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이지현 평론가의 '파리, 13구'
2022-05-25
글 : 이지현 (영화평론가)
'다름'을 지키며, '비슷한 것'을 조화시키기

편집 리듬이 좋고, 대사가 좋은 영화다. 짧고 일상적인 문장이 리듬을 형성한다. 영화 전체가 마치 하나의 음악 같다.

누군가 ‘러브 게임’이라 불러도 상관없을 정도로 <파리, 13구>의 인물들은 소란스럽다. 에밀리(루시 장), 카미유(마키타 삼바), 노라(노에미 메를랑), 세 사람의 모습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삼각관계’와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친구’나 ‘연인’이란 표현도 어울리지 않는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에밀리는 “장례식에 참석하면 우린 사귀는 거야”라고 말하는데, 이 말의 효력도 믿을 수 없다. 실상 영화 속의 인물들과 ‘약속’이란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노라와 앰버 스위트(카미유 베토미에)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잘 지낼 수 있을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이 후자의 커플은 ‘한동안은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싶게 만든다. 참으로 이상한 상상이다. 긍정의 대사를 듣고 파탄을 수긍하게 되고, 육체가 쓰러지는 추락의 장면을 보고 행복을 그리게 된다. 요컨대 이 영화에서 드러나는 ‘현재의 사회적 관계’를 보이는 대로 믿는 것은 어리석어 보인다.

데뷔작 <그들이 어떻게 추락하는지 보라>(1994)를 만들던 시절에 자크 오디아르는 40대 초반이었다. 당시 그는 시나리오작가로 일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의도가 작품에 투영되지 않아 지쳐 있었다. 그리하여 늦은 나이에 연출자로 전환을 결심했다. 일흔을 바라보는 현재의 상황에서, 이제껏 그가 만든 영화 중 가장 젊은 영화가 등장했다. 늘 남성적 장르에 몰두하던 그가 급진적 성향의 로맨틱 코미디로 돌아온 것이다. 모두가 이르듯 이번 영화는 여성주의적인 관점을 지녔고, 감상에의 몰입을 이끄는 멜로드라마적 요소가 짙다. 일부 관객은 오디아르의 피상적 성향을 탓하며 여전히 불호를 나타내지만, 그의 새 영화에는 급변하는 세계에 대한 거대한 관측이 담겨 있다. 과도기적 소품으로 치부하기에는 작품이 지닌 아름다움이 과히 복잡하고 영롱하다.

원작은 에이드리언 코미네의 단편소설 3편이다. 그래픽노블 몇편을 하나의 시나리오로 각색하는 과정에서 작가들은 새 인물을 창조한다. 바로 ‘카미유’다. 이야기 초반에 그는 임시 교사로 소개되지만, 어느새 부동산업자로 변해서 영화에 등장한다. 카미유는 아프리카계 프랑스인으로, 지식인 집안의 장남이다. 그가 머무는 아파트의 주인은 ‘에밀리’인데, 그녀는 대만 출신의 프랑스인이다. 겉보기와 다르게 고학력자로, 직업 선택이 매우 독특한 편이다. 그랑제콜에서 공부했음에도 콜센터에서 일하고, 식당에서 음식을 나른다. 그런 그녀에게 카미유는 “왜 그렇게 열심히 공부해서 그런 일을 해?”라고 묻는다. 그녀는 “우리 부모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던데?”라고 답한다. 한편 보르도 출신의 노라는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파리로 온다. 그저 평범한 학생이 되고 싶었지만, 사건이 발생한다. 결국 파리에서 그녀는 부동산 중개업자가 된다. 이 과정에서 노라는 카미유를 만난다. 한 남자를 중심으로 두 여자가 연결된다. 그리고 불현듯 노라 앞으로, 캠걸 ‘앰버 스위트’가 나타난다. 그녀의 등장은 미래지향적이다. 이 인물은 가명을 사용하고, 진짜 얼굴을 감추며, 인터넷이 제공하는 가상의 공간에서만 존재한다. 앰버는 그저 다양성의 일환으로만 여기기엔 지나칠 만큼 강력한 캐릭터다. 그녀의 등장으로 기존의 원칙들은 혼동을 일으킨다. “인터넷에서 누가 진짜 이름을 써?”라는 대사가 전하듯, 그녀는 통속을 깨고 무정부주의의 세상을 가시권 안으로 들어오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언뜻 극 전체는 옴니버스 구성을 따른다. 하지만 앰버의 등장 이후에 모든 에피소드들은 파편화된다. 결말 역시 퍼즐처럼 맞춰지지 않는다. 이 점이 중요하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되짚게 만들기 때문이다. 제목에 담긴 ‘지역명’은 어쩌면 앰버의 등장으로 더욱 강조되는 것 같다. 오직 ‘도시’만이 흔들리지 않고, 시대의 혼동에 맞서고 있다. 실제로 첫 번째 숏부터 마지막 숏까지, 사선이 주도하는 도시 배경은 변함없는 모노톤으로 인물들을 감싼다. 그렇게 스케치되는 파리의 남쪽 끝 ‘올림피아드 지구’(원제 ‘Les Olympiades’)는 고정된 ‘원칙’이 되어 영화에서 작동한다. 참고로 이곳은 1970년대 도시 재개발사업으로 형성되었다. 1968년 그르노블 동계올림픽의 영향으로 지역명이 정해졌고, 고층 타워의 이름은 ‘올림픽 개최 도시명’으로, 거리의 명칭은 ‘올림픽 참가 종목명’으로 명명됐다. 감독의 설명처럼 지역의 중심 구역 비주얼은 “아시아의 대도시처럼 보일 정도로 현대적”이다. 이곳에 사는 인물들은 모두가 ‘스스로 자신이 욕망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히려 이들은 ‘어떤 것들로부터의 회피’에 더 가까운 삶을 살아간다. 에밀리는 가족의 유산으로부터, 카미유는 감정적 상처로부터, 노라는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애쓴다. 관객은 파리 13구를 배경으로 이 인물들의 움직임을 지켜본다.

