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소피의 세계' 배우 김새벽을 만나다
2022-03-10
글 : 김현수
사진 : 최성열
현장이 즐거운 배우가 되고 싶다

“힘들고 우울할 땐 손가락을 봐. 그럼 참 신비롭게 느껴진다? 아무것도 못할 것 같은데 손가락은 움직일 수 있어.” <벌새>의 영지 선생님이 은희에게 해주던 대사를 들을 때 배우 김새벽을 감싸는 기운의 정체가 그 손가락임을 깨달았다. 어떤 순간에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 멈춰 서 있지 않고 움츠러들지 않는 사람. 과하게 움직이지는 않지만 자신의 단단함을 감추지도 과시하지도 않는 사람. <항거: 유관순 이야기>에서 좁은 감옥 안을 가득 메운 여인들 가운데 가장 여려 보이는 향화가 사람들을 다독일 때 김새벽이란 배우가 쌓아올린 얼굴의 힘과 손가락의 움직임을 이어서 생각해보게 됐다. <소피의 세계>의 수영(김새벽) 역시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기보다 주변 사람의 아픔과 상처를 살피면서 세심하게 가야 할 방향을 정해주는 사람이다. 남편 종구(곽민규)는 수영 앞에 서면한없이 어리광을 부린다. 어느 날 갑자기 그가 이런 이미지를 갖게 된 건 아닐 거다. 김경묵 감독의 <줄탁동시>의 조선족 순희 역으로 데뷔해 장건재 감독의 <한여름의 판타지아>의 혜정 역을 거칠 때만 하더라도 공간과 시간을 차분하고 느릿하게 만들어주는 성정을 지닌 배우 정도로 생각했다. <그 후>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를 당당하게 차지하려 드는 창숙의 모습을 보며 다소 당황스럽기는 했으나, 관객과 은희에게 삶의 용기를 선사하는 <벌새>의 영지 선생님을 거치면서 배우 김새벽을 둘러싼 이미지의 외피가 더욱 단단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실제로 배우를 대면했을 때 느껴지는 기운 역시 영화 속 캐릭터와 유사하다. “연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몰라서 연기 선생님을 알아보고 있다”는 말을 들어도 이 배우가 지금 불안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고 새로운 도전을 위해 또 어딘가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고 여겨진다. <소피의 세계>는 우리가 기억하는 과거의 흔적을 더듬어보는 영화다. 그의 필모그래피를 모두 되짚어보기에는 부족한 시간이었지만 오랜만에 배우를 만나 그동안의 여정을 잠시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 <소피의 세계>의 이제한 감독과는 홍상수 감독의 <그 후> 현장에서 기술실장과 배우의 관계로 처음 만난 건가.

= 오래전에 출연했던 단편영화 현장에서 이 감독님이 음향팀 스탭으로 참여했을 때 처음 알게 됐다. <그 후> 때 모였던 스탭들과의 기억도 너무 좋았다. 그래서 계속 연을 이어오다가 이 감독님이 먼저 본인 영화를 연출하고 싶다면서 연락하셨다. 그렇게 해서 단편 <마지막 손님>에 출연했고 <소피의 세계>까지 함께하게 됐다. <마지막 손님>의 주인공 이름도 수영이다. 캐릭터의 연관성이 있지는 않지만 닮은 구석이 있는 것도 같다.

- 이제한 감독은 김새벽 배우를 떠올리며 <소피의 세계>의 수영을 만들어냈다고 하던데.

= 내가 읽을 때는 내가 안 떠오르던데. (웃음) 그 마음이 너무 감사하다. 늘 현장이 주는 힘이 있다고 느끼는데 감독님과 단편을 찍을 때 그런 힘을 느꼈다.

- 영화가 시작되면 한동안 소피는 관찰자의 시선에 머물면서 집주인 수영과 종구 부부에 집중한다. 소피와 종구의 사연은 서서히 드러나는 반면 수영의 과거는 보여주지 않는다. 수영의 위치가 독특하다.

= 수영을 연기하기 전에 캐릭터를 해석하면서 이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이 사람은 누구일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 없이 시작했다. 수영의 시선, 수영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방식을 더 고민했다. 그녀가 사람들 안에서 어떤 행동과 태도를 취하는지, 시나리오 안에 나와 있는 것만을 가지고 인물을 대하려고 했다.

