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안나라수마나라' 지창욱: 하고 싶은 대로, 아이처럼
2022-05-11
글 : 임수연
사진 : 최성열

누구에게나 있었다. 운동회가 끝나고 천원에 산 병아리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며칠 지나지 않아 숨이 끊어지자 온 동네 떠나가라 울어대던 시절이. 솔직한 감정을 숨기고, 아니 무뎌지고, 외부의 규격에 순응해가는 것이 어른이라면 아예 성장을 포기하고 싶었던 남자가 있었다. 유원지에 숨어 사는 어설픈 마술사 리을(지창욱)을 두고 누군가는 낙오자라 폄훼할지 모른다. 하지만 계급의 벽에 부딪쳐 굴욕을 자처하는 아이(최성은)와 잘 닦인 아스팔트가 보장하는 미래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처음으로 질문하는 일등(황인엽)에게 리을은 현실을 망각하는 찰나의 환시를 경험케 한다. 지창욱은 지독히 현실적인 상황에서 마법을 논하는 <안나라수마나라>의 모순형용을 성립시키는 중심축이다. 데뷔 초부터 주목받은 미남 청춘 스타에 머물지 않고 치열하게 다양한 무대의 문을 두드렸던 지창욱은 판타지와 평범성을 고르게 추구한다. 리을은 학생들 사이에 떠도는 풍문처럼 “진짜 잘생긴 미술사”지만, 이따금 스치는 눈빛에 서린 감정은 보편적인 정서에 가닿는다.

- 10대의 성장을 그린 <안나라수마나라>는 장르적으로 판타지 그리고 뮤지컬 드라마다. 처음 대본을 읽었을 때 어떤 점을 기대했나.

= 요즘 자극적이면서 드라마틱한 전개를 보여주는 극이 많은데, <안나라수마나라>는 누구나 편하게 공감하며 볼 수 있는 이야기였다. 한번쯤 가슴 아프게 고민해봤던 우리 모두의 이야기였기에 꼭 도전해보고 싶었다. 판타지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개체로 음악을 쓴다는 것도 굉장히 흥미로웠다. 사실 삽입곡이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에 뮤지컬 드라마보다는 음악극에 가깝다. 음악적 장치가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걱정도 많이 했지만, 곡이 정말 잘 나와서 시청자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고 메시지도 수월하게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 음향 문제부터 시작해 기술적으로 접근하기 까다로운 장르였는데 현장에선 어떻게 찍었나.

= 일단 현장에서 라이브로 노래를 불렀다. 거기에 후시로 보충하거나, 현장에서 느낌이 좋았다면 그것을 다시 듣고 녹음하면서 작업했다. 모두의 고민이 많았던 작품이다. 김성윤 감독님이 “지금까지 했던 작품 중 가장 어렵다. <안나라수마나라>가 끝판왕”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카메라 무빙, 조명까지 미리 맞춰야 했기 때문에 다른 작품에 비해 리허설과 준비 과정이 굉장히 길었다. 드라마 <도시남녀의 사랑법>을 촬영하던 지지난해 12월쯤 대본을 받았다. 그때부터 6개월 이상을 연습에 투자했다. 테스트 촬영은 4월, 본촬영은 6월 말부터 시작해 11월쯤 크랭크업했다. 프리프로덕션까지 생각하면 다른 작품에 비해 준비 기간이 2~3배 더 됐다.

- 그간의 필모그래피를 보니 원작이 있는 작품을 한 적이 거의 없었다. 하일권 작가의 원작 웹툰을 보고 작품에 들어갔나.