그러고 보니 캐릭터들 각각의 패턴이 감독의 삶의 경로와 몹시 닮았다. 영화감독이었던 아버지의 영향력은 그의 아들을 도리어 연출자의 길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오디아르가 스스로 고백하듯 영화가 삶의 일부였기에 “일종의 폭식증과 다소 히스테리적인 절충주의를 통해” 그는 작업해야 했다. 어쩌면 그의 특유의 장르적 습관은 이 과정에서 형성됐는지도 모른다. 그는 늘 ‘하나의 출발점’을 두고 ‘반대의 것’을 되짚는 이야기를 구상한다. 거기에 더해, 이번 영화는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이라는 누벨바그의 유명한 레퍼런스를 참고한다. 에릭 로메르의 영화가 공개된 시기는 1969년으로, 당시 오디아르는 17살이었다. 그리고 파리에는 한창 올림피아드 지구가 건설되고 있었다. 그때 형성된 도시의 외관은 지금까지 바뀌지 않고 머물러 있다. 하지만 사람들의 행동 패턴은 지난 50년간 완전히 뒤바뀌었다. “모든 말을 거쳐 이 밤이 끝나면, 더이상 서로에 대한 육신의 욕망조차 느끼지 않는다”는 로메르의 언급은 현시점에서 정확히 역전되어 나타난다. 말없이 육체를 탐닉하는 젊은이들을 통해 <파리, 13구>는 그간 쌓인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격차를 통감하게 만든다.

수많은 누벨바그의 후예들을 보았지만 이토록 장르에 집착하는 연출자는 없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심리학적 영화와 사회학적 영화에서 감독들은 스스로 ‘관찰자’의 임무를 자처하는 듯 보인다. 그렇지만 모럴리스트들은 다르다. 그들은 절대로 규범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대신 죽음과 사상에 대해 고민한다. 그리고 시대가 드러내는 미덕을 이야기한다. 모럴의 영화라서 옹호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가 지키려는 ‘다름’과, 그럼에도 ‘비슷한 것’을 조화시키는 감각의 리듬을 좋아하는 편이다. 만일 도덕의 원칙이 ‘숭고한 삶’이라 한다면, 그 때문에 피상성을 지닌 영화를 선호하지 않는다면, 그 역시 취향의 문제라고 믿는다. 중요한 것은 2021년에 오디아르가 바라본 ‘현실’이 그의 영화에서 지표가 되어 드러난다는 점이다. <파리, 13구>는 지금을 기록한다. 그리고 미래를 생각하게 만든다. 영화를 통해 시대를 드러내는 것, 그 자체가 세계의 아름다움을 책임지는 예술가의 태도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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