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단단한 스물다섯, 굳세어라 투지야, <해적, 디스코왕 되다>의 이정진
2002-05-29
글 : 김현정 (객원기자)
사진 : 오계옥

이정진은 단단한 사람이다. 그가 유독 ‘단단하다’라는 형용사를 자주 쓰기 때문도 아니고, 소문난 대로 근육이 단단해서도 아니다. 그저 처음부터 그런 인상을 줄 뿐이다. 너무 더워서 짧게 깎은 머리부터 조금 살이 빠졌다는 단정한 어깨선까지, 야물게 속이 들어찬 배추처럼, 헤쳐보고 싶을 만큼 빳빳하고 싱싱하다. 그런데 스물다섯 젊은이가 무심코 하는 말까지 단단하기 그지없다. 3년 동안 연기수업을 받은 뒤 변한 것이 있느냐는 질문에 “사랑을 알게 됐어요”라며 이해 안 될 대답을 한다. “모든 영화에는 사랑이 깔려 있잖아요? 그러니까 사랑을 하고 있는 배우와 하고 있지 않은 배우는 다를 수밖에 없죠.” 아버지가 됐든 여자가 됐든 그는 연기를 알수록 사랑을 하고 싶다고 한다.

불행하게도 이 성실한 배우는 <해적, 디스코왕 되다>를 찍으면서 연기와 사랑과 함께 추위와 피로도 뼈저리게 알아버렸다. 그가 연기한 해적은 굳센 주먹과 날렵한 발길질로 뒷골목을 주름잡는 십대 소년. 폼나는 액션을 만들기 위해 한번에 서너 시간씩 무술 연습을 하다보니 끝나고 나면 숟가락 드는 손이 떨릴 정도로 피로에 절어 살았다. 심지어 사고를 칠 뻔한 적도 있었다. 해적이 디스코 수련을 하는 겨울장면을 찍다가 여름에도 들어가기 힘들다는 차가운 웅덩이 속에서 얼어죽고 빠져죽을 위기에 처했던 것이다. 그것도 동료들이 태평하게 웅덩이를 바라보며 삼겹살을 구워먹고 있던 옆에서. 그래도 여기까지는 깔끔한 편이었다. 두 친구와 함께 재래식 변소의 똥을 푸는 장면을 찍은 뒤엔 모두들 가까이 오지 말라는 바람에 버스 옆 추운 골목길에 쭈그리고 앉아 밥을 먹는 서러움까지 당했다.

그 정도면 한번쯤 몰래 울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씩씩하게 “그런 경험이 내가 마흔이 되고 쉰이 됐을 때 내 허술한 틈을 단단하게 메워줄 것”이라고 되받아친다. <해변으로 가다>에서 살인마의 희생물이 되는 젊은이들 중 한명으로 영화를 시작한 그는 쓰린 기억 하나도 그대로 놓쳐서는 안 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학에 가고 취직해서 평범하게 생을 마칠 거라고 생각했던 스무살 청년. 그가 우연히 모델이 되고 배우가 되면서 기댈 수 있었던 기둥은 주변 사람들의 격려와 충고였다. 영화는 그런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기회이므로, 남들 눈엔 실패로 비치더라도, 그 자신에겐 항상 거름으로 남는 시간인 것이다. “잘못이 그대로 들통나버리는” 커다란 스크린 앞에서도, 그는 앞으로 얼마든지 채울 수 있는 여지가 있으므로 그리 많이 두렵지 않다.

3년 동안 개인적으로 연기 수업을 받아온 이정진은 아직 연기 외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으니까” 사는 동안엔 연기만 할 것 같다고도 했다. 그런 이정진이 유일하게 먼 미래를 바라볼 때는 아버지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고민하는 순간뿐이다. “남자라면, 그리고 배우라면 부정(父情)을 연기로 표현하는 경지에는 가야 하지 않겠어요?” 책임지지 못할 거라면 아이를 낳지도 말아야 하지만, 그 자신은 분명 아이의 인생을 책임질 만한 능력을 키울 거라고 못박는 새파란 청년. 연일 계속되는 영화홍보 활동과 드라마 촬영중에도 전화로 열심히 연기 수업 스케줄을 잡던 이정진은, 스스로 빛을 찾아 익어가는 단단한 열매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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