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매트릭스: 리저렉션>(이하 <리저렉션>)을 보았다. 3편 이후 18년 만에 정식 후속작을 자처하며 돌아온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 라나 워쇼스키가 감독을 맡고 키아누 리브스와 캐리앤 모스가 주연으로 컴백하는 등 여러모로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어째선지 주역 3인방 중 둘만 참여했는데, 모피어스 역할을 맡았던 로런스 피시번이 함께하지 않은 이유가 조금 궁금하다.
네 번째 <매트릭스> 영화가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별로 기쁘지 않았다. 3부작이 워낙 완벽했기에 더 나올 이야기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매트릭스> 3부작은 완벽하게 닫힌 메시아 서사이고, 두번 죽은 메시아는 다시 살아나면 안되는 법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매트릭스> 영화가 나온다는데 챙겨보지 않을 수야 없지. 큰 원고 하나를 마무리하자마자 VOD 서비스를 결제하고 곧장 <리저렉션>을 감상했다. 1편의 부실한 오마주로 첫 장면을 시작한 영화는 곧이어 워너브러더스 놈들과 매트릭스 팬덤을 신랄하게 까대는 재기발랄한 장면들로 이어진다. ‘너네가 그렇게 좋아 죽는 빨간약 파란약 아주 목구멍에다 퍼먹여주마’라며 여기저기 와르르 쏟아붓는 장면들을 보고 있자면 귀찮게 왜 또 감독을 시키느냐며 투덜대는 라나 워쇼스키의 모습이 상상될 정도다. 몇 차례 귀여운 투정이 지나간 후에야 시작되는 본격적인 스토리는… 음… 이건 너무나 훌륭한……리메이크인데?
사실 후속작이면서 리메이크인 영화는 <리저렉션>이 처음은 아니다. <스타트렉: 더 비기닝>에서 이어지는 리부트 <스타트렉> 시리즈가 그랬고,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다섯 번째 영화인 <터미네이터 제니시스>가 그랬다. 이들 작품이 취한 리메이크 전략은 간단하다. SF의 특권인 시간 여행으로 뻔뻔하게 시리즈를 리셋해버리는 것이다. 시간선이 분리되니 원작 팬들의 심기를 건드릴 일도 없고, 백지에서 새로 시작할 자유도 얻을 수 있다.
반면 <스타워즈>는 리메이크가 아닌 척하는 리메이크 전략을 취해왔다. 프리퀄과 시퀄 3부작의 첫편은 사실상 <스타워즈 에피소드4: 새로운 희망>의 게으른 리메이크다. 사막 행성에서 지루한 나날을 보내는 아이. 기이한 인연으로 시작되는 여행. 출생의 비밀. 초능력 각성. 가면 쓴 악당. 폭발하는 우주 요새와 광선검 대결…. 시리즈 전체에서 가장 혁신적인 작품이었던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마저도 이야기 구조만 놓고 보면 <스타워즈 에피소드5: 제국의 역습>의 리메이크로 해석될 여지가 충분하다.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최근작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이하 <다크 페이트>) 역시 후속작이면서 리메이크인 작품의 계보에 오를 만하다. 제작자로 돌아온 제임스 카메론은 뻔뻔하게 <다크 페이트>가 <터미네이터2: 심판의 날>의 직접적인 후속작인 양 소개했지만 실상 이 영화는 <터미네이터> 1편의 리메이크에 가깝다. <다크 페이트>는 1편의 스토리 구조를 상당 부분 차용하면서도 동시에 2020년대에 어울리도록 낡은 부품들을 새것으로 교체했다. 끔찍한 임신 중단 로봇의 습격을 피해 아들을 출산하는 엄마의 이야기가 아들도 아빠도 엄마도 없이 여성에서 여성으로 계승되는 임신 없는 출산 이야기로 완벽하게 탈바꿈한 것이다.
