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범>의 결말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수영 강사 영은(곽선영)이 딸 소현(기소유)의 살해 충동을 달래는 한편 스스로와 타인의 안전을 도모할 방편으로 소현에게 닭을 도살할 기회를 마련한 장면은 시각적이고 심리적인 면에서 적지 않은 충격을 준다. 자식의 성정을 두려워만 하지 않고 어떻게든 포용해보려는 심정은 불경해 보일 수 있으나 뱀파이어와 그에게 종속된 자들의 관계에 비견하지 못할 것은 없을 것 같다. 여러 참조물이 있겠지만 당장 생각나는 <렛 미 인>에 대입하면 소녀와 늙은 소년의 사이에서 확인할 수 있듯 뱀파이어에게 복종하는 건 그가 부리는 마력 때문일 텐데, 모성도 그 힘만큼은 이 마력에 뒤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영은의 인내와 포용에는 특이한 구석이 있다. 미 콜럼바인 고교 총기 난사 사건 범인의 친모는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의 저자이기도 한데, 거기서 사랑하는 아들이 총기난사범이라는 사실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느낀 혼돈을 자주 풀어낸다. 하지만 그가 아들의 심성을 눈치챘더라도 영은이 그랬던 것처럼 닭 도살과 같은 충동 억제의 수단은 쓰지 않았을 것 같다. <케빈에 대하여>의 에바(틸다 스윈턴)를 봐도 그렇다. 그는 주변에서 케빈(에즈라 밀러)의 악마성을 알아주지 않아 고립감을 느꼈을지 몰라도 그의 악마성을 누그러뜨리려고 폭력을 다른 폭력으로 대체하도록 유도하지 않는다. 비슷하다면 봉준호 영화 <마더>의 엄마(김혜자)가 있다. 그도 아들 도준(원빈)의 폭력성을 완화하기 위해 연성화한 폭력의 길을 소개하는 데 관심이 없다. 다만 아들의 범행을 숨기기 위해 살인을 마다하지 않고, 도준이 진범이라는 사실이 세계관을 뒤덮자 아예 기억을 없애버리는 태세를 갖추는 건 영은의 고육책에 뒤지지 않을 만큼 문제적이다. 그러고 보니 도준의 엄마는 영은처럼 도준이 어릴 적에 친자 살해의 충동을 드러낸 일이 있다. 뱀파이어에게 일방적으로 사로잡힌 사례와 동일하다고 할 순 없어도 한국의 모성이란 그 힘만큼은 대등한데, 뒤틀려 있으며 윤리적이지 못한 곳까지 쉬이 빠져들 수 있는 우려를 어두운 기질로 지녔다고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전반과 후반으로 나뉜 <침범>의 전반부에는 이처럼 갈등과 부식을 내재한 영은의 모성에서 비롯된 망설임 두번을 주목할 만하다. 첫 번째는 영은이 잠시 창고에 가뒀음에도 소현이 기어코 빠져나와 친구 지혜(최설아)와 함께 수영장에 모습을 보일 때 소현의 속셈이 무엇인지 눈치채고 영은이 달려가 말리려 한 순간이다. 이 장면에서 영은이 소현을 제지할 요량이었다면 멈칫하는 일은 없을 테다. 영은은 소현이 지혜를 물에 빠뜨렸는데도 물속에 뛰어들어 지혜를 구하기는커녕 잔뜩 얼어 있다. 소현의 만행을 직접 목격한 게 너무 급작스러워서 자기도 모르게 굳고 만 걸까. 그게 아니라 사고로 치부하면 그전에 소현이 지혜에게 해코지했던 사실을 감출 수 있다고 여겨서 그랬을까. 두 번째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영은이 전남편에게 소현을 향한 두려운 쪽의 진심을 드러낼 때 소현이 주차장 입구를 향해 달아나는 장면이다. 여기서 영은은 적극 달려가 잡는 일 없이 멈춰 서 주저한다. 그저 영은은 지쳐서 그랬을까. 아니면 그대로 도주하는 게 소현의 탈출구일 수 있다고 본 걸까.
