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거듭 관람해도 등장인물들이 시침 떼고 식자재 거래를 마치 약물 거래 대하듯 하는 태도에 혀를 내두르는 건 변함이 없었다. 여기서 비롯한 심리적 반동은 이 영화가 무협이라는 판단으로까지 나아갔다.
사전정보 없이 영화를 본 덕(?)에 3막으로 이뤄진 작품에서 2막이 다 지나갈 때까지 이야기가 나아가는 길을 확신하지 못했다. 요리와 식재료를 소재로 한 작품은 아닐 것이라는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요리 분야에 무지한 탓에 그때까지 트러플을 마약의 원료 정도로 짐작했다. 괴한들이 트러플 돼지를 훔치기 위해 폭력을 동원하고, 롭(니콜라스 케이지)이 돼지를 되찾으려고 떠난 여정에서 파이트클럽을 방문하거나 모두가 쉬쉬하는 인물에게 다가가는 선택을 하는 일들을 근거로 누아르와 범죄 스릴러의 향취가 묻어나는 액션을 기대했던 것도 같다. 관객 사이에도 <존 윅>(2014) 같은 작품을 언급하는 것을 보니 혼자만의 오인은 아닌 듯했다. 아니, 이러한 오인은 분명 의도된 면이 있다. 또 이 무지와 오인은 예상치 못한 관점으로 <피그>의 전반을 읽어내도록 이끌었다. 바로 말하자면 이 영화는 무협영화다. 그것도 요리 무협이다.
선문답에 취하다
<피그>는 무협 서사의 기본 골격을 갖춘다. 과거가 명확하지 않거나 알기 어렵고 알려주지도 않는데, 무언가 대단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는 암시만 가득한 무림 고수의 존재, 그가 모종의 이유로 활개 치던 강호를 떠나 은둔 생활을 하다가 거부할 수 없는 계기로 다시 강호로 등판한다는 설정, 파이트클럽의 운영자 에드거(다리우스 피어스)나 핀웨이 식당의 주방장 데릭(데이비드 넬) 같이 능력치별로 배치된 악당들을 하나씩 물리치는 식의 도장깨기 에피소드, 최후에 최고 빌런 식자재상 다리우스(애덤 아킨)와 맞붙기 위해 고유의 기술(제빵)을 자랑하는 예전 동료의 도움을 받아 완성한 필살기(요리)를 사용하고 끝내 신승한다는 결말까지를 짚어보면, <피그>의 서사는 여느 무협과 크게 다른 점이 없어 보인다.
물론 이 서사 구도를 반드시 무협만의 특징이라고 규정하기는 어렵다. 일반의 누아르나 스릴러, 액션 그리고 웨스턴 장르에도 장착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피그>를 무협으로 부를 수 있다면 답은 영화 곳곳에서 드러나는, 노자나 공자 사상 또는 불교에서 볼 수 있는 선문답과 유사한 뉘앙스를 풍기는 대화들에 있다. 식자재상 아미르(알렉스 울프)가 자주 듣는 라디오방송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에 관한 해설, 어머니의 자살을 고백한 아미르 앞에서 롭이 말하는 인간 삶에 관한 현학적 고찰, 해체주의를 표방하는 식당의 종업원과 주방장이 요리를 두고 말하던 브레히트식의 소격효과 컨셉, 돼지를 찾으러 가지 않았다면 아직 머릿속에는 돼지가 살아 있을 것이라는 롭의 물음과 그래도 죽은 건 죽은 것이라는 아미르의 답은 동양 무협영화에서 조미료처럼 가미된 선문답의 역할을 한다. 에드거가 운영하는 식당의 출입을 막는 지인에게 아미르가 롭은 불교 신자라고 우스갯소리를 한 것은 어쩌면 이 영화가 오리엔탈 무협 컨벤션을 품은 작품이라는 사실을 은연중에 드러낸 것인지 모른다.
