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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다은 평론가의 RECORDER] 속력을 자각한 세계의 적막한 얼굴, <페라리>
한 눈에 보는 AI 요약
마이클 만의 영화 <페라리>는 전기영화의 전형을 벗어나 속력의 세계를 탐구하는 독특한 작품이다. 그의 이전 작품과 달리 남성 간의 대립보다는 가족과 혈통을 중심으로 한 긴장을 다루며, 레이싱의 스릴보다 상실과 고독의 정서를 강조한다. 영화는 성당과 레이싱, 오페라 장면을 교차하며 속력과 정적의 대조를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마지막 비극적 사고 장면을 통해 스피드의 잔혹성을 드러낸다. 또한, 주인공 페라리가 아닌 그의 아내 라우라가 영화의 정서를 주도하며, 마이클 만 특유의 여성 캐릭터의 존재감을 부각시킨다.
  1. 마이클 만의 복귀작 <페라리>
    1. 전기영화임에도 전통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독특한 리듬과 분위기를 형성
    2. 레이싱의 스릴보다 상실과 고독을 강조하는 연출
  2. 마이클 만 영화의 남성성
    1. 이전 작품들은 남성 간의 대립과 유사성을 중심으로 전개
    2. 페라리에서는 경쟁 상대 없이 가족과 혈통을 중심으로 한 서사 전개
  3. 속력과 정적의 대비
    1. 성당에서의 미사와 레이싱 장면을 교차 편집하여 속력의 신화를 탐색
    2. 오페라 장면을 통해 상실과 그리움을 강조하며 정적인 분위기 연출
  4. 비극적 사고와 속력의 잔혹성
    1. 레이싱 중 발생한 참혹한 사고 장면을 통해 속력의 위험성 부각
    2. 카메라의 움직임을 통해 스피드의 무력함과 죽음의 불가피성을 표현
  5. 라우라의 존재감과 여성의 얼굴
    1. 페라리의 아내 라우라가 영화의 정서를 주도하며 중심적인 인물로 부각
    2. 마이클 만 영화에서 남겨진 여성 캐릭터들의 강렬한 존재감 강조

마이클 만의 10여년 만의 복귀작인 <페라리>는 지난 1월 극장에 걸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취를 감췄다. 영화에 대한 국내외 관객들의 반응도 엇갈린다. 혹평의 근거 중 하나는 이탈리아인 엔초 페라리의 전기영화임에도 할리우드 배우를 기용해서 이탈리아어가 아닌 어색한 억양이 섞인 영어를 굳이 쓰게 했다는 점이다. 서구인들만큼 체감하지는 못해도 어느 정도 일리 있는 불만이긴 하다. 하지만 <페라리>를 비판하는 이들이 주로 문제 삼는 레이싱 장면의 밋밋함, 서사의 느린 전개, 치정극의 상투성 등에 대해서라면 다르게 생각해보고 싶다. <페라리>는 이탈리아 스포츠카의 전설, 엔초 페라리의 아우라를 기대한 관람자들을 배반한 영화일지 몰라도, 기이한 리듬과 분위기로 세공된 일련의 장면들이 레이싱의 속력을 우아하게 압도하는 세계로 불릴 만하다.

마이클 만의 지난 작품들 속, 세계의 축은 두 남자의 관계로 이루어진다. 그들은 같은 목표를 좇을 때도 있지만(<인사이더>(1999), <마이애미 바이스>(2006)), 주로 충돌하고 대립한다(<히트>(1995), <콜래트럴>(2004), <퍼블릭 에너미>(2009)). 그러나 그 차이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마이클 만의 남자들은 쫓고 쫓길 때조차 서로의 시야를 벗어나지 않는 움직임으로 교차하고 접속한다. 그들은 한 운명을 나눠 짊어지고 같은 방향을 응시하는 존재들이기도 하다. 요컨대 마이클 만의 대표작 <히트>의 밀도는 강력계 경찰 빈센트 한나(알 파치노)와 범죄자 닐 맥컬리(로버트 드니로)가 서로의 거울상처럼 보이는 장면들에서 막강해진다. 둘이 마주 앉아 긴 대화를 나누는 저 유명한 장면에서 그들이 상대를 꿰뚫어보며 건네는 말은 실은 그들 자신의 내면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마이클 만은 유사한 속성의 두 남자가 대면하고 어긋나는 타이밍, 그리고 어쩔 도리 없이 둘 중 하나가 죽어야만 하는 질서에서 무드가 발생하는 과정을 서사적 개연성보다 중대하게 여긴다.

