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어둠을 연기하기: '소년비행' 원지안, 윤찬영
2022-03-30
글 : 임수연
사진 : 오계옥

10대 청소년들이 주인공이라면 청명한 기운을 내뿜는 청춘 드라마를 흔히 떠올리지만, <소년비행>은 마약 및 범죄가 등장하는 누아르물이다. 부모에게 마약 운반 수단으로 이용되던 18살 소녀 다정(원지안)은 충격적인 사건을 겪은 후 쫓기듯 시골로 내려간다. 다정은 혼자 모든 것을 감내하려는 촌놈 윤탁(윤찬영)에게 그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대마 밭의 존재를 알려주고, 주변 친구들까지 뛰어들며 청소년들은 각자의 목적을 위해 대마를 키우는 위험천만한 일에 발을 담근다. 하지만 10대에게는 아직 어리기에 가능한 순수한 감정이, 어떤 유혹에도 무너지지 않는 선의가 있다. 다정과 윤탁을 연기한 원지안과 윤찬영은 청춘물과 누아르라는 이색적인 조합을 현실화할 수 있는 최적의 캐스팅이다. 아침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지는 스케줄 강행군에도 불구하고 두 배우는 신중하게 질문을 곱씹으며 차분하게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윤찬영, 원지안(왼쪽부터).

- 두 배우 모두 고등학교 시절을 거쳐왔지만 <소년비행>의 소재는 직접 경험해본 적이 없을 만한 일이다. 각자의 기억에서 연기의 재료를 직접적으로 빌려오는 방식이 불가능했을 텐데 어떻게 작품에 접근했나.

윤찬영 살면서 마약은 본 적도 볼 일도 없으니까. (웃음) 마약은 어둠의 세계에서 유통되지만 수면 위에 올라온 관련 정보들이 있다. 뉴스를 통해 실제로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 찾아보면서 소재에 대한 사실감을 얻어갔다. 마약뿐만 아니라 대마초에 대해서도 조사를 많이 했다. 대마초의 재배·수확 시기를 고려할 때 <소년비행>의 배경은 여름이 될 수밖에 없다.

원지안 인물에 접근하기 위해서 같은 경험을 공유할 수는 없다. 내가 지금까지 겪어온 일 중에서 다정이 느끼는 압박감과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감 등을 유사하게 줬던 사건이 무엇이 있었나 고민을 해봤다. 당시 친구와 내가 이렇게 생각했다면, 그래서 어떤 일이 벌어졌다면 이는 다정이 겪는 사건과 공유될 수 있을까? 일종의 상상도 했다. 그렇게 경험의 조각을 모으며 10대 시절을 다시 되돌아봤다. 미성년 때의 나와 성인이 된 이후의 나는 어떤 차이가 있으며, 미성년이란 무엇일까? 그 나이 때 용기를 낼 수 있는 부분과 없는 부분, 아무것도 모르고 힘 있게 나아갈 수 있는 부분과 용기조차 가질 수 없는 부분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 “이번 생은 망한 것 같다”는 다정과 윤탁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아직 살아갈 날이 훨씬 긴 10대 청소년들이 어쩌다 이토록 비관적인 생각을 품게 됐을까.

원지안 과거 다정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대본에 적혀 있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엄마로부터 도망칠 생각을 해본 적이 정말 없었을까 생각해봤다. 시도는 해봤지만 안됐을 수도, 혹은 시도할 생각조차 못했을 수도 있다. 달아나면 엄마가 죽인다고 덤벼들고 아니면 혼자 생을 마감해야 하는데, 삶에 대한 희망은 더이상 보이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성장하면서 겪고 느꼈던 것들이 자신도 모르게 하나의 역사가 되고, 나와 너무 끈끈해지면 그냥 내가 되어버린다. 벗어날 수 없는 곳에 내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충분히 이번 생은 망했다고,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는 운명이라고 좌절할 수 있다.

윤찬영 윤탁은 어떻게든 자신의 힘으로 책임지고 문제를 풀어내고자 했는데, 발버둥을 쳐도 제자리에 머물고 오히려 늪으로 빠져들어간다. 버티고 버티다가 스스로 정해놓은 한계치를 넘어가버린다. 지금까지도 힘들었는데 여기서 더 힘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 ‘망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건 희망에 대한 문제다.

