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이지현 평론가의 '올리 마키의 가장 행복한 날'
2022-06-22
글 : 이지현 (영화평론가)
평범한 공산주의자의 진정한 희망

환상이나 꿈이 아닌, 순수한 내면이 감지되는 영화다. 구닥다리처럼 느낄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는 완전히 현대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토록 쿨한 흑백영화라니.

사람들은 수군거린다. “저 권투 선수가 코뮤니스트라던데?”라고. 이들의 대화에 영화는 별다른 대답을 내놓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신경이 쓰인다. 만일 올리 마키(야르코 라티)의 관점에서 지난 상황을 되돌아본다면, 이야기의 굴곡이 더 강해질 것만 같다. 미국의 복싱 챔피언을 무너뜨리는 국가적 영웅의 위상을 포기하면서까지 그가 얻고자 한 성취가 무엇인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지방의 제빵사 출신 아마추어 권투 선수가 스타가 될 찰나에, 그는 의외의 선택을 한다.

언뜻 전기영화의 방식을 취한 듯 이야기가 나열되지만, 결과적으로 짐작하지 못한 방향에서 플롯은 무너진다. 그리고 처음 접하는 방식으로 이야기 전체가 재조합된다. 흑백 화면의 사실적인 질감은 이 과정에서 드라마에 통일성을 부여한다. 흑백의 감각적 비주얼이 정서적으로 관객을 고전적인 시선으로 몰아가기 때문이다.

“제가 사랑에 빠진 것 같아요”

1962년으로 설정된 배경을 채색하기 위해 감독은 코닥의 16mm 흑백필름인 트라이엑스를 공수하기로 했다. 트라이엑스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뉴스릴을 촬영하는 데 쓰인 필름으로, 유럽에 남아 있는 물량이 충분치 않아서 그는 코닥 본사에 재생산을 요청해서 촬영분을 보충했다고 한다.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누구라도 흑백의 핸드헬드 질감이 ‘리얼리즘의 동반자’임을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현실과 동떨어진 과거의 이야기가 그럴 법한 색채와 만나 관객의 인식을 단숨에 장악하는 데 힘을 보탠다. 이 과정에서 흑과 백의 색깔은 내러티브의 일부가 된다. 마치 인류의 역사처럼, 영화 속 이야기가 상대적이란 것을 이 고전적 색채의 조합은 보여준다. 한때 실재했지만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영역은 그리하여 완성된다. 이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며, 따라서 서사 규칙에 따를 필요가 없다. 다만 기술적 감각을 미장센으로 활용해 진부해 보일지도 모르는 감정의 감싸기에 연출자는 몰두한다. 적절한 의미와 비유적 의미 사이의 유사성을 끊임없이 탐구하며, 진짜 말하고자 하는 개념적 아이디어에 접근한다.