- 종구 역의 곽민규 배우와 합을 맞춘 과정도 궁금하다.

= 서로 대화를 많이 했다. 촬영 전에 식사를 같이하거나 종구와 수영처럼 우리도 그들이라면 같이 찍었을 법한 사진이나 영상을 찍어보는 등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했다. 그러면서 이 감독님과 촬영감독님을 지켜보니 그 안에 사랑이 보였다. 실은 촬영감독님과 이 감독님이 부부 사이다. 그래서 두분을 많이 관찰했다. 내가 수영과 닮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두분이 종구와 수영을 닮았다고 느꼈다. 영화에서 종구와 수영은 분명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고 서로에게 상처도 주지만 수영이 힘들었던 때에는 종구가 옆에서 버텨줬을 것 같더라.

-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관객 앞에 느닷없이 펼쳐놓는 풍경은 종구와 수영 부부가 불같이 화를 내며 싸우는 장면이다. 수영이 서럽게 통곡까지 하는데 이 장면의 대사량이 A4 용지 7장이나 됐다고 하더라.

= 그 장면은 대사도 많았지만 지문도 그만큼 많았다. 두 사람의 모든 행동이 하나하나 짜여져 있었다. 수영이 책상 앞에 앉아 있다가 종구를 향해 몸을 돌리고 또 엎드렸다가 다시 종구를 바라보는 등의 행동이 지문에 있었다. 또 독특했던 건, 일상에서 실제 쓰는 말 같은 대사였다. 울면서 싸우다보면 했던 말을 계속 반복하지 않나. 얼마나 디테일했는지 읽는 동안 혹시나 촬영감독님과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건 아닐까 괜한 걱정까지 했다. 당연히 허구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현실적으로 쓰여 있었다. 또 감독님이 원테이크로 찍겠다고 해서 대사를 한 글자도 틀리고 싶지 않았다. 촬영이 시작됐을 땐 상대 배우가 에너지를 전달해주니까 특별히 계산하지 않아도 지문에 쓰여 있던 동작대로 자연스럽게 연기하게 됐다. 사실 이런 건 지나고 나서야 떠오르는 생각일 뿐, 연기하는 순간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찍는동안 너무 악을 쓰며 연기해서 손발이 떨리기도 하고. 대본 안에 들어가서 연기했던 것 같다.

- 한국으로 배낭여행을 온 소피에게 수영과 종구 부부가 방을 빌려주면서 한집에 머무르게 되는데 수영은 영어를 썩 잘해서 소피와의 의사소통을 담당한다. 그런데 수영이 아주 정직한 교과서적인 문법을 구사하더라. 영어 대사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 감독님이 영어는 못해도 된다, 편하게 하면 된다고 하셨다. 발음이 좋을 필요도 없고 의사소통만 가능하면 된다는 지시를 받고는 다른 언어를 쓰는 두 사람 사이의 불편함이 드러나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말 자체보다는 관계와 상황이 더 중요하니까. 하지만 수영이 구사하는 문법이 너무 완벽해서 부담감이 있었다. 생각해보니 수영은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었네? (웃음) 사실 영어 대사를 번역해준 분은 내가 연결해드렸다. 예전에 수영을 배우러 다닐 때 번역가 한분을 만났다. 평소에 영화를 좋아하고 내 출연작도 보셨다고 해서 연락처를 저장해놓고 있다가 기억이 나서 감독님과 연결해드린 거다.

- 영화가 인물을 대하는 방식, <소피의 세계>가 수영을 다루는 방식에서 홍상수 감독의 영향이 보인다. <그 후>의 창숙과 <도망친 여자>의 우진을 연기하던 때에 관해서도 질문하고 싶다. 홍상수 감독의 현장을 경험한 소감이 어떤가.