- 마약은 어른들이 탄생시킨 지하산업 아닌가. 보호를 받아야 할 청소년들이 아이러니하게도 어른들이 만든 마약 범죄에 휘말리고, 그럼에도 그들이 힘을 합쳐 무언가를 해내는 극의 구성이 시사하는 바가 있다.

윤찬영 어른이 된 후 청소년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에 제약이 많았다는 것을 많이 느꼈다. 때문에 청소년이 직접 문제를 해결해나가기 위해서는 어른보다 더 많은 노력과 힘이 필요하다. <소년비행>의 10대들이 힘을 합쳐 문제를 해결해가고 그 안에서 각자 성장하는 모습이 너무 좋았다. <소년비행>은 힘을 보태줄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 소년들이 혼자 고민하지 않았으면 한다는 것,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원지안 사실은 아이들만의 힘으로 무언가를 해결하지는 않는다. 그 과정에는 좋은 어른의 도움이 존재한다. 그래서 <소년비행>이란 작품을 하면서 좋은 어른이, 그냥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 청소년기에만 가능한 관계들이 있지 않나. 그렇기에 다정과 그가 쫓기듯 내려간 시골에서 만난 친구들과의 교류가 극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윤찬영 어떤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그 상황을 이해하고 풀어가기 위해 제일 중요한 것은 관계다. 정말 절친한 사이에서는 용서되는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용납되지 않기도 한다. 가령 윤탁과 국희(한세진)는 어릴 때부터 함께 성장했기 때문에 서로의 아픔까지 나눌 수 있는 친구다. 시골에서 살던 촌놈 윤탁은 도시에서 와서 거침없는 모습을 보여주는 다정이 처음 보는 유형의 인간이라 신기하게 생각한다. 깜짝깜짝 놀라면서도 뭔가 눈길이 가는 데서 관계가 출발한다.

원지안 다정이 구암에서 만나는 친구들은 그의 인생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다정에게도 성경 언니와 같은 조력자가 있었지만 처음으로 또래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가는 계기가 된다. <소년비행>의 주제라고 볼 수 있는 성장의 문이 이 친구들을 만나면서 열리는 것이다. 어떤 점에선 인간관계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 또래 배우들이 함께했던 현장 분위기는 어땠나. 드라마 소재는 무겁지만 비슷한 나이 또래라서 꽤나 돈독했을 듯한데.

윤찬영 시골 배경이라 충남 보령에서 촬영했다. 촬영이 일찍 끝난 날은 다 같이 바다로 놀러갔다. 그땐 더위가 한풀 꺾였을 땐데 물이 따뜻했다. 다 같이 물장난하면서 재밌게 놀았다.

원지안 조개구이도 먹었다. 바다에 처음 갔을 때가 제일 따뜻했고, 11월 말쯤 갔을 때는 진짜 발이 떨어져나가는 줄 알았다. (웃음) 그 바다는 계속 안 차가울 줄 알았는데!

윤찬영 촬영 전에도 많이 만나면서 친해졌다. 각자 대본을 갖고 와서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서로 연기도 봐주면서 방향성에 대해 많이 얘기했다. 뭔가 합숙 생활하듯이 숙소 생활을 하다보니 다 같이 엄청 돈독해졌다.

- 원지안 배우는 선배 배우들과 호흡을 맞춘 <D.P.>, 옴니버스영화 <해피 뉴 이어>와 달리 <소년비행>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주연으로서 극을 이끌어야 하는 중책을 맡았다. 경험해보니 어땠나.

원지안 대체 극을 이끌어간다는 건 무엇일까, 내가 정말 끌고 가는 게 맞긴 한 걸까? (웃음) 사실 내가 무언가를 하기보다는 주변에서 날 도와주는 것 같은데. 촬영 내내 복잡한 생각이 오갔다. 첫 주연작에 부담을 느끼는 만큼 촬영에 들어가기 전부터 감독님과 대화도 많이 나누고 열심히 준비했다. 막상 연기를 할 때는 평소의 나보다 정제시켜서, 딱딱하고 차갑고 다운되어 있는 모습으로 연기를 해야 했다. 이후 다정의 변화를 보여줘야 할 타이밍에 대해서도 고민이 많았다. 그렇게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면서 캐릭터를 잡아갔는데 화면에 잘 나왔을지 모르겠다. (웃음) 결과물이 좋았으면 좋겠다.