우회적인 우화의 흔적은 영화 곳곳에 흩어져 있다. 이들 전부를 끄집어낼 수는 없지만, 줄거리에서 벗어나는 몇 가지 굽어진 에피소드들을 살필 필요는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영웅적 ‘스포츠 스타 되기’의 과정이다. 표면적으로 3kg의 몸무게를 감량해야 한다는 조건이 이 과정의 가시적 목표가 된다. 물론 이 퀘스트를 달성한다고 해서 이야기의 무게중심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주인공 역시 이를 알고 있다. 이어서 타인과의 관계에서 오는 ‘감정적인 한계’가 두 번째 고비이다. 코치 앨리스(에로 밀로노프)의 비밀이 노출되는 저택에서의 장면이 대표적이다. 관객은 모두 앨리스의 본의를 의심한다. 하지만 놀랍게도 올리는 아니다. 그는 그저 코치를 바라보기만 한다. 주변의 짓궂은 질문에도 단호하게 “그는 좋은 사람이에요”라고 답한다. 어쩌면 이 인물을 통해 올리는 자신의 미래를 예측하는 것 같다. 적대자에 대항할 방법을 고심하는 대신, 그저 눈앞의 현상이 정답이 아니란 점을 지각하는 데 그는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아붓는다. 그리하여 누구도 예상치 못한 순간에 주인공은 태도를 바꾼다. 바로 ‘로맨틱 코미디’와 부딪히는 지점에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대사 “제가 사랑에 빠진 것 같아요”는 연인이 아니라 코치를 향해 던져진 말이다. 모든 캐릭터들 중에서 앨리스는 가장 사회적인 인물이다. 이 말을 내뱉자마자 올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신화적인 가능성과 대치하는 상황이 된다. 관객이 원하는 상업 주의의 대상에서 벗어나려는 시도 역시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어쩌면 안티 히어로의 탄생이다. 미국식 쇼가 지닌 ‘관음증’의 키워드가이 과정에서 부각된다. 단상 위의 여인을 물에 빠트리는 놀이나 인형 같은 외모의 모델과 사진을 찍는 과정은 더이상 올리의 것이 아니다. 관객이 떠난 후 홀로 남은 여인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마치 거울을 보는 듯 애처롭다. 극한의 자극을 추구하는 서구식 엔터테인먼트의 마수는 그에게도 뻗어 있다. 옷을 단정하게 차려 입고 목욕탕에 침입한 다큐멘터리 촬영팀은, 줄기차게 주인공의 일거수일투족을 뒤쫓는다. 마침내 참지 못한 그가 “카메라가 없는 곳에서 훈련하고 싶다”고 토로하는 즈음에, 더이상 그에게 선택지가 없는 듯 보인다.

신화와 우화, 혹은 알레고리와 같은 비유적인 기법을 활용할 때 내러티브가 지니게 되는 가장 강력한 힘은 이중성일 것이다. 비록 진부하더라도 알레고리의 관습을 통해 영화는 두 가지의 의미 모두를 획득하게 된다. 이번에는 ‘사랑 이야기’라는 중추적 스토리에 ‘성공 실패담’이나 ‘인간관계의 허울’과 같은 부가적인 관점이 덧붙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의 마지막 결말은 그야말로 이상적이다. 넓은 공간을 에워싼 스포츠팬들의 목소리는 애초에 주인공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아주 담대하게, 세계가 제공하는 대결의 단상에서 극의 주인공은 발을 뗀다. 그리고 추락의 결말을 받아들인다. 너무나 담백해서 아쉬울 정도로, 그는 모든 것을 쉽게 잃는다. 그에게 있어 장르적인 성취는 헛된 몽상이다. 평범한 공산주의자의 진정한 희망은 영웅으로서의 서사적 본질을 향하지 않는다. 그저 보편적이고 개별적인 사랑과 마주하기를 그는 욕망한다.

스스로 행복을 깨닫는다는 일

실상 <올리 마키의 가장 행복한 날>은 성장극도 사회극도 아닌, 그저 사소한 내면의 드라마이다. 이 극의 주인공은 외부와의 소통과 상관없이 스스로 행복을 깨닫는다. 색깔 없는 시선을 교환하는 사이, 그는 최고의 가치와 조우한다. 누군가와 함께 강가를 걷고, 아이처럼 연을 날리는 순간에 인생의 위대함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다. 이 순간들을 연출하기 위해 감독은 그토록 복잡하게 디테일을 뒤쫓았다. 그리고 마침내 놀라울 정도로 단순하게, 보잘 것 없는 결말을 관객에게 보여준다. 이 영화가 전달하는 우울과 아이러니의 감성은 어쩌면 호불호를 부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진실한 마음에 근접한, 사랑의 아름다움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극장을 나서며 오랜만에 흑백의 질감과 맞아떨어지는 흑백영화를 봤다는 기분이 든다. 의도적이거나 구조적인 장치가 아니라, 그저 ‘인간다움’을 생각하게 만드는 흑백의 화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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