다시 <리저렉션> 이야기로 돌아와서. 이 작품 역시 <다크 페이트>와 비슷한 길을 걷는 일종의 후속작 겸 리메이크 영화다. <매트릭스> 1편의 이야기 구조를 거의 그대로 따르면서도 이제는 낡아버린 전작의 요소들을 스스로 조롱하며 새롭게 고쳐보려 한 것이다. 다만 조금 더 파괴적인 형식을 빌려서.
전작의 수십년 후를 다루는 <리저렉션> 속 세계는 20년간 달라진 현실 세상의 복잡한 싸움을 투영할 수 있게끔 적절히 수선된 무대다. 인간과 기계로 구분되던 선명한 대립 구도는 흙탕물처럼 흐릿해졌고, 기적처럼 빛났던 승리는 퇴색했으며, 더는 선도 악도 구세주도 기계 악마도 존재하지 않는다. 남은 것은 늙어 지친 사람들뿐. 그렇게 성숙해진 세상에서 성숙해진 주인공들이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영화는 네오의 그림자에 가려져 상대적으로 비중 있게 다루어지지 않았던 트리니티에게 조금 더 집중한다. 몇몇 사람들이 비판하는 것처럼 포커스를 몰아주었느냐면, 글쎄. 여전히 탑에 갇힌 공주님 같아서 나는 좀 불만스러웠다. 하지만 전반적으론 건강한 의도를 꿋꿋이 관철시킨 훌륭한 후일담이자 리메이크였다.
하지만 새 옷으로 갈아입은 <매트릭스> 세상은 왠지 어색하다. 이미 낡아버린 설정에 아무리 각색을 더하고 화려한 CG를 덧칠해본들 본질적인 낡음을 감출 수는 없는 모양이다. 말이 안되는 이야기를 말이 되게 만드느라 억지로 설정을 덧붙인 탓에 매트릭스 세계는 점점 조잡해진다. 쓸 만한 재료를 전부 써버리고 남은 잡동사니를 그러모아 만든 것처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물들 역시 다들 왠지 기운이 없어 보인다. 이야기 세상이 품고 있는 재료는 무한하지 않다. 그 세상은 오직 하나의 이야기를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끝나면 세계도 끝난다. 소진된 세계를 되살리려 해봐야 구슬프기만 할 따름이다.
그런데도 영화판의 제작자들은 왜들 그렇게 세계관과 프랜차이즈에 집착하는 걸까? 그들은 마치 흥행작의 시나리오에 신화적인 힘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듯하다. 어쩌면 성공한 이유를 몰라서 그러는 것일 수도 있다. 메가히트의 비결이 정확히 무엇인지 그들 스스로도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기에, 어설피 흥행 공식을 추측하기보다는 같은 배우들로 같은 이야기를 똑같이 반복하고 재현하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좋아할 만한 메뉴를 가져다 요즘 사람들의 취향에 맡게 살짝 재료를 바꾸고 조미료를 첨가하는 프랜차이즈 음식점마냥.
그때 그 70년 전통 청국장 정말 맛있었는데. 근데 요즘 애들 청국장 싫어하니까 여기다 민트 초코를 섞으면 좋아하겠지? 아니다. 역효과일 뿐이다. 입 짧은 아이에게 시금치 먹이려고 믹서기에 잘게 갈아서 밀크셰이크에 몰래 섞는 그런 짓은 제발 참아달란 말이다. 그건 시금치에도 밀크셰이크에도 실례니까.
70년 전통 원조 맛집이 여전히 성업하는 이유는 음식이 소모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나 소설은 몇번 먹는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한번 만들어두면 사람들이 영원히 골수까지 알아서 우려먹을 수 있다. 굳이 다시 만들 이유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알던 그 맛이 변함없이 그곳에 남아 있으니까. 나는 차라리 새로운 맛이 좋다. 그러다 때로는 맛없는 음식에 된통 당하기도 하지만 그것도 삶의 재미려니 한다.
<리저렉션>은 좋은 영화였다. 하지만 안 만들어졌으면 더 좋았을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