마이클 만의 영화는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지 않으려는, 혹은 못하는 남성성의 세계이기도 하다. <히트>의 닐은 빈센트의 총에 맞아 죽어가며 씁쓸하게 되뇐다. “다시는 안 돌아간다고 했지.” <퍼블릭 에너미>는 영화의 상당 부분을 전설적인 갱스터 존 딜린저(조니 뎁)가 감옥에서 거듭 탈출하는 장면들에 할애한다. 이들이 돌아가지 않으려는 곳은 표피적으로는 감옥이지만, 그 말은 안전하고 범상한 일상에 정착할 수 없는 그들의 불가피한 기질을 단언한다. 그 뜻을 비극적으로 실현하듯 길 위에서 삶이 종결되는 한 남자와 그 순간을 끝까지 지켜보며 공유함으로써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을 또 다른 남자. <히트>는 어둠이 내려앉은 활주로에서 피 흘린 채 숨이 멎어가는 범죄자의 손을 꼭 부여잡는 경찰의 모습으로 끝난다. <콜래트럴>의 결말에서 맥스(제이미 폭스)는 지하철 맞은편 의자에 앉아 창백한 얼굴로 죽어가는 살인청부업자 빈센트(톰 크루즈)를 두려움이나 안도가 아닌, 형언할 수 없는 심정의 눈빛으로 응시한다. 우정, 사랑, 연대, 공감, 연민 같은 단어로는 쉽게 설명할 수 없는 묵직하고 본능적인 정념은 마이클 만이 줄곧 몰두해온 남성성의 신화이자 풍경일 것이다. 그는 이를 경박하게 옹호하지는 않아도, 그것이 그의 장르를 성립시키는 깊은 우물임을 감추지 않는다.

<인사이더>에서 시사 프로를 진행하는 노년의 마이크(크리스토퍼 플러머)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남자를 사로잡는 건,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가 아니라 “죽은 후 어떻게 기억될까”의 문제라고 말한다. 그의 고심은 사후에 남을 정의로운 업적, 성과와 관련되므로 손에 피를 묻히는 마이클 만의 주요 인물들에게 그대로 적용하긴 무리가 따르지만 이렇게는 말해도 될 것이다. 그들은 나아갈 뿐, ‘되돌아가지’ 않는 남자들로 기억되길 택한 존재들이다. 그래서인가. <콜래트럴>의 살인청부업자가 어두운 도심의 풍경을 뒤로하고 힘없이 고개를 떨구기 직전 내뱉은 마지막 말은 구슬프다. “LA 지하철에서 한 남자가 죽으면 누가 알기나 할까.” 숨이 끊긴 그를 홀로 태운 지하철이 저 멀리로 사라진다.