= 절반 정도만 봤다. 원작을 실사화할 때 어쩔 수 없이 호불호가 생긴다. 가장 중요한 건 원작의 메시지를 온전히 보존해서 잘 전달하는 것이다. 웹툰 속 리을과 내가 연기하는 리을의 비주얼은 다르기 때문에 싱크로율 100%로 원작을 표현하기는 쉽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나만의 방식으로 드라마팀과 함께 본질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캐릭터를 재창조해야 한다. 그래서 원작 웹툰을 보다가 일부러 중간에 멈췄다. 그 이상 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 리을은 아이가 봤을 때 진짜 마술을 한다고 믿게 만드는, 다시 말해 마술을 뛰어넘는 마법 같은 판타지를 선사해야 하는 캐릭터다. 이건 마술사의 스킬을 따라 한다고 곧장 설득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 사실 리을이 이은결, 최현우 마술사처럼 뛰어난 테크닉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버려진 유원지에서 꼬마들에게 조잡스러운 마술을 보여주며 살아가는 인물이다. 실제 마술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기본적인 스킬과 제스처를 연습하는 과정이 필요했지만 너무 능숙해 보이려고 하지는 않았다. 어떻게 보면 장난스럽기도 하고 조금 서툴기도 한 리을을 표현했다. <안나라수마나라>에서 마술은 누구나 한번쯤 갖고 있었던 동심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장치가 아닐까. 그래서 마술의 즐거움과 신선한 충격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뒀다.

- 실질적인 어른이 되지 못한 생물학적 어른의 순수함을 연기로 보여주는 과정이 꽤 까다로웠겠다. 리을에게 어울리는 표정이나 움직임을 찾기 위해 어떻게 접근했나.

= 어떤 동작이나 표정보다는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마음이 더 중요했다. 리을은 진짜 즐거워야 했고, 진짜 슬퍼야 했고, 진짜 삐져야 했다. 우리는 화가 나도 화나지 않은 척, 서운해도 애써 괜찮은 척하고 넘어간다. 심지어 너무 기뻐도 그 감정을 숨긴다. 그런 식으로 감정을 참지 않는 리을의 천진난만함을 생각했다. 성인들이 갖고 있는 일반적인 생각을 벗어던지고 아이처럼 표현하고 싶은 대로 다 표현했다. 나는 이미 어른이 됐고 현실에서는 리을처럼 살지 못하기 때문에 그냥 뻔뻔하게 믿는 수밖에 없었다. 그 믿음을 갖기 위해 <안나라수마나라>팀과 감독님이 현장에서 정말 많이 도와줬다.

- 리을은 앵무새 미녀와 함께한 어느 장면에서 가장 순수해 보였다.

= 그때 앵무새는 특수 제작한 더미였다. 그런데 정말 진짜 같았다. 눈물이 너무 많이 나서 촬영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래서 일부러 슛 들어가기 전에는 더미를 보지 않았다. 리을에게 하나밖에 없는 친구이자 가족이라 많이 아파하면서 촬영했다.

- 뮤지컬 무대에서 노래·춤·연기를 하는 것과 카메라 앞에서 하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던가. 가령 무대에서는 좀더 동작을 크게 하고 성량이 커야 하지만 드라마는 표정 연기를 좀더 섬세하게 해야 한다든지.

= 다르지 않았다. 클래식한 뮤지컬은 성악 베이스의 배우들이 많다 보니 다를 수 있겠지만 요즘 공연들은 팝적인 넘버가 많아지는 추세라 오히려 과장된 몸짓은 작품에 따라 어색할 수 있다. 물론 카메라가 있는 <안나라수마나라> 현장은 풀숏이 필요한 부분을 따로 촬영한다든지 카메라 동선에 맞춰 배우가 움직여야 할 때가 있었다. 그런데 뮤지컬 무대도 조명이 떨어지는 위치에 맞춰 배우가 서야 한다거나 하는 약속들이 있다. 메커니즘이 조금 다를 뿐 본질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다. 다만 음악이 뮤지컬스럽지 않게 나왔기 때문에 클래식한 뮤지컬 넘버처럼 들리지 않도록 굉장히 애를 썼다. 평소에 내가 공연할 때 냈던 소리가 아닌 <안나라수마나라>에 맞는 소리를 찾아서 냈다.

- 리을을 제외한 주요 인물들은 현실에 발붙이고 있는 고등학생들이다. 연출 역시 판타지 장면과 그외 장면의 톤을 확연히 다르게 가져간다. 극중 특정 캐릭터가 독특한 포지션을 가져가는 것과 붕 뜨는 것은 다르다. 리을 캐릭터가 드라마에 잘 흡수되면서도 그의 판타지성을 잘 보여주기 위해 어떻게 완급 조절을 했는지.