= 처음에는 걱정이 좀 많았다. 이제껏 연기했던 어떤 인물보다도 대사가 길고 실제로 대본을 당일에 주시더라. 그제야 내 이름은 창숙이고 (권)해효 선배와는 어떤 관계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런데 뭔가 고민하거나 주뼛거릴 시간이 없더라. 당장 촬영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어? 어떻게 이런 연기가 되는 거지? 못할 줄 알았는데 내가 연기를 하고 있네? 소수의 인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현장이었다. 그러다 보면 어? 오늘 1회차 촬영 끝났네? 그럼 내 분량도 끝인가? 다시 기다리다 보면 다음 촬영 스케줄이 잡혔다고 알려온다. 그럼 또 다음날이 반복되고. 어느 날 이대로 내 분량이 끝이라고 알려주면 그제야 끝이란 걸 받아들이게 된다. 이곳에서는 나 혼자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구나, 그럼 그냥 생각을 말아야겠다, 그렇게 하면서 집중력이 생겼던 것 같다.

- <그 후>의 아름(김민희)과 창숙의 의상 컨셉이 똑같은 것은 홍상수 감독의 의도였나.

= 내가 여러 의상을 찍어서 감독님에게 보여드리면 직접 선택하신다. 그래서 그냥 입고 나갔다. 민희 선배에게도 같은 의상을 콕 집어 주문하셨는지는 모르겠다. 어떤 의도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은 했다.

- 두 사람의 의상 컨셉은 똑같은 반면, 손목시계는 반대로 차고 있다. 아름은 왼팔, 창숙은 오른팔에 차고 있다.

= 시계 차는 방향은 정해주시지 않았다. 아, 머플러 매는 방식은 정해주셨던 기억이 난다. 가장 편한 방식으로 해보라고 하시고는 내 방식을 보고 결정해주셨다.

- <벌새>에서도 시계를 오른팔에 차고 등장하는데 <도망친 여자>에서는 왼팔에 차더라. 시계를 차는 방향, 그리고 <벌새>의 영지 선생님이 칠판에 왼손으로 글씨를 쓰는 걸 보며 왼손잡이구나 생각했다.

= 왼손잡이로서 영화 안에서 맨날 왼손으로 글씨를 쓰는 게 지겨울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일부러 거꾸로 쓰기도 한다. 영화마다 시계 찬 방향이 조금씩 다른 건 나만의 이유도 있는 것 같다.

- <벌새>에 등장하는 칠판 글씨는 본인이 직접 연습한 건가.

= 직접 해보겠다고 미니 칠판을 샀었다. 정말 잘 쓰고 싶어서 연습하겠다고 샀는데 하필 미니 칠판을 사서 망했다. (웃음) 작은 칠판에 연습하다가 큰 칠판에 쓰려니 엉망이 되는 거다. 그래서 실제 영화에 담긴 글씨가 아쉽다. 너무 소심하게 썼다.

- <그 후>의 창숙과 아름이 <도망친 여자>의 우진과 감희의 관계로 이어져서 재회하는 것은 관객 입장에서도 흥미롭지만 연기하는 배우에게는 더 흥미로운 작업이었을 것 같다. 예를 들면 <그 후>의 창숙과 아름을 보면 항상 창숙이 왼쪽에 앉아 있었지만 <도망친 여자>에서는 두 사람의 위치가 바뀌어 있다. 여전히 둘의 의상 컨셉은 똑같지만 이번에는 우진만 귀걸이를 하고 있다.

= 홍 감독님이 <도망친 여자> 찍을 때 민희 언니와의 투숏을 처음 찍는 거라고 말씀하신 적 있다. 나도 몰랐는데 <그 후>에서는 해효 선배랑 세 사람이 함께 등장했었다. 물론 영화 찍을 당시엔 그런 생각을 전혀 할 수 없었다. <도망친 여자>의 첫 신을 찍기 전까지 해효 선배가 남편 역할인지 몰랐으니까. (웃음)

- <그 후>와 <도망친 여자> 사이의 많은 출연작 중 <벌새>를 빼놓을 수 없다.