<페라리>의 경우는 어떤가. 페라리(애덤 드라이버)에게는 남성 짝이 없다. 그는 더이상 레이싱 선수가 아니므로 경쟁 상대가 없다. 기업의 수장으로서 견제해야 할 팀이 없는 건 아니지만, 영화는 이를 서사적으로 부각하는 일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성인 남자 파트너 대신, 이 영화에는 아버지와 아들의 구도가 생긴다. 그 구도는 팽팽한 긴장을 갖출 여력이 없다. 아들의 자리는 텅 빈 채 아버지의 삶에 유령처럼 들러붙어 있거나, 존재해도 아직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지 못한다. 은퇴한 레이서이자 사업가인 페라리의 장소는 길 위도, 링 위(<알리>(2001))도, 레이스 트랙 위도 아닌 양립하기 어려운 두 가정(혹은 침실), 그리고 그 가정들과 분리할 수 없는 파산 직전의 기업이다. 마이클 만의 영화에서는 어쩐지 낯선 상속, 보존, 제도 등의 단어가 개입하는 관계들이 들어선다. 그는 고독해 보이기보다 피곤해 보인다. 도심에 내던져진 단독자들의 치열한 운명이 아니라, 혈통을 둘러싼 비밀과 다툼의 파토스가 이 영화의 저변에 흐른다. 만은 그 파토스를 레이싱의 들뜬 쾌감으로 상쇄하지 않는다. <페라리>가 스피드를 좇는 남성성의 세계라고 해도, 스피드와 한몸이 되는 짜릿함에 온 육체와 영혼을 거는 레이싱의 신화는 이 영화의 것이 되기 어렵다. 오히려 그 신화를 치졸한 세속의 영역으로 끌어내리는 아버지와 아들의 질긴 구도, 이를 성립시키는 치정 관계, 즉 통속성이 이 세계의 요체다. 영화 도입부, 페라리의 움직임이 이를 압축적으로 형상화한다. 이른 아침, 잠든 여인과 아들을 두고 집을 나와 차에 오른 페라리가 한껏 스피드를 올려 도착한 곳은 아내가 거주하는 건물이다. 경기에서 우승하는 과거의 순간을 흑백 화면으로 재현한 프롤로그를 제외하면, 페라리가 운전대를 잡고 선수처럼 속력에 몸을 맡기는 모습은 영화를 통틀어 이 장면이 유일하다. 연인과 아들이 사는 집, 그리고 아내가 아들의 유령과 사는 집. 1957년, 페라리의 사적인 레이스가 두집 사이에서 펼쳐진다.

마이클 만은 선수들의 경기 장면보다는 그 바깥에서 스피드를 탐하는 세계의 성질과 이면을 구현해보려고 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강렬한, 서로 충돌하는 세개의 시퀀스는 그렇게 탄생한다. 영화 초반, 페라리가 레이싱 팀원들과 성당에서 미사를 보는 장면은 한 선수의 자동차가 트랙을 질주하는 장면과 교차된다. 성당 안 남자들은 초시계를 꺼내 들고, 트랙 위의 남자들은 달리는 차를 주시하며 초시계를 본다. 스피드의 활약상에 감탄하면서도 그 속도를 인지하는 행위에서 더 큰 긴장감을 발생시키는 이 편집에는 다소 이상한 지점도 있다. 페라리와 팀원들이 초시계로 성당 밖, 차의 속력을 재는 모습은 그들이 총소리를 듣는다는 설정에 기인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보는 것은 차의 도착과 함께 허공에 총이 발사되는 트랙 장면에 이어 성당 안 남자들이 ‘총소리를 듣는다는 설정’하에 초시계를 누르는 장면이다. 우리는 성당 내부에서 정작 그 사운드를 듣지 못한다. 말하자면, 만은 두 시공간의 동시성을 교차편집을 통해 시각적으로 구축하면서도 청각적인 시차를 굳이 가리지 않는다. 요란한 속력과 자본의 운동에 반응하는 정적이고 경건한 제의의 시간을 시청각적으로 팽창하는 데에 더 목적을 두는 것이다. 성당을 채우는 미사곡에 어느새 초시계의 초침 소리가 울려 퍼지고 트랙을 달리는 자동차의 굉음이 성당의 음악과 뒤섞이는 과장된 편집에서도 만은 두 시공간이 통하는 활짝 열린 문을 대범하게 상상한다. 그 솜씨는 더없이 유려해서 둘의 이질성을 물을 새가 없다.

