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국제영화제에서 4K 리마스터링된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큐어>를 관람했다. 다음날 서울에서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를 봤다. 문득 어떻게 하면 제대로 미칠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 영화는 인연이다. 어떻게, 어떤 방법과 순서로 만나느냐에 따라 서로 대화를 시작한다.
대혼란은 없었다.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이하 <닥터 스트레인지2>)는 생각보다 길었고 예고편에서 겁을 준 것보다 훨씬 평이했다. (매우 주관적인 감각이지만) 상영시간이 꽤 길다고 느껴지는 건 현란한 화면과 무관하게 지루하게 늘어지는 부분이 있다는 증거다. 어딘가에서 리듬이 무너졌거나 지나치게 설명이 길어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끝난 후 각종 상징을 해석하기 위해 달려들 수밖에 없는 영화(예를 들면 나홍진 감독의 <곡성> 같은)나 플롯을 다시 배열해가며 정리가 필요한 영화(예컨대 크리스토퍼 놀란의 작품들)에 비해 <닥터 스트레인지2>는 놀라울 정도로 깔끔하게 정리 정돈이 잘되어 있다. 칭찬이 아니다. 이 영화는 이해가 쉽지 않아야 하는 ‘멀티버스’의 개념을 본격적으로 이야기의 한복판으로 끌어들이고자 한다. 시간 여행만 해도 플롯이 복잡해지는데 서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또 다른 내가 있는 세계라면 인과관계를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골치가 아프다. 하지만 <닥터 스트레인지2>는 대혼란의 징후조차 없다.
대혼돈을 정리하는 우연의 벽
이유는 단순하다. 이 영화의 정보, 이야기의 물리적인 양, 밑그림의 크기는 방대하지만 플롯은 매우 단선적이기 때문이다. 해석과 상징이 난무하는 영화는 대체로 반대다. 조감도로 펼쳐놓으면 생각보다 사이즈가 작은 이야기를 어떤 순서로 들려줄지, 사건의 인과관계를 복잡하게 짜나간다. 정확히는 플롯을 통한 미로의 구조를 만들기 위해서 한정된 상영시간 안에 처리할 수 있는 정보량을 제한하는 거라고 봐도 무방하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는 상영시간의 제한이라는 영화의 물리적인 한계를 이미 여러 방편으로 우회하며 일종의 자유를 얻었다. 전작이나 시리즈를 통해 학습해온 관객 덕분에 종종 캐릭터에 대한 구체적인 사안은 생략되곤 한다. 몇몇 설정에 오류가 나거나 꼬여도 나중에 수습할 수 있는 여유도 있다. 이런 독특한 방식 덕분에 마블 영화들은 점점 단독 영화가 아닌 시리즈의 속성을 띤다(반대로 시리즈는 영화를 닮아간다는 점도 흥미롭다).
<완다비전>을 비롯한 마블의 전작이나 시리즈를 미리 학습하고 이 영화를 보러 가야 한다고 하지만 전혀 모르고 봐도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 아무런 무리가 없다. 다만 <완다비전>을 봤다면 완다 막시모프(엘리자베스 올슨)의 행동과 감정 변화가 좀더 공감될지도 모르겠다. 이해는 정보 제공만으로도 즉각적으로 가능하지만 설득에는 물리적인 시간이 필요하다. 포인트는 여기 있다. 보여줄 게 너무 많은데 무대가 너무 많다. <닥터 스트레인지2>는 성실하게 혹은 정해진 지점을 찍고 다음으로 넘어가는 데 급급하다. 멀티버스를 넘나드는 사건이 일어나야 하고, 스칼렛 위치로 거듭난 완다가 자식들과 함께하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혀야 하고, 기왕에 멀티버스를 전면에 내세웠으니 ‘만약에’의 상상력을 발휘할 만한 무대도 만들어줘야 한다. 무수히 존재한다는 멀티버스의 설정에 비해 <닥터 스트레인지2>의 무대는 아주 협소하다. 우리가 사는 616-지구와 완다가 바라는 아이들이 살고 있는 838-지구, 딱 둘뿐이다. 좀더 넓히면 제3의 눈을 가진 시니스터 스트레인지가 등장하는 인커전(평행 세계가 충돌하여 붕괴되는 현상)된 세상 정도다. 친절하게도 838-지구는 완다의 아이들도 있고, 볼거리를 위한 일루미나티도 있는, 평행 세계에 대한 이해도 매우 높은 우주다. 공교롭게도 사건을 만들어줄 요소들이 한 우주에 모여 있는 셈이다.
