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진하게, 더 쨍하게
눈 밑까지 붉게 상기된 얼굴이 다시 우리를 노려본다. “양미숙(공효진)은 왜 그럴까?” 이경미 감독이 시나리오를 쓰는 동안 되뇌었다는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좋아하는 러시아어를 더는 가르치지 못하게 됐고, 좋아하는 남자도 동료에게 뺏기게 생긴 중학교 영어 선생 미숙의 울긋불긋한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볼 기회가 왔다. 2008년 10월16일 개봉한 <미쓰 홍당무>의 블루레이가 코멘터리, 인터뷰 여러 편을 새로 갖춘 한정판으로 4월11일 발매된다. 이 소식을 기념해 <씨네21> 트위터 스페이스에 나온 이경미 감독은 우여곡절 끝에 저작권 문제를 해결하고 리마스터링과 색 보정에 임한 사연을 들려줬다. “<미쓰 홍당무> 촬영 당시에는 디지털카메라로 영화를 촬영하는 일이 흔치 않았어요. 디지털로 찍은 걸 필름으로 옮겨 상영했는데, 그걸 다시 디지털로 리마스터링했어요. 그러면서 이야기를 새롭게 보니 인물들이 화도 많이 나 있고, 시끄럽더라고요. 이들이 가진 발랄함이 이야기의 매력이겠구나 싶어 원색을 살린 톤으로 보정했어요.” 이경미 감독은 직전 연출작인 넷플릭스 시리즈 <보건교사 안은영>의 “블링블링함”에 영향을 받아 쨍한 색감이 더 좋아진 것 같다고 덧붙였다.
유리 선생님, 어디 계세요?
극장에서 작품을 선보인 지 13년 만인 2021년, 이경미 감독과 출연진이 재회한 코멘터리도 블루레이에 수록됐다. 배우 공효진, 서우, 이종혁, 황우슬혜가 녹음에 참여했다. “배우들과 개별적으로는 만났어도 이렇게 다 같이 모인 건 개봉 이후 처음이었을 거예요. 그런데도 별로 안 어색하더라고요. 제가 지금껏 기억하는 인상적인 부분들을 배우들도 기억하고 있었어요.” <미쓰 홍당무> 안과 밖에서 여전히 비슷한 질감의 캐릭터로 살아가고 있는 한 사람 덕에 이들의 복기 작업은 더욱 수월해졌다. “황우슬혜 배우가 약속 시간이 됐는데 안 나타난 거예요. 알고 보니 일정 전달이 잘못돼 운동을 하고 있었대요. 상황을 말하니 배우가 너무 놀라 운동복을 입고 달려왔어요. 그 당시 유리 선생님이 변하지 않고 다시 나타난 것 같아 반갑고 훈훈한 순간이었죠.” 지상에서 한발 뜬 채 덤벙이기도, 통통 튀기도 하던 유리 선생을 안다면 웃을 수밖에.
감독님 전공은 러시아어
그 유리 선생의 명대사이자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잊을 수 없는 러시아어 단어가 있다. 라이터를 뜻하는 그 낱말은 엄청난 발음으로 관객을 충격과 폭소로 몰고갔는데, 이경미 감독은 <미쓰 홍당무> 각본에 그걸 쓰는 순간 뭉클했단다. “나의 10년이 이렇게 빛을 발하는구나!” 연극영화과를 지망했으나 아버지가 러시아어과 원서를 써오면서부터 이경미 감독의 20대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엉켰다고 한다. 대학에서 낯선 언어를 전공한 후 어학연수도 다녀왔고, 해운회사에서 외국인 상무를 도와 3년 정도 일했다고. “너무 재미없었죠. 인생의 보람을 못 느끼다 회사를 때려치우고 영화 공부를 시작했어요. 당시 스물여덟이었는데, 우리 과에서 나이가 제일 많았어요. 10년을 러시아어에 공들였는데 돈은 돈대로 쓰고 허송세월 보냈구나 싶었어요.” 그랬던 이경미 감독에게 10년의 의미를 되찾게 해준,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선배들이 나서서 가르쳐줬다는 회심의 러시아어 한방은 영화를 통해 확인하시길. 돌고 돌아 왔지만, 역시 감독이 작품을 만들기까지 보낸 날들 중 헛된 시간은 없다고 끄덕이게 될 테다.
이경미 감독과 양미숙씨
“나도 알아, 내가 별로라는 거.” 이경미 감독이 <미쓰 홍당무>의 핵심 대사로 꼽은 양미숙의 한마디가 있기까지도 오랜 밤낮이 필요했다. “크랭크인 앞두고 막판에 찾은 대사예요. 각본이 투자사를 통과하고, 캐스팅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계속 찜찜했어요. 나만 각본의 문제점을 알고 있는 것 같았어요. 미숙이는 왜 그럴까. 미숙이는 왜 사람들을 웃기면서 원맨쇼를 하는 걸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으니까요. 그렇게 내내 미숙이 생각을 하며 속앓이를 하던 어느 날 버스를 타고 가다 그 대사가 딱 생각났어요. 억울하다고 느꼈던 그 순간 내가 왜 그랬을까 묻다보니 그 대사가 떠오르더라고요. 지금도 그 대사에 애착이 있어요. (공)효진 배우가 너무 잘해줘서 촬영하던 순간도 생생해요. 현실에서 말하기 너무 창피한 말이잖아요. 사람들 앞에서 그런 말을 외쳐야 하는 일은 없는 게 좋겠죠? (웃음) 굉장히 자기 고백적인 이야기를 <미쓰 홍당무>에 후회 없이 썼구나하는 생각을 많이 해요.”
이경미 감독의 차기작은
이날 트위터 스페이스에 함께한 많은 청취자가 <보건교사 안은영> 시즌2 제작 여부를 궁금해했다. 방송 후반 무렵 이경미 감독은 새 시즌에 관한 결정은 오직 넷플릭스에 달렸다고 했지만, <보건교사 안은영> 사운드트랙 음원이 곧 나올 거라는 뉴스를 전해 팬들을 기쁘게 했다. 연출작에 삽입되는 노래의 가사를 직접 쓰곤 하는 그에게 언젠가 뮤지컬영화를 찍을 계획이 없느냐고 묻는 청취자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다음 작품으로 호러영화를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경미식 공포를 살짝 맛볼 수 있는 이영애 주연의 단편 <아랫집> 또한 이번 <미쓰 홍당무> 블루레이에서 볼 수 있다. 새 영화 시나리오를 집필하느라 석달째 집 밖을 잘 안 나가고 있다는 이경미 감독이 간만에 “즐거운 텐션”을 느꼈다는 이 방송은 <씨네21> 트위터에서 다시 들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