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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열의 촬영 미학] 일상이라는 예술, 카메라의 무빙과 숏의 배치로 읽는 <쇼잉 업>
한 눈에 보는 AI 요약
켈리 라이카트의 영화 <쇼잉 업>은 일상의 예술성을 카메라 무빙과 숏 배치를 통해 탐구한다. 영화는 도시 속 인간관계와 돌봄의 의미를 조명하며, 비둘기와 예술 작품을 동일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카메라는 움직임의 동기 없이 존재들을 연결하고, 편집을 통해 돌봄과 예술의 본질을 강조한다. 리지는 작업과 돌봄을 분리하지 않고, 예술은 타자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완성됨을 보여준다. 영화는 결국 예술이란 삶 자체를 전시하는 것임을 시사한다.
  1. 영화의 구조와 촬영 기법
    1. 영화는 느린 호흡과 비정형적 서사로 보이지만, 전통적인 극적 구성을 따른다.
    2. 카메라는 의미 없는 움직임이 아닌, 일반적 서사에서 벗어난 관계들을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2. 도시 공간과 돌봄의 역설
    1. 라이카트의 전작과 달리 <쇼잉 업>은 자연이 아닌 도시를 배경으로 한다.
    2. 도시 속 인물들은 각자의 작업에 집중하지만, 결국 서로를 돌보는 과정으로 나아간다.
  3. 비인간과 인간을 잇는 카메라 무빙
    1. 카메라는 동기 없는 무빙을 통해 일상의 사소한 존재들을 연결한다.
    2. 비둘기, 폐타이어, 스케이트보드 소년 등 무의미해 보이는 요소들이 영화 속에서 중요한 연결고리로 작용한다.
  4. 컷의 배치로 보는 돌봄
    1. 비둘기와 리지의 작품을 동일한 시선으로 배치하여 돌봄과 예술을 동일선상에 둔다.
    2. 작품의 완성과 비둘기의 치유가 같은 의미를 가지며, 돌봄이 예술 창작의 본질임을 강조한다.
  5. 예술과 노동의 관계
    1. 영화는 예술이 관념이 아니라 노동과 시간을 통해 완성됨을 보여준다.
    2. 등장인물들은 끊임없이 작업하고 돌봄을 수행하며, 예술이 삶과 분리될 수 없음을 시사한다.
  6. 예술은 언제 완성되는가?
    1. 비둘기가 날아오르는 순간, 예술과 돌봄이 완성됨을 상징한다.
    2. 리지와 조는 전시장으로 돌아가지 않으며, 예술은 결국 일상 속에서 완성됨을 깨닫는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오만한 생각을 했다.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느린 호흡과 극적이지 않은 서사에 느긋한 숏 배치로 이야기하는, 예측이 가능한 영화라고 상상했다. 의미 없이 움직이는 카메라, 헐렁한 숏의 배치와 느슨한 서사에 대한 안일한 평가는 나의 좁은 식견이 만든 오해였다. 이 영화는 느린 영화가 아니다. 극적 구성은 할리우드 서사의 관습 규칙을 철저히 따른다. 1막과 2막을 잇는 구성점과 2막과 3막 사이 구성점과 시간은 명확하고 카메라의 위치와 숏의 배치도 정확하다. 의미 없이 움직이는 카메라는 영화 전체 정박의 리듬을 깨뜨리며 무빙 컷 자체의 의미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 서사에서 떨어져 나간 관계들을 연결한다.

켈리 라이카트의 전작들은 주로 자연, 야외에서 펼쳐진다. 자연 안에 함께 공존하지만 들여다보지 못하는 존재들을 카메라로 담아낸다. <쇼잉 업>에서 라이카트의 카메라는 도시로 향한다. 미국의 대자연 안 풍경을 실내로 가져온다. 전작 <퍼스트 카우>에서 소 한 마리조차 없이 이제 막 인간의 손길이 닿기 시작했던 미국 서부 오리건의 미개척 땅은 <쇼잉 업>에서는 오리건주 포틀랜드 도시- 이제는 <퍼스트 카우>의 소가 살지 않는- 로 바뀌어 있다. 라이카트의 전작들에서 인물들은 열린 공간에 놓여 있고, 자연 안에서 서로를 돌본다. <쇼잉 업>의 집들은 닫혀 있다. 도시 안 인물들은 서로를 바라보고 돌볼 틈이 없다. 영화 속 주인공인 예술가 리지(미셸 윌리엄스)도 동료이자 집주인 조(홍차우)도 영화 초반에는 자신의 작업에 더 집중한다. 자신의 작업 외에 다른 것을 들여다볼 여유가 없다. 인물이 서로를 돌봐야 살아남을 수 있는 자연에서 안전한 실내로 이동한 <쇼잉 업>의 카메라는 서로의 돌봄 없이 살 수 있는 도시에서 역설적으로 돌봄을 들여다본다.