이 망설임의 제스처를 영화 후반부 관객의 처지와 나란히 대보고 싶다. 작품 전반부에서 소현의 폭주 사태가 마무리되면 후반부는 20년을 훌쩍 뛰어넘은 시기를 그리며 국면을 달리한다. 또 같은 서스펜스 스릴러 장르의 외피를 썼더라도 전반부는 표현적인 구사를 자제하는 것과 달리 후반부는 관객과 게임을 벌여보겠다는 일념으로 가득한 트릭이 난무한다. 관객은 영화의 의도에 따라 후반부에 처음 등장하는 민(권유리)을 소현으로 착각하기도 하고, 소현이자 해영(이설)의 불가해한 사정을 그려내는 것과 함께 이야기의 긴장을 유지하기 위해 아끼지 않은 표현적인 화법 앞에서 잠시 길을 잃곤 한다. 이러한 전략을 두드러지게 나타내는 구성도 두 가지다. 먼저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인물이 민의 임신 사실을 이유로 민을 괴롭히는 전 연인 준섭(유정후)에게 상처를 내고 교통사고를 유발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장면에 민과 친모의 대화를 이어 붙여 은연중 연관성을 주입하는 배열이다. 조금 더 지나 해영의 과거를 의심하던 민이 밤에 해영에게 습격을 당한 것처럼 보여준 뒤 곧바로 낮 동안에 민이 잠에서 깨거나 한 팀장(허정도)에게 한소리를 듣는 장면을 환각인 듯 비논리적인 연쇄로 제시하는 순간도 빼놓을 순 없다.
이 두 구성의 문제라면 그때까지 누가 소현인지 알 수 없도록 동원하던 모호함의 책략을 강화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모든 의심을 민에게서 소현으로 옮겨놓으면서 스스로 소현의 정체를 폭로하는 수준에 이른다는 점이다. 또 해영이 소현임이 확실시되는 순간을 포함해 그 이후는 여느 살인마를 다룬 대중 친화적 영화들이 보여줬던 장면 배치를 충실히 따르기도 한다. 소현의 정체가 밝혀질 때 소현의 살인 행각을 교차편집하거나 클라이맥스에서 민과 소현이 사투를 벌이도록 한 짜임새는 일정 부분 스타일이 묻어나지만 기시감이 없는 경지라고 말하긴 어렵다. 이때가 바로 관객이 작품에서 다른 지점에서보다 높은 확률로 맥이 풀리면서 품었던 기대를 거둬야 할지 망설이는 순간일 것이다. 보충하면 여기엔 시점의 잦은 전환에 따른 부작용도 영향을 미친다. 영화 시작 물의 방향에서 물가에 있는 소현을 바라보는 시점은 영화의 결말까지 도달했다면 예비했던 영은의 시선이기도 한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점까지 염두에 두면 영화 전반부는 대체로 영은의 무대에 해당한다. 반면 작품 후반부는 최초 민이 지배자였다가 후반부의 중반을 넘어가면서 다시 소현이자 해영이 화자이자 시점의 주인공이 된다. 이러한 시점의 전환과 등퇴장은 관객을 붙들어놓는 수단이었을 테다. 하지만 빈번한 시점의 교란으로 인해관객과 인물의 동일시가 헐거워지면서 객관성이 힘을 발휘해 영화 전체를 조망할 수 있게 됨에 따라 허탈감을 초래했을지 모른다.
관건은 영화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관객이 이야기의 진실들을 유추할 수 있을 때쯤 짐짓 영화는 그런 것 따위는 애초부터 상관없었다는 듯이 뒤돌아보지 않고 나아가는 인상이다. 작품 마지막에서 영은이 영화 시작의 물가에 나타나 장성한 소현과 화해하려는 듯한 장면의 무드를 접할 때, 반복하는 트릭의 끝이 결국 고루함이겠구나 싶어 체념 비슷한 감정을 느낄 찰나 기어이 소현이 영은을 돌로 찍어내며 심리적 살해를 완수하는 광경이 펼쳐진다. 관객은 재차 목적한 곳에 가닿으려는 작품의 확고한 의지를 재확인하며 자신도 모르게 이 고집만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며 실소와 찬사가 반쯤 섞인 탄식을 내뱉으면서 이 영화를 향한 명확한 판단을 내리는 데 주저했을 확률이 낮지 않다고 확신한다. 관객이 보인 두 번째 망설임이다.
되돌아와 그래서 관객이 작품의 후반부를 지나오면서 나타낸 망설임 두번을 살해 충동에 휩싸인 딸 소현을 둔 영은이 보인 망설임 두번과 견주는 게 가당하기나 한지 되물을 수 있겠다. 감정의 내용보다 망설임 두번이라는 영화 속 동적 제스처와 영화 밖 관객의 심리적 몸짓이라는 형식의 쌍이 중요하다. 뱀파이어와 그에게 현혹된 자들 사이에 작동하는 마력, 끊어낼 수 없는 모성의 마력, 관객이 주문 들린 듯 끊임없이 스크린을 마주하도록 하는 영화의 마력. 어슷비슷한 마력의 장 안에서 영은과 관객이 보인 망설임 두번이라는 공명. <침범>이 도리어 관객에게 끄집어내고 반응하도록 했던 건 이 망설임 그 자체였던 건 아닐까. 조금 힘은 빠지나 과감한 시도인 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