광활하고 복잡한 무대인 척하지만 정해진 중간 경로를 약속한 듯 찍고 돌아다니는 방식은 이미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서 사용한 바 있다. MCU는 매우 넓은 개념의 세계를 보이지 않는 벽으로 둘러싸 선택지를 좁힌다. 롤플레잉 게임에서 넓은 필드처럼 보이지만 정해진 루트 외에는 갈 수 없는 것과 비슷한 감각이라고 할까. MCU에서 보이지 않는 벽의 이름은 다름 아닌 ‘우연’이다. <닥터 스트레인지2>는 우연을 필연으로 납득시켜려 애쓰지 않는다. 그냥 세계의 구성처럼 제시되고 끝난다. 예컨대 어느 날 멀티버스를 통과하며 여행할 수 있는 차베즈라는 존재가 나타난 것은 이야기를 위한 우연이다. 정확히 말해 멀티버스를 무대로 활용해야 하기 때문에 이를 여행할 수 있는 능력자가 필요하고, 막혀 있는 멀티버스를 넘나드는 또 다른 기술 드림워킹도 만들어졌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설정 단계에선 우연을 운명처럼 제시할 수 있다. 시작할 땐 이야기가 쉽게 무너지지 않는 법이다. 하지만 캐릭터를 구축하기 위한 사건에 우연이 남발되기 시작하면 몰입을 유지하기 쉽지 않다.
다시 강조하건대, 정보의 제시와 별개로 설득에는 시간이 걸린다. MCU는 단일 영화에서 해결하기 힘든 것들을 전작들의 학습과 축적을 통해 해결해왔다. 그 정도는 날이 갈수록 심해져 <완다비전>처럼 이제 영화가 아닌 오리지널 시리즈에도 그 역할을 맡기고 있다. 그렇게 세계는 무한히 확장되고 설명해야 할 것들은 많아지는데 시간이 없을 때, MCU는 이제 대놓고 우연이라는 치트키를 남발하기 시작한다. 차베즈가 스칼렛 위치를 피해 우연히 발현된 능력으로 다른 우주로 건너갈 때 왜 16개의 우주를 스쳐 지나간 후에 838-지구에 도착하는가. 838-지구는 왜 <스타트렉> 시리즈처럼 적당한 리얼리티와 표현하기 용이한 상상력이 버무려진 세계인가. 답은 하나다. 838-지구는 애초에 <닥터 스트레인지2>에 필요한 요소들을 뭉쳐서 창조된 세계다. 이야기 바깥의 욕망과 필연의 결과물이라고 해도 좋겠다. 요컨대 <닥터 스트레인지2>는 필연을 우연으로 가장하여 구성한 이야기다. 롤러코스터 레일처럼 경로와 답은 이미 정해져 있고 관객이 즐겨야 하는 건 레일 주변에 장식된 현란한 볼거리들이다. 주변 배경을 아무리 신기하게 포장한다고 해도 그건 배경과 곁가지에 불과하다. 당연히 이야기는 쉽고 친절하고 밋밋하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의 세계와 가짜 광기
<닥터 스트레인지2>에서 도드라지는 건 차베즈의 성장도, 닥터 스트레인지의 고뇌와 헌신도, 완다의 깊은 슬픔과 어둠도 아니다. 이 영화의 캐릭터들은 납작하다 못해 1차원적이다. 그나마 히어로로서 견뎌야 하는 지옥 같은 현실에 대한 고민들이 닥터 스트레인지와 완다에게 부여되지만 샘 레이미 감독의 전작인 <드래그 미 투 헬>(2009)에 비하면 그마저도 얄팍하기 이를 데 없다. 가령 일루미나티의 멤버로 등장하는 블랙 볼트를 처리하는 방식은 엑스트라 캐릭터를 개그로 소비하는 클리셰로 점철되어 있다. 코믹스에서 꽤 인기 있는 캐릭터를 ‘만약에’의 상상력으로 등장시킨 건 재미있는 선택이지만 막강한 위력으로 838-지구의 닥터 스트레인지를 제거했던 블랙 볼트를 자폭시키는 방식은 일종의 전투력 측정기 같은 꼴이다. 블랙 볼트처럼 캐릭터를 소비하는 태도는 크든 작든 거의 모든 캐릭터에서 묻어난다. 아니, 영화 전반에 깔린 샘 레이미 감독의 입장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닥터 스트레인지와 완다의 메인 플롯은 어쩌면 핑계일 뿐 샘 레이미는 자신이 잘해왔고 하고 싶은 것들을 풀어놓는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영화는 어떤 틀에 집어넣는다 해도 결국 감독의 색을 발휘해야 마땅하니까. 다만 모든 히어로는 각자의 정체성에 맞는 연출을 필요로 한다. 닥터 스트레인지의 정체성을 광기와 혼돈, 혹은 불안으로 잡으려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샘 레이미의 장기인 호러틱한 연출이 종종 겉돈다는 인상을 지우긴 힘들다. 점프 스퀘어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무엇이 먼저였는지 선후의 문제에서 의심이 든다. 대항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스칼렛 위치가 나를 쫓아온다는 걸 극대화하기 위한 호러 시퀀스의 차용인가, 아니면 호러의 점프 스퀘어를 보여주기 위해 캐릭터를 바꾼 것인지 모호하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후자의 혐의가 짙어 보이는 건 몇몇 장면 빼고는 캐릭터의 일관성이 흐트러지기 때문일 것이다. 모성과 광기를 오가는 완다의 모습은 입체적이라기보다는 두서없는 쪽에 가깝다. 블랙 볼트가 전투력 측정기 겸 힘자랑하다 퇴장당하는 개그 캐릭터로 소비된 것과 완다에게 종종 호러의 기운을 덧씌운 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같은 맥락의 캐릭터 낭비다. 그럼에도 꽤 흥미로운 장면을 보여주는 건 순전히 베네딕트 컴버배치와 엘리자베스 올슨의 역량, 또는 이제껏 쌓아온 캐릭터의 아우라 덕분이다.
