난해 조금 회복되는가 싶더니 올해는 더 큰 파도가 밀려오는 모양새다. 최근 극장쪽 관계자들을 자주 만나고 있는데 개봉하지 못하고 밀려 있는 영화들의 정체 현상이 심각하다. 새로운 영화들이 지속적으로 나와줘야 관객도 극장을 계속 찾으며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지는데, 마치 동맥경화처럼 중간에 막혀 있는 셈이다. 막상 개봉을 한다 해도 시장 상황이 좋지 않은 만큼 무작정 개봉을 촉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때문에 개봉을 촉진할 수 있는 시스템이나 지원 방안이 필요하다. 지난해에 영진위에서 특별기획전 등을 추진하기도 했지만 문제는 항상 재원이다. 얼마 전 확정된 추경 예산에서 82억원 정도를 확보한 걸로 알고 있다. 소중하지만 이걸로는 부족하다. 문체부를 설득해 지속적인 개봉 지원이 이뤄질 수 있는 제도를 모색 중이다.
- 2001년부터 9년간 한국영화아카데미 원장을 맡아 이뤄낸 성과들이 인상적이다.
= 기본으로 돌아가 해야 할 일을 했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정체성에 대한 질문부터 던졌다. 한국영화아카데미는 무엇을 하는 곳인가. 학생뿐 아니라 관계자, 내부 직원들까지 전부 다른 답을 내놓았다. 각각의 답이 틀렸다는 게 아니다. 다만 이렇게 중구난방 흩어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준을 세웠다. 한국영화아카데미는 국립영화학교라고. 처음엔 그게 말이 되냐는 지적부터 한국예술종합학교 같은 곳과 뭐가 다르냐는 말까지 크고 작은 이견이 나왔다. 하지만 한국영화아카데미는 처음부터 국립영화학교로 설립됐고, 거기에 어울리는 역할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관점으로 장편제작과정을 시작했고, 조금씩 성과가 나왔다. 구체적인 수치나 목표지점을 설정하는 것보다 큰 방향을 잡아주는 게 첫 번째 할 일이다.
- 같은 맥락에서 영진위의 정체성을 한줄로 정리한다면.
= 영진위는 K무비의 본산이다. K무비는 블록버스터 상업영화뿐 아니라 독립예술영화, 실험영화까지 모두 아우르는 영역이다. 영화를 영화답게, 심도 있는 논의를 통한 개념의 확립을 통해서 영화의 뿌리를 더욱 단단하게 다지려 한다. 이를 위해 다양한 교육과 담론의 활성화, 특히 비평의 역할이 한층 중요해지리라 생각한다. 뿌리가 튼튼하다면 열매들은 다양한 형태로 피어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