비인간과 인간을 잇는 카메라

<쇼잉 업>의 카메라 움직임은 특이하다. 일반적 영화에서 카메라의 무빙은 움직임에 대한 동기를 바탕으로 공간에 대한 설명이나 주인공의 움직임과 상황을 연결하고 강조하기 위해 움직인다. 이 영화의 카메라 무빙은 움직임에 대한 내적이거나 외적인 동기가 없다. 동기가 없는 무빙이 자연스럽게 보이려면 자연의 물리적 관성, 피사체의 관성을 따라 카메라가 움직이면 되지만 이 영화에서는 물리적 관성을 따르는 카메라의 움직임도 없다. 주인공을 강조하거나 드러내기 위한 도구로 활용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카메라는 일상 안의 쓸모없고 흩어진 존재들을 연결한다. 이 영화의 첫 번째 무빙은 인트로 타이틀 시퀀스 후 이 영화의 두 번째 컷에서 팬-틸다운하는 무빙이다. 영화의 첫컷에서 리지의 얼굴은 그녀의 작품에 가려 전체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어지는 두 번째 컷은 그녀의 얼굴에는 관심이 없는 듯 뒷모습부터 시작한다. 작업하고 있는 그녀의 뒷모습을 짧게 보여주고 카메라는 오른쪽 아래로 동기 없이 움직인다. 카메라 무빙이 도착하는 지점은 작업실 앞에서 모이를 찾아 먹고 있는 비둘기들이다. 그중 한 마리는 다리가 없다. 두번째 무빙은 친구 조가 집 안으로 버려진 폐타이어를 굴리며 걸어오는 긴 트래킹숏이다.

첫 등장인물을 이렇게 길게 트래킹숏으로 보여줄 때는 그 숏이 이 영화 전체에서 무언가로 작용해야 한다. 하지만 조가 가져온 타이어는 그네로 바뀌고 이후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세 번째 카메라 무빙은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있는 마을 청소년들을 따라 움직인다. 한 청소년의 움직임을 카메라가 길게 보여준다. 이 무빙 컷의 마지막쯤 다른 청소년들이 프레임인되고 이어서 길거리에 앉아 버려진 쓰레기 더미에서 무언가 찾고 있는 리지가 보인다. 카메라 무빙을 통해 강조된 청소년도 그네처럼 뒤에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이 컷 안에서 이후에 다시 등장하는 것은 리지가 쓰레기 더미에서 주운 네모난 틀이다. 그것들은 그녀의 작품들을 지지하는 데 필요한 받침대로 쓰인다. 다음 등장하는 트래킹숏들은 예술학교에서 직조를 하는 학생들, 설치미술 수업을 듣는 강의실 풍경이다. 이 트래킹숏들도 인물이나 그들의 작품 등 어느 하나에 집중하지 않는다. 작품과 작업하는 인간들을 평등하게 보여주며 연결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 대부분은 예술가들이다. 리지의 가족 모두가 예술가이고, 그녀의 친구와 학교에서 만난 사람들도 모두 예술가들이다. 이 예술가들은 작업과 자신들의 일상에만 주로 집중한다. 이런 상황에서 대화 신은 인물들의 숏을 나누어 각각 한 인물씩 보여준다. 그리고 카메라는 대부분 움직이지 않는다. 인물의 관계를 보여주는 전형적이고 일반적인 OS숏도 없고, 인물들의 그룹숏도 많지 않다. 한 프레임 안에 두 사람을 함께 보여주는 투숏도 드물다. 두 사람의 대화 신에서는 먼저 한 사람을 단독으로 보여주고 다른 사람도 단독숏으로 보여준다.

반면에 두 사람이 공통의 시선으로 타인의 행위나 타자를 돌볼 때는 한 프레임 안에 두 사람이 함께 있다. 또는 한 사람의 움직임을 따라 다른 한 사람으로 카메라가 함께 이동하면서 떨어진 두 사람을 연결하고 한 프레임 안에 두 사람을 같이 배치한다. 주인공 리지는 자신의 작업이 중요하지만, 작업보다 주변의 환경에 더 신경을 쓴다. 작업의 진도가 주변 환경들로 방해를 받는 것 같지만 리지는 번잡한 환경과 작업을 분리하지 않는다. 리지의 작업은 주변의 환경들과 동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 엄마를 도와 예술학교 일을 하고, 작업이 급하지만 배고파하는 고양이를 위해 사료를 사러 나간다. 작업과 다친 비둘기를 돌보는 와중에 아버지를 찾아가 살피고 돌봄이 필요한 형제 숀(존 마가로)까지 챙긴다. 리지가 돌봄의 대상으로 숀과 마주하는 순간 두 사람을 함께 한 프레임 안에 담아낸다. 도시의 일상 안에서 우리는 개인적으로 따로 흩어져 살고 있다. 예술가는 자기 안의 내면과 홀로 마주하고 있는 고독한 존재가 아님을, 예술은 내 주변의 비인간들과 함께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함을 카메라의 무빙과 숏 안 인물들의 배치를 통해 보여준다.