아쉬움을 늘어놓았지만 <닥터 스트레인지2>는 꽤 멋진 장면들을 선보인다. 예컨대 카미르타지를 초토화시킨 스칼렛 위치를 피해 멀티버스 포털로 뛰어든 닥터 스트레인지와 차베즈가 스쳐 지나가는 16개의 우주는 영화 전체의 서사보다 즐겁다. 실사와 애니메이션, 추상까지 넘나드는 멀티버스 세계에 대한 표현은 이야기를 ‘어떻게’ 물질적으로 옮길 것인가에 대한 다양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물론 완전히 새롭고 참신한 건 아니다. 우리는 이미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등의 영화를 통해 비슷한 체험을 목격한 바 있다. 그럼에도 이 장면의 에너지는 영화 전체를 능가하는 면이 있다. 같은 맥락에서 닥터 스트레인지와 시니스터 스트레인지가 벌이는 음표 대결은 이 영화에 대한 호불호를 가를 지표와도 같다. 유치한 듯 새로운 장면, 닥터 스트레인지의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는 독창적인 액션 신은 반드시 필요하다. CG의 완성도나 액션의 짜임새는 접어두더라도 이 장면의 존재감이 닥터 스트레인지를 증명한다는 건 부인할 수 없다.
다만 지루하기 짝이 없는 메인 플롯에 비해 영화에 활기를 부여하는, 진정 빛나는 장면들은 사실 딱히 필요하지 않은 순간에 머문다는 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구멍이다. 인커전된 시니스터 스트레인지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이 전투는 필연적인가. 다시 말해 서사와 밀착해 있는가. 닥터 스트레인지의 자아 성찰 성장담으로 본다면, 그렇다. 하지만 내내 진행되던 스칼렛 위치와의 긴장 관계에서 본다면 헐겁게 느껴진다. 즉 이 장면 역시 스트레인지 대 스트레인지라는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 배치된 기능이다. 묻자면 스칼렛 위치를 피해 838-지구에서 도망치는 과정에서 당도한 인커전된 우주에 왜 하필 다크홀드를 가진 스트레인지가 존재하는가. <닥터 스트레인지2>는, 아니 MCU는 어느 순간부터 질문을 외면하고 있다. 사실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우연이 필연처럼 작동하도록 만드는 과정에 영화의 신비가 작동한다고 믿는다. 우리의 삶은 수많은 우연(이라 부르고 통제 바깥에 존재하는 어떤 힘)의 순간들로 채워져 있다. 이야기란 여기에 인과의 법칙과 방향을 부여하는 작업이다. 그럼에도 완벽하게 통제되고 결정된 서사는 지루하기에 창작자들은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우연의 존재감을 이야기 속에 개입시킨다.