- 윤탁 같은 캐릭터가 연기하기 더 까다로울 수도 있다. 착한 모범생이야말로 개성을 잡기가 어렵지 않나. 동시에 <지금 우리 학교는>에 이어 또 고생을 많이 하는 역할을 맡았다.

윤찬영 나도 처음엔 윤탁이 착한 줄만 알았는데 대본을 다시 읽어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착한 아이라고 화 한번 안 내고 진지해야 하나? 꼭 순하게만 연기해야 하나? 본성이 착해도 어느 날 화가 나서 물건을 집어던지거나 폭발할 수도 있는 게 사람이다. 그래서 윤탁을 한곳에 잡아두려고 하지 않았다. 극중 별명이 굉장히 많다. 선비, 여우, 공폭스(fox)…. 어떤 때는 엄마 같고, 어떤 때는 여우 같고, 어떤 때는 허당 같기도 하다. 보는 각도에 따라 굉장히 달라질 수 있는 캐릭터다. 이번에 심적으로든 외적으로든 에너지를 많이 써서 <지금 우리 학교는>때보다 체중이 더 줄었다. 힘을 아끼면서 연기하지 않고 하루에 필요한 에너지 이상을 쏟아붓는 스타일이라 많이 먹는데도 살이 계속 빠졌다. 이건 고쳐야 할 부분인 것 같다.

- 두 배우 모두 또래 연기자들과 조금 다르다는 말을 평소에 많이 들었을 것 같다. 원지안 배우는 목소리가 낮아서 실제 나이(1999년생)보다 중후한 느낌을 주고, 윤찬영 배우는 <지금 우리 학교는>의 이재규 감독에 따르면 “느리게 말하고 느리게 반응”하는 스타일이다. 때문에 <소년비행> 같은 작품에도 잘 어울릴 수 있었을 것 같다. 분명 배우로서 강점도 될 수 있을 거다.

원지안 찬영이가 옆에서 봐서 알 텐데, 행실은 이따금 그렇지 않지만(웃음)… 어떤 느낌을 말하는 것인지는 너무 잘 안다. 아무래도 목소리가 한몫하는 것 같다. 지금 하는 인터뷰 같은 대화를 나누는 것도 굉장히 좋아하는데 받아주는 친구들이 아직까진 몇명밖에 없다. (웃음) 이런 면이 강점으로 적용될 수 있는 작품도 혹은 약점이 될 수 있는 작품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나를 믿는다. 열심히 하고 있다. 그리고 재밌게 노는 것도 잘한다. (웃음)

윤찬영 밥도 천천히 먹어야 좋다고 하지 않나. 내가 가진 생각을 잘 포장해서 말로 전달하고 싶어서 시간이 오래 걸릴 때가 있다. 답답하지만 않다면 느린 게 나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나도 빨리할 땐 빨리 할 수 있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보여드렸듯 랩을 하는 것도 좋아한다. (웃음) 어릴 때부터 연기를 하면서 성격이 차분해졌고, 생각을 수없이 많이 하면서 길을 찾아 얘기하는 것이 습관이 됐다. 내가 가진 차분한 모습이 더 깊이 팔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 배우로서 향후 계획을 들려줄 수 있나.

원지안 어쩌다보니 지금까진 어두운 작품을 주로 찍었는데, 요즘 빛이 너무 고프다. (웃음) 건강한 작품을 하고 싶다. ‘어? 이 캐릭터를 연기하는데 내 마음이 왜 이렇지?’ 하고 스스로 놀랄 만큼 밝은 인물을 만나고 싶다. 배우로서 나는 이제 출발선에서 한발을 내딛었다고 생각한다. 많은 작품들을 더 만나기 위해서 일단 삶을 건강하게 잘 가꾸어 나가려 한다.

윤찬영 대본을 읽고 있다. 그동안 내가 겪으며 쌓아온 것들 그리고 새로운 경험들까지 작품에 잘 녹여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정말 좋은 대본이 있다면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정말 좋은 작품을 함께 만들고 싶다.

윤찬영, 원지안(왼쪽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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