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상처 하나 없는 사람이 세상천지 어디 있을까.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해 방황하고, 정의구현과 복수 사이를 오가며 세상 모든 고뇌를 저 혼자 끌어안은 듯한 표정을 짓는 브루스 웨인을 볼 때면 고구마를 먹은 듯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럼에도 <배트맨> 시리즈의 매력을 부인할 순 없다. 배트맨의 매력은 그의 깊고 복잡한 인간적 고뇌가 아니라 사연 있는 남자의 분위기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로버트 패틴슨 주연의 <더 배트맨> 예고편은 나를 흥분시키기 충분했다(배트슈트와 배트모빌이 주는 장비의 멋이라든지(전문용어로 ‘장비발’), 고층 건물 꼭대기에서 망토 자락 펄럭이며 어둠에 잠긴 도시를 내려다보는 배트맨의 까만 실루엣엔 취할 수밖에 없다). 영화를 본 기자들의 반응도 엇갈렸는데, 몇몇 장면은 인상적이지만 대체로 몰입하기 힘들었다는 쪽과 코믹스 팬이라면 좋아할 수밖에 없다는 쪽의 감상평을 듣고 나니, 어쨌든 극장으로 달려가 직접 확인하는 수밖에 없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게다가 가면 아래 강직한 턱선을 드러낸 로버트 패틴슨의 배트맨이라니. <트와일라잇> 시절부터 그의 변신을 지켜봐온 영화 팬이라면 맷 리브스 감독의 캐스팅 의중이 궁금할 수밖에 없다. 맷 리브스 감독은 인터뷰에서 “브루스 웨인을 ‘배트맨 되기’에 중독된 사람”이라 설명했는데, 로버트 패틴슨의 얼굴에 ‘2년차 배트맨’의 고뇌가 어떻게 새겨졌을지 당장 확인하고 싶어졌다.
아무리 바쁜 현대인이어도 극장에서 사수하고 싶은 영화들이 있다. 안타까운 것은, 지난해 박스오피스 순위 상위권을 차지한 영화의 상당수가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이터널스> <블랙 위도우> 같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영화라는 사실이다. 영화진흥위원회가 발표한 ‘2021년 한국 영화산업 결산’ 보고서를 보면, 지난해 전체 극장 매출 가운데 한국영화 매출 비율은 30%가 채 되지 않는다. 지난 10년간 외화보다 우위였던 한국영화 점유율도 역전됐다.
이번주 <씨네21>이 준비한 기사들이 브루스 웨인과 배트맨의 정체성 혼란처럼 어딘지 분열적이라는 생각이 든 것도, 외화 기대작 <더 배트맨>에 방대한 양의 지면을 할애한 한편 K콘텐츠의 위기와 기회를 이야기하는 기사들을 나란히 배치했기 때문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인터뷰, 박기용 영화진흥위원회 신임 위원장 인터뷰, 그리고 2022 한국영화 시장의 난관을 진단한 기획은 모두 ‘대전환’을 맞이한 ‘지금’을 돌아보게 만든다. 한국영화가 코로나19에 시원하게 복수하는 날이 오길 기대하며, 우리를 극장으로 이끌 영화들의 개봉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