컷의 배치로 보는 돌봄

또 다른 흥미로운 지점은 비둘기 컷과 리지의 작품 컷을 동등하게 이어서 보여주는 편집의 평등한 배치다. 주인공 리지는 전시를 일주일 앞두고 있지만 작업이 잘 풀리지 않는다. 그녀의 작품은 찰흙으로 형태를 빚고, 채색하고, 굽는 과정을 거쳐야 완성된다. 전시까지 남은 시간은 작품을 완성하는 데 다 쏟아부어도 모자란 시간일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작업하는 시간보다 돌봄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이 영화에서 사건은 인간이 아닌 고양이가 일으킨다. 리지의 방해자는 돌봄이다. 리지의 고양이가 집 안으로 날아들어온 비둘기의 날개를 물고, 리지는 자신의 고양이가 일으킨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다친 비둘기를 돌본다. 돌봄이 추가되면서 비둘기는 작업에 방해가 되는 갈등의 대상이 된다. 리지는 방해자인 비둘기를 작업실 안 다른 위치로 옮기는데 이 장면에서 리지의 동선과 행동을 보면 이어지는 컷은 비둘기의 인서트컷이어야 한다.

하지만 라이카트는 비둘기의 모습이 들어갈 자리에 리지가 작업 중인 그녀의 작품 클로즈업 컷을 배치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컷을 비둘기를 들어 올리는 리지의 미디엄숏으로 연결한다. 리지와 비둘기의 행동숏 사이에 리지의 작품 컷을 배치하면서 리지의 작품과 비둘기를 동일선상에 놓는다. 이후 장면들에서도 리지가 작품을 만드는 동선 앞에 돌봄 중인 비둘기 컷을 놓는다. 리지가 아버지나 숀을 돌보러 갈 때도 비둘기를 데리고 가고, 그들을 만나기 전과 만난 후 비둘기의 클로즈업 컷을 배치한다. 인간의 돌봄과 비둘기의 돌봄도 같은 위치에 놓는다. 리지가 자신의 작품이 완성된 후 길에서 주운 받침대 위에 세우는데, 그녀는 완성된 작품을 잠시 바라본 뒤 시선을 옆에 놓인 상자 안 비둘기로 돌린다. 그리고 자신의 완성된 작품이 아닌 비둘기를 쓰다듬는다. 라이카트는 작품의 완성과 비둘기의 치유가 같은 것임을 편집의 컷 배치를 통해 보여준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사건을 만나기 전과 후 달라지는 것처럼 리지는 비둘기의 치유를 경험한 이전과 이후 분명 달라진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진정한 사건은 고양이가 비둘기를 문 것이 아닌 그녀가 비둘기의 치유 과정을 함께한 뒤, 작품 전시장에서 치유된 비둘기가 날아오르는 것이다.

비둘기에 대한 인식은 흔하고 불필요하고 지저분해 도시 인간들을 여러모로 불편하게 만드는 존재임을 영화 곳곳에서 다른 인물들을 통해 드러낸다. 반면에 예술은 고귀하고 아름답고 아무나 할 수 없으며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존재로 인식된다. 이 영화는 그 보잘것없고 하찮은 존재가 고귀한 예술을 완성하는 기록이다. 예술은 결국 인간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의 모든 존재들을 위계와 구분 없이 서로 나누고 돌볼 때 완성되는 것임을 리지의 돌봄 행위를 통해 보여준다. 리지의 작품도 돌봄의 상호작용 안에서 탄생한 예술 작업이다. 리지의 완성된 작품들은 고정된 몸의 형태가 아닌 돌봄이 필요한 존재들처럼 보인다. 움직임의 순간들을 담고 있는 듯한 그녀의 작품은 형태와 몸짓이 일반적이지 않다. 그 일반적이지 않은 몸에 작은 흙 조각을 붙이고 하나의 형상에도 다양한 색을 칠하며 정성을 다한다. 리지는 작업 중인 작품에 살아 있는 작품처럼 말을 걸고, 부러진 팔을 치료하듯 다시 붙이며 본인의 작품들을 어루만진다. 말하지 못하는 존재들에 귀를 기울이고 돌보며 작품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예술은 언제 완성될까?