장엄한 미사곡과 어우러진 초시계의 사운드, 그 재촉의 리듬이 불온하기는커녕 쾌활하게 들리는 것은 <페라리>라는 세계의 한 측면을 물질화하기 때문일 것이다. 레이싱이 끝나면 미사도 마무리된다. 성당 안팎의 남자들이 초시계로 예민하게 촉각을 세우던 ‘1분30초’, 섣불리 브레이크를 밟지 않아야 닿을 수 있는 그 속도는 마치 그들의 세계를 구성하는 시간 단위처럼 느껴진다. 미사 중, 신부는 만일 예수가 모데나에서 태어났다면 목수가 아닌 신자들과 같은 금속 장인이었을 텐데, 그러한 기술로 만든 엔진이 “불을 내뿜는 힘으로 세상을 빨리 달리게” 하므로 신에게 감사하자고 강론한다. 전쟁 후 재건과 번영의 가치를 중시하던 시기에 자동차업으로 부흥을 맞이한 도시의 성직자가 노동자들에게 할 법한 말일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일상의 시간을 영적으로 잠시 중단하는 종교 의식과 스피드의 가치, 쾌감이 형식적으로 서로를 환대하는 구조다. 이 시퀀스에서 만의 교차편집은 충돌을 의도하기보다는 두 시공간의 배치되는 의미와 속도를 오직 영화적 리듬으로 조응하는 일에 몰두한다.

성당/레이싱 교차편집으로부터 정서적으로 가장 먼 곳에는 아마도 오페라 시퀀스가 놓일 것이다. 오페라 장면은 성당/레이싱 장면을 부드럽고 완고하게, 음악으로 멈춰 세운다. 무대 위 가수들의 장면은 객석 일층과 이층에 따로 앉아 노래에 젖는 페라리와 연인 리나(셰일린 우들리)의 얼굴, 집 안의 열린 창문으로 들려오는 선율에 취한 라우라(페넬로페 크루스)와 어머니의 모습을 오간다. 인물들은 서로 떨어진 곳에서 음악에 감응하며 각기 다른 추억에 빠져든다. 라우라가 페라리와 어린 아들이 함께하던 밝은 날의 풍경을 되짚으며 미소 섞인 얼굴로 눈물 지을 때, 페라리의 어머니는 전쟁에서 죽은 큰아들이 기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상기하고, 페라리가 세상을 떠난 아들과의 따스한 어느 날을 떠올릴 때 리나는 페라리에게 임신 사실을 알리며 기뻐하던 순간을 되새긴다. 인물들 모두 되찾을 수도, 망각할 수도 없는 과거를 하염없는 얼굴로 그리며 그 시간 속에 고립된다. 음악이 장면 사이를 유영하며 연결할수록, 이들의 좁힐 수 없는 거리감만이 쓸쓸하게 체감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거리감은 경쟁적인 스피드, 피로한 치정, 냉혹한 죽음이 뒤엉킨 세계에서 꿈꾸기 어려울 평온함을 잠시나마 허락한다. 만은 간절한 노래의 음성과 인물들의 정념 가득한 얼굴, 그리고 아련한 플래시백을 감상주의의 덫에서 구해내 이어 붙여서 <페라리>의 심장이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적막하게 찢겨진 세계임을 전한다. 그 방식은 우회로 없이 간략한데, 시적인 정취로 어둠에 고인 상처를 매만진다. 앞선 성당 장면에서는 부족하던 제의적 공기가 비로소 이 장면에서 충만하게 빚어진다.