웨스턴은 전성기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변주되어 온다. 근작으로는 <노매드랜드>(2020), <퍼스트 카우>(2019), <파워 오브 도그>(2021) 등을 들 수 있다. 무협 장르도 마찬가지다. 순수하게 오락으로 기능하는 기예의 무협이 대명사인 홍콩의 무협영화들이 있었고, 반중력의 무협 <와호장룡>(2000)을 목격한 바 있으며, 시선과 정신의 대결이 강조된 <자객 섭은낭>(2015) 같은 무협도 발견했다. <피그>를 무협영화의 또 다른 변주로 본다면 관건은 영화가 범작을 넘어서는 작품이냐는 것일 테다. <피그>에서 일차적으로 지목할 수 있는 건 무공의 스펙터클이 없거나 미미하다는 점이다. <피그>에는 폭발적인 액션이 기대되는 장면에서 더 나아가지 않고 쉽게 가라앉는 경우가 많다. 영화의 초반부, 일단의 괴한들이 넋 놓고 있던 롭을 습격해 돼지를 훔치는 장면에서 긴장감은 롭의 대응 없이 일방적으로 고조되다 이내 무력하게 당한 뒤 아침이 올 때까지 쓰러져 있던 롭의 모습으로 쉽게 하강한다. 파이트클럽에서 롭이 대단한 액션을 보여주지 않을까 싶을 때도 그저 얻어맞기만 하는 것으로 끝나버린다. 다시 말해 <피그>에서 드러나는 무공의 스펙터클은 대부분 폭발하기보다 억제되고, 한껏 고양되었다가 푸시식 꺼져버린다. 그렇다고 완전히 소멸하지는 않고 스펙터클을 유발할 것처럼 보이는 다른 장면들과 배턴을 주고받으며 상승과 추락을 반복한 채 출구를 찾지 못하고 겹겹이 싸여 떠다니면서 갑갑함을 흩뿌린다.
할리우드에서 재탄생한 무협
무공의 스펙터클은 없지만 유사한 효과를 노린, 고조되는 분위기는 있다. 돼지가 죽은 소식을 접한 롭이 그 자리에서 주저앉는 모습, 핀웨이 주방장 데릭의 얼굴에서 초 단위로 펼쳐지는 감정적으로 궁지에 몰리는 상황, 파이트클럽에서 롭이 그의 반밖에 안돼 보이는 체구의 남성에게 제한된 시간을 초과해서까지 구타를 당하는 장면 등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장면들은 그만 멈춰야 할 것 같은 지점을 지나서도 그치는 일 없이 이어지고, 더러는 슬로모션으로도 다뤄져 감정적 효과를 더욱 연장한다. 바꿔 말하면 장면이 지닌 정서의 무게를 무리하게 높여 관객에게 진지하다 못해 과도한 심적 부담을 안긴다. 영화의 마지막은 이러한 현상의 절정이라 할 만하다. 최고 빌런 다리우스를 상대로 펼치는 롭의 필살기는 다리우스가 아내와 같이 과거 롭의 식당에서 먹었던 메뉴를 요리해주는 것이다. 이 장면이 담은 요리 과정은 근래 푸드 포르노라고 부를 만큼 음식을 시각적 스펙터클로 다루는 행태와 동떨어져 있다. 여기에는 소금을 어깨높이에서 뿌리는 과시적인 기술도, 음식물을 과감하게 가까이 포착한 접사도 없다. 다만 돼지의 죽음 소식으로 이어질 때까지 인물 사이에 고조되는 분위기가 관객에게 달려든다. 그러나 이때를 포함해 여태껏 작품이 이어온 과도한 진지함은 롭이 다리우스를 상대로 마련한 필살기가 스펙터클 없는 요리라는 사실이 확실시될 때, 즉 모든 사태가 돼지 납치를 둘러싼 소동극에 불과했다는 점이 확정되면서 상대방을 고려하는 일 없이 벌인 한판의 농담처럼 보여 당황스럽다.
카타르시스 창출에 실패하는 스펙터클과 과도한 진지함에서 불거진 우스꽝스러움이, 마치 해체주의 식단처럼 기존 무협의 공식을 무너뜨리고 재구성해 <피그>를 낯설게 보이게끔 하는 장치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작품이 무협영화의 변주로서 성공했는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다만 <피그>가 서 있는 독특한 위치를 말하는 것이 답변을 유예할 변명은 되지 않을까 한다. 세심한 분석을 포기하는 우를 범하면서 말해보자면 문화권별로 나뉘는 영화의 바탕에 나름의 기원이 되는 장르가 있다고 할 때, 할리우드 문화권의 경우 영화의 밑그림은 모두 웨스턴으로 그려져 있는 한편, 웨스턴에 호응할 만한 동양 문화권 내 영화의 밑바탕에는 무협이 자리한다고 볼 법하다. 앞서 말했듯 <피그>는 한끗 차이로 무협이 아닌 웨스턴이나 다른 장르로 바뀔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피그>는 할리우드 문화권에 속할 작품이 밑그림을 무협으로 그리려는 시도로 보인다. <피그>를 보면서 다소 반동적으로 나서고 싶은 충동이 든다면 이유는 여기서 발생하는 불협화음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