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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 @imagolog 오늘 다룰 <우연과 상상>은 감독의 전작이자 생년이 같은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와 친족 관계에 있어요. 알다시피 <드라이브 마이 카>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각색한 것인데, 하마구치가 무라카미로부터 원작 사용을 허락받기 위해 요청하고 답신을 기다리는 동안 <우연과 상상>이라는 단편 모음을 만든 거예요. 저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부지런함인데, 하마구치 감독은 이런 방법론 자체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드라이브 마이 카>의 주제를 비롯해 영화적 모티브들을 <우연과 상상> 속 세 단편으로 리허설하듯 만들었어요. ‘우연과 상상’이 세 이야기에 모두 개입하고, 서사에 중요한 모티브가 되죠.
김혜리 @imagolog 첫 번째 에피소드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이 연습하고 있는 것은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아주 중요한, 자동차 안에서의 대화예요. 택시 뒷자리에 앉은 두 여자가 목소리를 키울 필요 없이 친밀하게 대화하죠. 많은 부분을 투숏으로 잡다가 어떤 부분에서 원숏을 들어가는데, 영화를 반복해서 보게 되면 감독이 어떻게 숏을 나눴는지 주의해서 보게 돼요. 처음 볼 때는 내용을 모르고 집중하는데, 다음에는 이 대화가 어떤 사실을 드러낸다는 걸 알게 되니까 리액션을 주시하게 되죠.
김혜리 @imagolog 두 번째 에피소드 <문은 열어둔 채로>는 제일 알쏭달쏭한 제목이었는데, 그 의미는 첫 시퀀스가 끝나기 전에 금방 알게 됩니다. 밀회 장면, 외설적인 말들이 주는 흥분이 있기 때문에 <드라이브 마이 카>의 원소 중 섹스가 여기서 리허설을 갖고 있다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세 번째 에피소드인 <다시 한번>은 SF 설정을 갖고 있는데요,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프로덕션 디자인이나 문화적으로 SF스러운 면은 없어요. 이 단편 속 두 여자는 대화를 나누다가 둘 사이에 어떤 큰 오해가 있었음을 발견합니다. 하지만 둘은 멈추지 않고 자기 가슴에 뚫린 구멍에 대해 대화를 이어가면서 일종의 롤플레잉을 합니다. 연기, 그러니까 진짜가 아닌 가면 쓰기가 반대로 진실의 순간을 이끌어내는 결과가 빚어집니다.
김혜리 @imagolog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러닝타임이 5시간이 넘는 <해피 아워>도 찍었잖아요? 그런데 <우연과 상상>의 단편들을 보니 하마구치 영화의 구조가 한 시야에 더 잘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감독님이 이야기 안으로 우리를 데리고 들어가는 경로가 좀 색다른 것 같아요. 짧은 작품들임에도 불구하고 첫 장면을 봐서는 누가 주인공인지, 누구한테 일어나는 일이 제일 중요한지 몰라요. 이야기가 옆구리를 치고 비스듬히 들어간달까요. 그리고 이 세편 다 미친 듯이 창의적이라는 생각은 안 들지만(웃음), 단편으로서 훌륭한 일격을 갖고 있어요. 이반 트루게네프나 레이먼드 카버 같은 단편의 거장들이 쓴 소설처럼요. 그게 반전 효과를 줄 뿐 아니라 주제와도 연결되고, 영화적인 연출도 거기에 힘이 들어가기 때문에 굉장히 완성도가 높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김혜리 @imagolog 두 번째 특징으로 하마구치의 영화에서는 여성이 매우 중요합니다. 본인이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을 못했거나, 내적으로 분열된 여자들이 이야기를 끌어가요. 이들의 대화가 어떤 임계점에 다다르면 그때까지 당사자한테도 보이지 않았던 사각지대가 드러나지요. 감독은 남자들은 이런 인생의 블라인드 스폿을 잘 못 본다고 믿는 것처럼 여자들이 꼭 이야기 끝에 무언가를 보게 하죠. 남자들이 그런 발견을 하려면 누군가, 특히 여자가 실종이 돼야 하죠. (웃음) <드라이브 마이 카>의 주인공처럼요. 그러고 보니 그런 이야기 패턴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즐겨 쓰는 패턴이기도 하네요.
<우연과 상상>과 함께 보면 좋을 작품
배동미 @somethin_fishy_ 많은 분들이 <우연과 상상>을 보고 에릭 로메르와 홍상수를 떠올릴 텐데요, 비교적 최근작인 홍상수 감독의 <인트로덕션>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인트로덕션>도 세개의 장으로 나뉘었고, 대화 신이 영화의 전부라 할 정도로 흐름이 좋고, 대사의 말맛이 뛰어납니다. 구성은 단출하나 우리 삶에 계속 남아 영향을 미치는 불편하고도 인간적인 순간들을 한 시간 분량의 영화로 풀어내서 재밌습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늘 신기하게 다가오는 지점이 대화만으로 긴장감을 만든다는 건데요, 작지만 괜찮은 깨달음을 얻게 하는 게 홍상수 영화의 매력이 아닌가 싶습니다.
남선우 @pasunedame <사랑에 빠진 것처럼>은 아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이 일본에서 일본인 배우들과 찍은 영화입니다. <우연과 상상>처럼 자동차 안에서 말하는 신이 많고, 인문사회 계열의 남자 교수가 나옵니다. 인물들이 서로의 정체를 착각한다는 점도 유사합니다. 굳이 따지자면 <우연과 상상>의 두 번째 에피소드 같은 뒷맛을 남기는 것 같아요. 특히 영화가 창을 어떻게 이용하는지 주목하면 좋겠어요. 인물을 완전히 투영하지도, 그렇다고 차단하지도 않는 프레임에 웅덩이처럼 맺히는 얼굴이 대사 이상의 것을 전한다고 느꼈습니다. 그런 잔상들이 키아로스타미 영화가 우연을 바라보는 태도,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다루는 자세가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