= 망토에 모자를 쓰고 다니는 마술사가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과 같이 서 있는 게 괜찮아? 이상하지 않을까? 당연히 처음부터 이러한 의문이 있었다. 테스트 촬영 때부터 공간에 직접 서서 조명도 맞춰가며 적절한 톤 앤드 매너를 찾았다. 감독님과 의견을 나누는 과정에서 충돌도 있었고 내쪽에서 감독님의 생각을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기도 했다. 아마 김성윤 감독님이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 스케일이 큰 판타지 장면은 CG 비중이 높을 수밖에 없다. 그린 스크린 앞에서 노래하며 연기하는 신들이 꽤 난이도 높은 촬영이 아니었을까.

=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한없이 어렵다. 계속 상상하며 만드는 감각을 길게는 12시간씩 이어지는 촬영 내내 유지해야 하니까. 예를 들어 날아다니는 나비도 눈에 직접 보이지 않으니 상상력이 필요하다.

- 무대에서 발휘해야 하는 상상력과 비교하면 어떤가.

= 무대 위에도 어떠한 생략들이 많다. 문이 없어도 있다고 치고 손으로 열고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뮤지컬 관객은 무대 위의 약속을 믿고 관람하는데, CG는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제작진이 프리비주얼 작업을 통해 영상이 어떻게 나올지 미리 보여줬다. 그린 스크린 앞에서 연기해도 대략적으로 어떻게 합성될지 모니터를 통해 볼 수 있기 때문에 전체 그림을 상상하는 데 도움이 됐다.

- <구르미 그린 달빛> <이태원 클라쓰>의 김성윤 감독은 완벽주의자로 유명하다고 들었다.

= 정말 지독하고 끈질기게 집착하는 분이다. (웃음) 뭐 하나 허투루 넘기지 않는다. 근데 그래서 더 믿었다. 김성윤 감독님은 오케이를 외치는 범위가 아주 좁다. 이 사람이 오케이라고 하면 그건 진짜 오케이다. 그리고 사람이 밉지 않다. 집요하게 완벽함을 추구하는 사람은 사실 불편할 수도 있는데 배우와 스탭들이 현장에서 정말 좋아했다. 리더십과 편안한 매력이 모두 있었다. 그래서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원수처럼(웃음) 재미있게 작업했다.

- <안나라수마나라>를 보다 보면 ‘나는 내가 어른이 됐다는 걸 언제 처음 자각했지?’라고 반추해보게 된다. 지창욱에겐 그 시기가 언제였나.

= 세금을 내기 시작하면서. (일동 폭소) 어렸을 때 세금에 대해 미리 알려주는 사람이 없지 않나. 어느 날 통장을 봤는데, 분명히 열심히 돈을 벌었는데 돈이 없는 거다. 돈이 어디 간 거냐고 물었더니 세금으로 빠져나갔다고 하더라.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는,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제공하는 공공재와 공공서비스가 다 세금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인지했을 때 나도 한 국가의 일원이고 어른이 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렸을 때는 연말이 되면 산타 할아버지를 기다리거나 해돋이 볼 생각을 했는데, 이제는 내년에 낼 세금을 계산한다. (웃음)

- 그간의 필모그래피를 보니 가능한 모든 환경을 다 경험해봤더라. 데뷔작은 독립영화였다. 이후 상업영화, 뮤지컬, 아침 드라마, 주말 드라마, 일일 드라마, 미니시리즈, 사극은 고려시대에 원나라도 한번 갔다 왔다가(<기황후>) 조선시대(<무사 백동수>)까지 경험했다. 다양한 영역을 섭렵한 게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돌이켜보면 이유가 무엇이었던 것 같나.

= 살려고 그랬다. 배우는 직업이다. 어머니를 부양해야 했고, 돈을 벌어야 했고, 어렸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다 했다. 그런 경험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줬다. 다양한 현장이 많은 선배들에게 배우로서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됐다.

- 데뷔 초에는 뮤지컬 <쓰릴 미>와 일일 드라마 <웃어라 동해야>를 병행했더라. 너무 다른 영역의 연기 아닌가.

