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퍼 지망생들이 보내오는 다이렉트 메시지 내용 중 상당수가 ‘랩을 어떻게 시작하면 되나요?’다. 대부분 10대 청소년들이 품는 귀여운 생각이다. 실제로 데모 음악을 들어달라는 메시지보다 많다. 차라리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나요?’라면 답변이 조금 수월할 것 같지만, 어쨌든 저런 게으른 고민에 대한 답은 언제나 ‘나이키’의 슬로건이 대신해준다. “그냥 하세요.”
가끔은 이런 질문도 받는다. ‘제가 곧 서른에 취업 준비생인데 이제라도 랩을 시작해도 될까요?’ 라든지 ‘30대 직장인입니다. 취미로 랩을 해보고 싶은데 늦지 않았을까요?’ 같은 고민인데, 이럴 땐 왠지 모르게 마음이 동해온다. 어린 친구들의 고민보다 무게가 조금 더 진지하게 와닿는 건, 어른의 삶에서 새로운 도전이 얼마나 난이도 있는 각오인지를 나 또한 공감하고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그냥 하면 되죠, 뭐’라고 대답할 수도 있겠지만 조금 더 뜨뜻한 진심을 담아 조언해주고 싶은 기분이 든다.
최근 공연장을 찾아온 한 관객이 내 CD에 사인을 요청하며 말을 건네왔다. “제가 형보다 한살 어린 85년생인데 다시 랩을 제대로 해보려고 합니다. 사인 옆에 열심히 하라고 메시지 한번 써주세요.” 나는 정말 멋진 결정인 것 같다며 응원해줬다. 속으로도 그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분이 앞으로 랩을 얼마나 잘하고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지는 또 다른 이야기다. 이제 내 주변엔 오랫동안 활동했던 동년배 뮤지션들이 다른 길을 가는 경우가 많다. 동시대를 살지만, 각자의 주요 타임라인은 다르다. 인생에서 중요한 터닝포인트를 창출해내는 그 각오와 에너지 자체가 때로는 결과보다 중요하다.
몇해 전 알게 된 분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올드스쿨티처’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래퍼이자 현직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이다. 직업 교사이면서 랩으로 음반까지 발표한, 힙합이 취미와 부업 사이를 줄타기하는 꽤 신기한 분이다. 40대 평범한 가장으로서 본업에도 충실하고, 음반 수집도 열심히 하며 틈틈이 창작까지 해나가는 그의 순수한 힙합 사랑에 큰 영감을 얻었고 존경하게 됐다. ‘한국에서 중년은 이런 식으로도 힙합 하며 살아간다’라는 좋은 예시를 목격한 것이다.
언뜻 비슷한 스토리의 힙합영화가 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위 아 40>은 내가 아는 한,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유일한 힙합영화다. 주인공 라다는 한때 ‘주목해야 할 30살 이하 극작가 30인’에 꼽힐 정도로 인정받는 극작가였지만 지금은 고등학교에서 연극 수업을 하는 40살의 독신 여성이다. 생계형 강사로서 학생들과의 고루한 마찰은 다반사며 제대로 된 연애는커녕 집 앞 노숙자 노인이 던지는 추파에 시달리고, 언제나 다이어트와 스트레스를 달고 사는 흑인 여성 라다의 일상은 고군분투 그 자체다. 절친의 도움으로 다시 작품을 무대에 올릴 기회가 찾아오지만 흑인 작가에게 요구되는 뻔한 스테레오타입의 결과물만 기대하는 제작자들 앞에서 결국 쓴 물을 삼킨다. 그녀의 40살 인생, 그냥 이렇게 흘러가도 괜찮은 것인가? 라다는 힘들 때마다 당당한 아티스트였던 어머니의 예술 신념을 떠올린다. 그리고 이제는 절필하더라도 진짜 하고 싶은 말과 작품을 하리라 마음먹는다. 그녀가 선택한 새로운 예술 도구는 바로 랩이다. 헤르페스에 당뇨 가진 게 많은 흑인 여자. 살도 쪘지 팍팍 거기에 천식도 한 숟가락. 전부 마당에서 빨아댄 마약 때문. 그러니까 행복한 흑인 얘기는 제발 사절이야. 농구로 성공 직전이었던 아들이 죽어버렸지. 우는 엄마의 크레인숏. 그래 영화로 만들기 딱 좋은 신파극. 흑인도 잘만 성공하는데 백인 프로듀서들은 믿지 않아. 빈곤 포르노를 쓸 거야. 성공하고 싶어? 빈곤 포르노를 써서 팔아.
친구와 학생들에게 래퍼가 되겠다고 커밍아웃(?)하며 비웃음과 걱정을 사기도 하고, SNS로 수소문한 음악 프로듀서에게 비트를 얻으러 위험한 할렘가를 들락거리게 된 라다의 일상은 이제 새로운 도전과 열정으로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위 아 40>은 여타 힙합영화처럼 래퍼의 화려한 성공담을 찾아볼 수 없다. 그저 평범한 주인공의 내적 성장에 포커스를 두고 그녀 주변에 놓인 사회의 인종차별과 중년 여성의 역할 갈등을 조명하는 데 더 힘쓴 블랙코미디에 가깝다. 사실 이 영화는 힙합과 랩을 주인공의 성장 내러티브의 도구 정도로 사용할 뿐, 정통 힙합영화들보다 장르의 농도는 다소 순한 맛이다. 그러나 40살 늦깎이 래퍼 라다가 뱉어내는 가사는 그녀만의 진정성과 재치를 동반하며 꽤 흥미롭게 다가온다. 개인의 이야기와 더불어 인종 갈등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로 힙합과 랩의 매력을 모자람 없이 보여준다. 주인공 라다 블랭크는 실제로 영화의 주연과 감독, 각본을 모두 도맡으며 자전적인 이야기를 더욱 생동감 있게 펼쳐냈다.
서른아홉. 40대 문턱에 선 나는 요즘 딱 10년 전에 느꼈던 싱숭생숭한 기분을 떠올리곤 한다. 세상의 타임라인은 여전히 아무렇지 않게 똑같이 흘러가겠지만 그래도 내 나이의 앞자리 수가 바뀐다는 것은 인생에서 중요한 분기점이다. 이런 공포심과 흥미가 동시에 뒤섞인 경험은 앞으로도 몇 차례 더 찾아올 것이다. 그래도 어쨌든 강제로 맞이할 그 새로운 챕터 안에서 재밌고 의외성 있는 도전들, 또 그에 걸맞은 뜨끈한 각오들이 분명 날 찾아와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라다와 올드스쿨티처의 지극히 평범하고도 특별한 40대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