= 처음 <벌새>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영지가 내가 잘 알고 있는 사람 같다고 생각했다. 분명 찍기 전에는 나랑 닮았다는 착각을 했지만 실은 나와는 거리가 있는 사람이라는 걸 찍으면서 알게 됐다. 시나리오에 영지가 어떤 사람인지 유추해볼 수 있는 단서들이 있어서 그걸 바탕으로 이해해보려고 노력했다. 예를 들면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않고 어린아이도 사람으로서 대하는 점, 어떤 순간이든 진심을 다하려고 하는 태도 등을 잘 표현하려고 했다. 영지가 책을 선물해준 은희(박지후)에게 고맙다며 목례를 하는데 왠지 영지라면 그렇게 할 것 같아서 연기할 때 꾸벅 인사를 한다든지.

- 어떤 표현을 할지, 어떤 행동을 할지에 관한 아이디어를 감독에게 많이 제시하는 편인가.

= 영지는 사실 약간의 판타지를 품게 하는 인물이다. 현실에서는 이런 사람이 귀하니까. 영지를 현실적으로 보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은희가 불쑥 찾아왔을 때 영지는 주로 어떤 행동을 하고 있을지도 고민되더라. 그럴 때마다 영지 스스로 자신을 다독이는 시간을 갖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내가 뭔가 행동을 취해보기도 하고. 그럴 때마다 김보라 감독님이 내 의견을 잘 반영해줬다.

- 지금껏 연기해온 작품의 유사성을 찾아보자면, 웃는 모습이 거의 없다. 유일하게 <벌새>에 영지 선생님이 환하게 웃는 장면이 있다.

= 노래를 불러야 하는 게 너무 민망해서. (웃음) 실제로 연기하는 순간에도 너무 민망했다. 그 장면의 목표는 분명했다. 바로 이어서 은희와 지숙이 화해를 해야 했고 그사이에 어떤 변화를 줘야 하는 장면이었다. 감독님은 계속해서 설득이 된다고 하시고 나는 너무 민망해서 노래를 못 부르겠는 거다. 원래는 칠판 앞에서 아이들과 교탁을 사이에 두고 부르는 설정이었는데 도저히 그곳에서는 부를 수가 없을 것 같아 테이블 옆으로 장소를 옮겼다. 교탁에서 아이들을 내려다보는 식으로 대하는 게 불공평해 보인다고 느껴졌다. 다행히 감독님이 받아주셨다. 또 당시에 지후와 내가 모두 왼손잡이라서 감독님이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

- 영지가 은희에게 병원에서 용기 있게 맞서라고 당부하는 장면은 전작이었던 <누에치던 방>에서 연기한 여고생이 미희(이상희)에게 ‘용기 있게 살자’는 쪽지를 건네받았던 장면과도 연결된다. 본인이 연기한 캐릭터들끼리 서로 응원의 메시지를 이어서 주고받는 듯하다.

= 내가 맡은 인물들간의 관계성을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아무래도 내가 끌리는 지점이 있다 보니 서로 맥이 닿을 수는 있을 것 같다. 당시에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이나 고민이 마침 시나리오에 담겨 있다면 그것에 꽂혀 작품을 선택할 때가 종종 있다. 언젠가 한번은 김목인씨 공연을 가서 <사려 깊은 밤>이란 노래를 인상적으로 들었는데 제목이 <사려 깊은 방>인 단편영화에서 제안이 들어온 거다. 그럴 때 나 혼자 운명이라 생각한다.

- 코로나19로 인해 달라진 일상에는 어떻게 적응하고 있나.

= 제작되는 작품 수가 현저하게 줄었다. 하루빨리 관객이 극장을 자유롭게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가장 갑갑한 건 마스크를 낀 채여서 처음 만난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할 수 없다는 거다. 오직 눈을 통해서만 그 사람을 알게 된다는 게 갑갑하다. 개인적으로는 지난 2년 동안 엄마를 딱 한번 만난 게 가장 달라진 일상이 아닐까 싶다. (웃음)

- 어떤 배우로 기억되기를 바라나.

= 정말 나한테 맞는 일인지 맨날 고민한다. 근데 지금은 이런 고민을 할 바에 연기를 어떻게 잘할지를 고민하기로 마음먹은 상태다. 계속 왔다 갔다 한다. (웃음) 아직도 촬영 전날에는 잠을 뒤척이는데 현장이 두렵지 않고 즐거운 곳이었으면 좋겠다. 나 역시 현장에서 즐거운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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