성당 장면이 탐색한 스피드의 신화와 환상, 오페라 장면이 구축한 잃어버린 시간을 향한 향수의 정조는 그러나, 영화 후반부에 들이닥친 충격적인 사태로 단칼에 무너지고 만다. 레이싱 중이던 차가 사람들을 치어 아이들을 포함해 10여명이 숨진 실화의 여파 때문만은 아니다. 유력한 우승 후보인 알폰소 데 포르타고(가브리엘 레오네)의 차가 나무들이 늘어선 길을 달리는 장면에서 운명은 바퀴가 도로 위 설치물에 닿는 순간 급변한다. 공중으로 날아오른 차가 하강하며 길가에서 구경하던 인파를 단숨에 덮쳐 쓰러뜨리고, 처참하게 부서진다. 쾌속의 쾌감이 비극적 재난으로 전환되는 데는 단 몇초도 걸리지 않는다. 매끄러운 질주-허공으로의 상승-무자비한 충돌-추락과 대파. 완전히 무방비한 상태로 종잇장처럼 짓이겨져 도미노처럼 쓰러지는 사람들. 이 순간의 운동성은 순식간에 일어나고 돌변해 길가에 널브러진 시신들로 귀결된다. 서사가 들어설 틈을 차단한 재빠르고 선명한 파멸의 스펙터클이다.

<페라리>의 비판자들은 대체로 이 대목의 폭력성을 지적하거나 조악함을 비웃는다. 그러나 불경하게 들리겠지만, 이 장면의 망설임 없는 모진 운동성, 초시계의 정밀함 따위로 통제할 수 없고 그저 우연과 운명의 잔학한 결합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인 죽음의 스펙터클은 우리를 사로잡을 만하다. 그 스펙터클의 강력함을 정확히 해명하기는 쉽지 않으나 아마도 이 장면을 운용하는 카메라의 움직임이 그런 인상에 일조한다고 짐작해볼 수 있다. 사고 장면이 그저 죽음의 외설적인 물신화로 보이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매끈한 경주와 무참한 사고의 동행자이자 목격자인 카메라는 사람들을 친 차가 땅에 처박힌 뒤에도 운동을 멈추지 못한 채, 지옥의 광경을 지나쳐 텅 빈도로 위를 미끄러진다. 그리고 되돌아와 이번에는 찬찬히, 길가에 널브러진 육체들, 울부짖으며 달려오는 가족들을 비춘다. 이 대목에서 카메라의 움직임은 극적인 죽음의 드라마를 찍는다기보다 제어할 수 없는 스피드의 속성에 대한 자각을 표현하는 것 같다. 자각은 뒤늦게 일어나고 카메라가 다시 돌아온 자리에는 되돌릴 수 없는 죽음뿐이다. 카메라의 눈이 시신들을 지날 때, 그 동선은 스피드라는 진취적이고 쾌락적인 액션에 따르는 더없이 무기력한 시선의 리액션이며, 그 리액션의 무용함만을 전시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 스피드의 욕망에 대한 영화의 비판적인 논평이 새겨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마이클 만의 이러한 설계와 스펙터클이 목적하는 바는 자명해 보인다. 그는 이 장면에서 어떤 의미도 가장하지 않고, 어떤 무드도 양산하지 않는다. <히트> <콜래트럴> <퍼블릭 에너미> 등에서 죽어가는 남자의 느리게 흐르는 시간과 그를 감싼 풍경의 아우라 같은 것은 없다. 만이 제작에 참여한 <포드 V 페라리>(감독 제임스 맨골드, 2019) 속 스피드에 산화한 레이서, 마치 지평선 너머 심연 속으로 한순간 사라져버린 듯한 반영웅의 그림자 같은 것도 없다. 영화는 대낮의 도로 위에서 몸이 두 동강난 채로 뜬 눈으로 죽은 레이서의 노골적인 육체성을 주시할 뿐이다. 만은 그의 최후를 ‘무드’로 간직할 생각이 없다.