가장 눈길을 끄는 장면은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 배경으로 보이는 직조 장면이다. 이 직조 장면을 위해 영화를 만든 듯한 인상도 준다. 예술은 노동을 통해 완성된다. 한올 한올 정성을 들여야 일정한 간격과 문양을 완성할 수 있는 작업이 직조 작품이다. 예술 작품은 관념의 결과물이 아닌 인간의 노동과 시간이 올곧이 투영된 결과물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듯하다. 영화 안 미술학교 학생이 등장하는 첫 장면에서 그녀가 들고 온 예술 작업도 직조해서 만든 옷이다. 그녀의 첫 대사는 “이것을 만드는 데 1년이 걸렸다”이다. 미술학교 안 여러 학생과 작업자가 각자의 창작물들을 만들고 있다. 그리고 전시가 열린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작가들이 작품에 대해 서로 의미를 이야기하거나 묻는 장면이 없다. 리지나 조의 작품을 보고 이야기할 때도 아주 간단하게 작품의 표면에 대한 이야기만 한다. 작가들이 주고받는 대화라고 하기에는 작품에 대한 단순하고 일상적인 표현만이 짧게 오간다. 작품에 대한 이야기보다 작품을 만드는 노동의 행위를 더 강조한다. <쇼잉 업>에서 인물들은 사소한 노동을 계속한다. 영화 사이사이에 보이는 미술학교의 풍경에서 학생들은 다들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노동하고 있다. 가만히 있는 학생들은 없다. 조는 영화의 첫 등장부터 타이어를 끌고 집 안으로 들어온다. 조는 영화 내내 물건을 나르거나 육체적 노동이 더 필요한 작업을 계속한다. 예술학교 사무실에서 일하는 엄마도 리지가 찾아왔을 때 컴퓨터 앞에 앉아 일하고 있다. 리지와 엄마의 대화에서 엄마의 마지막 대사도 “일해야 한다”다. 리지도 쉬지 않고 작업과 돌봄노동을 한다. 숀도 노동을 한다. 삽으로 자신의 뒤뜰 정원 땅을 판다. 숀은 자신이 파고 있는 땅이 입이라고 하며 예술은 대지가 말하는 것, 시는 대지의 목소리, 전부 대지와 관련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귀를 닫아버린 사람이 많아 들리지 않는다”라고 하며, 대지가 말하지 않는 것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다. 라이카트는 노동을 통해 들으려는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고, 숀을 통해 예술가들은 들리지 않은 것들을 듣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영화의 엔딩으로 다시 돌아가면 리지의 전시 오픈날, 리지는 비둘기 상자를 다른 전시 작품들과 함께 창가 앞에 둔다. 전시장에 사람들은 많지만 그녀의 작품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각자 서로의 이야기와 케이터링 치즈에만 더 관심을 가진다. 관람객들에겐 흔한 비둘기는 안중에도 없다. 전시장 안 아이들만이 비둘기에게 관심을 보이고 비둘기의 붕대를 조심스레 풀어준다. 그녀의 작품이 완성되는 시간 동안 비둘기도 치유가 되었다. 아이들이 비둘기를 풀어준다. 비둘기가 전시장 사이를 날다 작품 사이에 앉는다. 이때 숀이 비둘기를 조심스레 잡아 밖으로 데리고 나가 날려 보낸다. 돌봄의 결과물로서 리지의 작품이 드디어 완성되는 풍경이다. 리지와 조는 비둘기를 찾아 전시장 밖으로 나서지만 비둘기를 찾지 못한다. 리지와 조는 전시장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일상이 공간을 향해 걸어 들어가고 카메라는 붐업을 한다. 카메라 무빙이 엔딩 지점에 닿을 때쯤 화면 왼쪽 상단에 나뭇잎이 프레임인되고 비둘기 소리가 들린다. 일상으로 돌아간 비둘기가 일상 안에서 드디어 작품으로 완성되는 순간이다.

이 순간 카메라는 비둘기의 시점으로 변한다. 리지와 조는 완성된 작품으로서 비둘기의 소리를 들은 듯 전시장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는다. ‘사건’은 인물의 일상을 뒤흔들고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일이다. 전시장의 작품보다 비둘기가 삶에 진짜 작품이라는 것을 깨닫고 변화하고 성장한 리지는 전시장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다. 그의 작품은 일상 안에 있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사건을 욕망하고, 기다리고, 의지한다”라고 말했다. 예술가는 작품이 될 사건을 욕망하고 기다린다. 리지는 투덜거리고 있지만 일상 안으로 사건을 만나러 들어간다. 작업을 방해하는 돌봄 사이에서 사건은 발생하고, 그 사건을 만나는 과정이 예술임을 리지의 행동을 통해 보여준다. <쇼잉 업>은 예술 작업 자체가 자신을 표현하고 드러내는 행위가 아닌 타자에게 관심을 갖고 돌보는 행위임을, 예술가는 자신의 삶 자체를 스스로 전시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예술로서 영화도 삶을 전시(쇼잉 업)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