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앵커' 정지연 감독 "여성의 고통을 강박적 대사로 담았다"
2022-05-05
글 : 이지현 (영화평론가)
사진 : 최성열

정지연 감독의 데뷔작 <앵커>를 보고 나서, 언젠가 들었던 프랑수아 오종의 말이 떠올랐다. “복잡한 여성 캐릭터를 보여준다는 면에서, 나는 페미니스트 감독이라 할 수 있다.” 비슷한 의미에서 <앵커>를 여성영화라 이야기해도 될 것이다. 영화는 매우 세심하게 장르영화의 틀 안에서 연출자의 색채를 드러낸다. 침착하게 잠재의식의 미로를 탐험하고 돌아온 정지연 감독을 만나 영화의 감춰진 이야기들을 들었다.

- 히치콕 생각이 난다. ‘어머니, 관객과의 게임, 신경증을 가진 여성’ 등의 키워드가 비슷하다.

= 유사점이 있다. <싸이코>의 경우, 재닛 리가 죽은 이후 악인을 따라서 진행된다. <앵커> 시나리오를 쓰는 도중에 주인공이 사라져야만 하는 지점이 있었다. 이야기가 타인의 관점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이때 주인공이 악인으로 변한다. 그리고 관객은 인호(신하균)의 시점을 따르게 된다. 히치콕의 과감하고 독특한 플롯은 지금 봐도 놀랍다.

- 세라(천우희)가 겪는 일의 강도에 비해, 영화 속 시간은 길지 않다. 주인공의 상황을 어떻게 설정했나.

= 예전에 단편 <봄에 피어나다>(2008)를 찍으면서 주인공을 ‘해방감을 원하는 인물’로 설정한 적이 있다. 비슷하다. 바라만 봐야 하는 인물이 있고, 그녀의 내면은 분리된다. 두 영화 모두에서 여성은 스스로에게 갇힌다. 세라는 원래 인간관계에 대한 욕망이 있고, 이를 더 확장하고 싶어 하는 인물이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관계가 더 좁아진다. 성공 지향적인 삶 때문에 상황이 악화된다. 실상 여자들은 집에서는 주부가 되고, 일을 할 때는 일만 한다. 어떤 균형을 잃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앵커>의 시작점은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진 직후다. 압박감 속에서 주인공의 일상이 유지된다. 그러니 영화의 시간은 절대 길 수가 없다. 발병의 원인이 있고, 평소의 욕망 탓에 상황은 더 치솟는다. 사건 전체가 한달을 넘어선 안된다고 판단했다.

- 인호 캐릭터는 마치 탐정 같다. 환자 치료보다 케이스 연구에 몰두한다는 기분도 들었다.

= 인호는 강박적인, 이상한 의사다. 취재하면서 환자와의 관계에서 충격을 받은 의사를 여럿 만났다. 본인이 잡아내지 못한 내용 때문에 죄책감이 쌓인다고 했다. 이런 상황을 과감하게 강박으로 가져가면 세라와 팽팽하게 대치될 것 같았다. 그리고 인호를 통해 미스터리하게 장르를 비틀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는 등장하자마자 의심받는다. 세라는 인호 때문에 자신을 더 깊게 들여다보고, 본인의 강인한 남성적 측면을 발견한다. 때문에 신하균 배우에게 건조하게 힘을 빼달라고 부탁했다. 지금까지의 의사 배역과 결이 다르면서도, 다른 인물들과 어우러지는 느낌이 들었으면 했다. 밸런스가 중요했다.

- 인물 설정과 연관해서 시각적으로 특히 신경 쓴 부분이 있다면.

= 세라와 인호가 대면하는 ‘상담실 장면’은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져야 했다. 서로가 서로를 반영하는 거울처럼 극명한 대비가 필요했다. 인호 뒤에는 커다란 창문이 있는데, 일부러 역광을 줬다. 그에게 섀도를 주고 싶었다. 대신 세라는 빛을 환하게 반사시켜 시각적으로 다르게 표현했다. ‘최면 장면’도 중요하다. 최면실은 내면의 갇힌 밀실과 열린 외부를 연결한다. 처음에는 답답하고 폐쇄적인 공간으로 표현된다. 이후 눈을 뜨면, 진료실에 걸려 있는 ‘그림 속 들판’과 같은 광경이 펼쳐진다. 세라는 정확하게 인호가 의도한, 그가 만든 세계로 들어간다. 둘의 물리적인 상황은 밀실이지만, 개방된 느낌으로 확 나아가는 대비를 주고자 했다.

- ‘물’의 표현도 중요해 보인다.

= 물이 강조되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다. 우선 ‘장르적으로’ 이용된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데, 누군가가 낯선 집에 들어간다. 그런데 그 집 문이 열려 있다. 이때 물이 침수되듯 흐르면, 공포감은 더 커진다. 그리고 ‘심리적으로’ 물이 자연스러운 상징적 의미를 지니길 원했다. 처음에 물은 고여 있다. 완전히 막혀 있고 정체돼 있다. 그처럼 물이 고인 장소에서 모녀 사건이 일어난다. 추후 세라가 일련의 과정을 겪고 다시 태어난 기분이 들 때, 물을 통해 해방감을 주고자 했다. 수면과 가까워서 언제든 나갈 수 있다고 생각되길 바랐다. 유연하게 헤엄칠 수 있고, 더이상 갇혀 있지 않은 느낌이어야 했다.

- 어머니 소정(이혜영)은 인호와 통화 후 “망측하다”고 한다. 그리고 “너 내가 그렇게 이혼하라는데”라고 강한 어조로 딸을 설득한다.

= 소정은 사회적인 시선에 민감한 인물이다. 스스로에 대한 명예가 중요하고, 자기 행동에 대해서도 엄격하다. 의사의 전화가 의아해 그녀는 평소 쓰는 말을 내뱉는다. 사실 화면에서 엄마를 표현하는 부분이 무척 어려웠다. 촬영감독과 의논해 무조건 세라를 걸고 찍거나, 액자나 TV에 반사되는 느낌으로 촬영하려고 했다. 대사뿐만 아니라 극단적으로 술을 마시는 상황도 비슷한 맥락에서 연출했다. 실제 모습보다 더 강해 보여야 했다. ‘엄마가 너무 과한데?’라고 생각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결말과 함께 보면 납득된다. 환상은 늘 극단적이다.

- 영화의 결말은 해피 엔딩인가.

= 엄마는 남편을 떼어놓으려고 한다. 그리고 남편은 엄마를 떼어놓는다. 그리고 그녀 스스로 생각하기 힘들어지는 상황이 온다. 처음에는 남편과 사랑으로 만났지만, 의무감이 어느 정도 있었다고 생각된다. 또한 세라가 엄마한테서 벗어나려고 결혼했던 점도 있다. 하지만 결국 해방되지 못한다. 그런 고통을 ‘강박적 대사’에 넣으려 했다. 사실 세라에게 일을 포기하는 것은 비극이다.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는가. 결말을 많이 고민했다. 일과 육아 중 무엇이 더 옳다고 결론짓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한마디로 “살아 있어요”라고 말하는, 실존적 상태까지 도달하는 트라우마 극복의 이야기가 바로 이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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