이 대목이 안긴 당혹감의 근원에는 한 소년의 죽음, 그의 짧은 존재감도 자리한다. 레이싱 장면에 불쑥 끼어든 어느 가족의 평범한 식사 장면은 경주를 구경하러 집 밖으로 뛰어나간 소년과 그를 쫓아가는 남동생, 그리고 막내아들을 붙잡아 집쪽으로 돌아오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이어진다. 이 가정의 첫째 아들이 사고의 희생자가 되는 것이다. 이는 익명의 소년이 불운하게 사망한 장면에 그치지 않고, 아버지가 둘째 아들을 구하는 동안, 장남이 죽음에 이른다는 설정으로, <페라리>의 인물들이 각기 다른 맥락으로 얽매인 트라우마와 그로 인해 파편화된 가족의 형상을 반복한다. 페라리의 어머니는 전쟁에서 사망한 첫째 아들을 떠올리며, 페라리를 겨냥해 “엉뚱한 아들이 죽었어”라는 잔인한 말을 무감하게 뱉는다. 라우라는 아들이 죽어가는 동안, 페라리가 새 아이를 품은 사실에 분노한다. 페라리와 리나 사이에 태어난 어린 아들이 ‘페라리’의 성을 갖길 애타게 원하는 동안, 페라리는 매일 큰아들의 무덤을 찾아 흐느낀다. 페라리와 둘째 아들이 함께 큰아들의 무덤으로 걸어가는 뒷모습이 영화의 결말이다. 그러니까 어쩌면, <페라리>는 사라진 장손의 어두운 무덤으로 거듭해서 향하는 영화인지도 모른다. 그 집요함으로 인해 마이클 만의 작품을 이루던 남성성의 세계가 이전보다 퇴행적이고 반동적으로 변모했다는 인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 영화가 스피드로 번영의 활기에 접속해 앞으로 나아가면서도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의 구멍으로 자꾸만 돌아가 웅크릴 때, 과거에 침잠하려는 본능이 스피드의 힘을 붙잡을 때, <페라리>는 여전히 마이클 만의 짙은 심리적 호흡으로 진동하는 세계다.

사납고 떠들썩한 총격전이 클라이맥스로 내세워진 경우에도 마이클 만의 영화가 결국 무겁고 느리게 감각된다면 그건 남성 단독자의 초상을 둘러싼 분위기와 풍경에 기인할 것이다. <페라리>의 특별함 중 하나는 그 리듬을 주관하는 존재가 페라리가 아닌 그의 아내 라우라라는 점이다. 이상한 걸음걸이로 다급히 걷고,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으며 고함을 질러도 그가 이 영화의 스피드를 땅으로 끌어당기는 무게추임은 분명하다. 아들을 잃고 남편에게 버림받고 그와 일군 회사마저 포기해야 하는, 무엇도 남지 않은 이 여성은 애수와 체념과 증오, 메마름과 관능성을 오가는 기묘한 얼굴의 역량만으로 당당히 <페라리>의 무드와 풍경이 된다. 남자들의 얼굴에 가려져 잘 언급되지는 않지만, 마이클 만의 영화가 남겨진 여성의 얼굴로 화면에 파고를 일으키는 진귀한 순간들을 우리는 알고 있다. 남편을 밀고하지 않으려 거짓말하는 아내가 경찰을 등지고 앉아 지난 시간의 굴곡을 되새기듯 꾸역꾸역 감정을 삼키던 얼굴(<히트>의 애슐리 저드), 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고도 꼿꼿한 모습을 유지하던 여인이 죽은 연인의 유언을 듣고야 내면의 동요를 허락하고 마는 얼굴(<퍼블릭 에너미>의 마리옹 코티야르), 아들의 무덤에서, 오페라 선율이 들려오는 방에서, 홀로 견뎌온 여자가 내내 사납고 건조하던 표정에 그리움의 온기를 피워내던 얼굴(<페라리>의 페넬로페 크루스). 그것은 영화 속 남자들이 보지 못하고 영원히 알지 못할, 오직 마이클 만의 카메라만이 기억하는 얼굴이다. 지난 시간을 배신하지 않은 여자들의 얼굴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