MCU의 서사는 정확히 반대로 걷는다. 이미 결정된 세계와 좁은 이야기에서 마치 여러 갈래의 상상력과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처럼 우연으로 포장한다.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에서 미스테리오(제이크 질런홀)가 지어낸 거짓말, 멀티버스의 존재를 진짜로 만들려면 그 정도 뻔뻔함은 있어야 하는 걸까. <닥터 스트레인지2>는 단 한 장면으로 설명 가능하다.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쿠키 영상에서 838-지구의 노점상은 스트레인지에게 시비를 걸었다는 이유로 영화가 끝날 때까지 자기 얼굴에 주먹질을 하는 마법에 걸린다. 그리고 드디어 쿠키 영상에서 외치는 한마디. “드디어 끝났어!” 영화의 크레딧까지 다 올라온 후에 들려오는 이 외침은 이야기 세계라는 제4의 벽을 허무는 농담이다. 이 장면을 재치 있다고 받아들이는 쪽은 MCU의 허상을 합의된 농담으로 즐길 수 있다. 헛웃음이 터진다면 당신은 아직 영화가 현실의 어떤 순간을 초과하여 담을 수 있다고, 보이는 것 이외에 표현 가능한 것들이 존재한다고 믿는 쪽이다. <닥터 스트레인지2>는 혼란스럽지도 광기가 엿보이지도 않는다. 모성에 대한 집착으로 미쳐버린 완다는 너무 간단하게 제정신을 회복하고 뒤죽박죽 섞이며 혼란스러워야 할 멀티버스는 보이지 않는 우연을 가장한 필연의 벽으로 견고하게 보호되어 단선적인 서사로 정리된다. 아무리 점프 스퀘어를 때려붓고, 다른 우주와 시공간을 오가고, 미친 척을 해봐도 여기에 광기의 그림자 따윈 없다. 한없이 가볍고 유쾌한 농담과 코스프레. 물론 이 농담(혹은 농담 같은 상황 자체가)은 꽤 매력적이긴 하다.
광기가 지루함을 갈라놓을 때까지
광기란 무엇인가. 한때는 인지 바깥에 존재하는 신비로운 힘, 심연의 언어로 중시되었던 상태다. 상상력, 창조성, 예술성의 또 다른 이름이라 불러도 좋겠다. 무언가에 미쳐 있을 때 도달하는 설명되지 않는 상태. 설명되지 않기에 이성적 사고로부터 추방되고 감금되고 교정을 강요받기도 했다. 서사의 그물에 포획되어 충성하는 영화들은 재현된 현실을 가지런히 설명하고자 한다. 그 언어 안에 들어가지 않을 때 그것은 실패한 것, 잉여로운 것 취급을 받는다. <닥터 스트레인지2>가 광기를 제목에 내걸었음에도 코스프레에 불과한 것처럼 다가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광기의 흔적은 존재하되 설명되지 않는 것에서 감지된다. 영화에 빗댄다면 화면을 목격해야만 획득할 수 있는 어떤 상태가 있다. 물론 모든 장면들은 서사에 봉사한다. 하지만 몇몇 영화는 서사를 초과하는 순간들을 담아내기도 한다. 그리고 이건 감독의 의도를 초과하는 순간들이기도 하다. 그 순간에만 허락된 덩어리 같은 무언가를 ‘우연히’ 포착하는 행위. 장르영화라도 충분히 가능하다. 예컨대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큐어>(1997) 초반, 기억을 잃은 마미야(하기와라 마사토)가 해변가를 떠돌다 한 남자를 만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서사적으로 둘의 만남을 주선하는 것으로 역할을 다한다. 하지만 긴 호흡으로 한폭의 액자를 관찰하는 듯 담아낸 이 장면에서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감지된다. ‘무언가’라는 뭉툭한 표현을 용서하시길. 수백 마디의 언어를 빌려와도 이 순간에 담긴 기이한 공기를 형용하기는 힘들 것이다. 플롯과 내러티브라는 이성이 포획하지 못하는, 그 순간에만 존재했을 어떤 기적. 그것은 영화가 관객과 만날 때마다 새로운 의미로 거듭난다. 광기를 다른 단어로 표현하자면 언어 바깥에 존재하는 여백, 혹은 목격자에 의해 완성되는 광장이라고 해도 좋겠다. 모든 장면이 그런 순간들로 가득 찬 영화가 아니어도 좋다. <큐어>처럼 장르의 클리셰를 충실하게 따라가는 영화도 곳곳에 그러한 틈새를 벌려놓을 수 있다. 그리하여 어느새 길들여진 영화들의 습관을 갈라놓고 자신의 이야기를 투영할 수 있게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우연을 필연처럼 포착하고 받아들이는 영화들. MCU에 그걸 꼭 바라겠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샘 레이미는 그런 균열을 창조해온 감독 중 하나다. 광기의 흔적과 스타일은 남아 있되 진짜 광기의 에너지를 포착하지 못한 것이 그래서 못내 아쉽다. 게다가 마블의 오리지널 시리즈 <문나이트>에서조차 몇몇 장면에서는 그러한 징후가 감지된다. 어쩌면 아직 이야기가 완전히 끝나지 않은 시리즈라서 그렇게 보이는 착시일지도 모르지만 정신분열 히어로인 문나이트는 광기의 흔적을 발견한다. MCU 영화들이 확장의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시리즈들은 가능성을 품고 분열 중이다. 제대로 미치는 건 이토록 험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