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살 초등학생을 잔혹하게 살해한 13살 소년이 경찰에 자수한다. 그러나 촉법소년, 만 10살 이상~14살 미만으로 형벌을 받을 범법 행위를 한 형사미성년자는 형사처분 대신 소년법에 따른 보호처분을 받게 되어 있다. 대중의 분노가 끓어오른다. 소년범을 혐오해 소년부 판사를 택했다는 심은석(김혜수)이라면 ‘사이다’ 판결을 내려주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하게 된다. 하지만 엄중한 판결로 악명 높은 ‘심판’이 처분에 앞서 하는 일은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파악하는 것이다. 심은석의 활약으로 공범이자 진범이 드러난 뒤에도 정의 구현의 쾌감 같은 건 없다. “소년사건은 해도 해도 적응이 안돼. 늘 찝찝하지”라는 그의 말은 우리가 소년범죄를 바라볼 때 당연히 느껴야 할 감정에 관한 이야기처럼도 들린다. 전국의 판사 3300여명 중 소년부 판사는 20여명, 이들이 매년 만나는 소년범은 3만여명, 일주일에 80건, 한달이면 300건의 사건을 다루어야 한다. 판사는 물론 보호관찰관 수도 시설도 부족하다. 언론을 통해 자극적으로 묘사되는 사건은 시민의 공분을 부르고 이는 빠르게 소년법 폐지론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심은석의 말대로 “소년은 결코 혼자 자라지 않기에” 소년범죄는 가정의 문제이면서 사회의 문제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청소년 회복센터를 운영하는 오선자(염혜란)의 딜레마에 관한 에피소드다. 소년들은 센터장의 폭언과 폭행에 대해 호소하지만, 진실은 전혀 다르다. 아마도 현실은 그 사이에 있을 것이다. 사회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고 동참해야 한다. <소년심판>은 이 불편함으로부터 고개를 돌리지 말고 나의 책임을 고민해보라고 집요하게 설득하는 드라마다. 다만 후반으로 갈수록 과도해지는 폭행 및 성폭력 묘사, 굳이 그대로 재현하지 않았어도 될 법한 수준의 여성 혐오 대사는 납득하기 어렵다. 작품의 진지한 문제의식이 폭력을 표현하는 방식에 대한 성찰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가 의문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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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던 날> / 웨이브
소년범을 혐오한다고 말하면서도 삶을 던져 일에 몰두하는 심은석은 한 개인이라기보다 소년범에 대한 사회의 책임을 집약한 존재처럼 보인다. 이처럼 부서질 것 같은 자신을 꼿꼿하게 붙들고 누군가를 지키려 애쓰는 인간으로 김혜수만큼 신뢰감을 주는 배우는 드물다. <내가 죽던 날>에서도 그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한 소녀의 죽음을 끝까지 추적하는 형사를 연기한다.
<나쁜 아이들>(원제 ‘은비적각락’) / 넷플릭스 외
처음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어른이다. 범죄를 목격한 아이들에게 나쁜 의도는 없었다. 그러나 어른의 사정, 정확히 말하면 어른의 이기심은 아이들에게도 영향을 끼치고 결국 또 다른 범죄를 낳는다. 이제 누구의 책임일까? 교활한 어른과 만만치 않은 아이들의 두뇌 싸움에 스릴을 즐기다가도 인간 내면의 악과 마주하는 순간 다시 막막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