= 한창 <쓰릴 미> 공연을 하고 있을 때 <웃어라 동해야> 오디션에 합격했다. 감사하게도 드라마 감독님이 시간을 잘 맞춰서 촬영해보자고 해서 함께하게 됐는데 그때 너무 힘들었다. 드라마 촬영장은 여의도, 공연장은 신촌에 있었다. <웃어라 동해야> 촬영을 하다가 중간에 신촌으로 넘어가 분장을 다시 하고 무대에 올랐는데, <쓰릴 미>는 극 자체가 굉장히 세다. 욕도 많이 나오고 무대 위에서 담배도 피우고 퀴어 코드도 있고 사람을 죽이는 신도 있다. 그러다 다시 촬영장으로 돌아오면 아직 연기가 서툴던 때라 감정 조절이 잘 안됐다. 동해는 너무 순박한 친구인데 눈을 무섭게 뜨고 있으니까 (도)지원 누나가 “창욱아, 심호흡 좀 하고 쉬었다가 다시 하자”면서 많이 이끌어줬다. 그래서 정말 감사했던 기억이 난다.

- 드라마와 영화, 뮤지컬 연기는 다 달라 보여서 세 분야를 모두 경험하는 것이 서로 연기적인 시너지를 주는지 궁금하다.

= 그건 배우에 따라 다르고, 나는 크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어떤 시너지가 존재한다면 영화만 하는 배우가 영화와 뮤지컬을 병행하는 사람보다 연기를 못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연기를 잘하는 사람은 영화만 해도, 드라마만 해도, 무대만 해도 잘한다. 그냥 자기가 좋아한다면 함께하게 되는 거 아닐까. 영화와 드라마, 무대는 작업 과정이 달라서 그만의 매력이 있다. 영화와 드라마는 바쁘게 촬영한 결과물이 화면으로 완성되어가는 과정을 보는 재미가 있고, 뮤지컬이나 연극은 5~6주 정도 같이 연습하면서 함께 극을 만들고 다 같이 술을 마시는 재미가 있다.

- 뮤지컬 <그날들> 공연을 세번이나 했다. 한 작품으로 계속 무대에 서면서 배우가 받았던 영향도 꽤 컸겠다.

= 이제는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을…. (웃음) 재연까지는 어떤 책임감을 느끼며 했는데, 3연은 사실 술자리에서 했던 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게 됐다. 물론 작품에 애정을 갖고 무대에 섰지만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이 들더라. 나도 사람이기 때문에 무뎌지고 있고 심리적으로 지쳐 있다고. 그런 감각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가끔 제작사 대표님에게 전화가 온다. 곧 <그날들> 10주년이 된다고. (웃음) 그때 내 스케줄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날들>을 함께했던 선배들과 다시 함께한다면 10주년 공연에 서는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 매니저가 고등학교 시절 친구라고. 유명해지기 이전의 지창욱을 알고 있는 사람과 함께 일하면 어떤 점이 좋은가.

= 진짜 속마음을 다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는 많지 않다. 나이를 한두살씩 먹으면서 감독님과 나이 차도 많이 안 나게 되고, 예전엔 형, 누나였던 스탭들이 이제는 나를 선배님이라고 부른다. 나는 괜찮은데 주변에서 나를 불편하게 여길 때가 생기면서 점점 외로워졌다. 그나마 오랜 친구가 매니저를 하니까 속에 있는 진짜 얘기를, 일이든 일 외적인 이야기든 다 털어놓을 수 있다.

- 중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계속 인연을 이어가는 게 연예인에게도 좋다는 말을 들었다. 성인이 되기 이전과의 연결고리가 어떤 방식으로든 남아 있어야 <안나라수마나라>의 리을 같은 캐릭터도 연기할 수 있지 않을까.

= 어렸을 때 뭐가 있겠나. 그냥 다 똑같다. 가방 하나 메고 학교에서 똑같은 옷 입고 만났으니까 정말 편견 없이 친해진 친구들이다. 그런 친구들을 만나면 마음이 다시 따뜻해진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메마르고 각박해지고 스스로를 옥죄어왔던 마음들이 조금이나마 녹는다. 어렸을 때 그렸던 막연한 꿈, 따뜻함, 동심을 어른이 된 후 잃어버렸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그런데 어렴풋이나마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것이 마음의 휴식이 된다. 가끔 어릴 때 살았던 동네에 가보기도 한다. 아무 생각 없이 친구들과 웃으며 시간 보내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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